흥선 대원군은 어느 자리에서 하야했나

2021-06-21 0 By 월드뷰

근현대사 왜곡의 시작 ‘흥선 대원군’ (6)


월드뷰 JU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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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36회)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사당은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 (가) ] 의 위패를 모신 충청남도 청양의 모덕사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던 그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하였습니다.’

(가)에 해당하는 인물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으로 그가 상소(上疏)에서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첫째, 위에서 말한 소(疏)는 최익현이 1873년에 올린 것으로 여기에는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 내용이 없다. 둘째, 흥선 대원군은 공식적 통치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하야(下野)’라는 용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먼저,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시대의 탄핵(彈劾)은 현재의 탄핵과 다소 달라서 양사(兩司), 즉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법을 어기거나 비리를 저지른 관원의 죄를 묻고 파면할 때 적용했다.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양사에서는 탄핵 대상과 그 죄상을 분명히 적시하고 이를 국왕에게 상소해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 흔히 흥선 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하는 것은 1873년 11월 3일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이르는 것으로,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집>에는 ‘호조 참판을 사직하고 아울러 생각한 바를 진달(陳達)하는 소[辭戶曹參判, 兼陳所懷䟽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에서 최익현은 호조 참판을 사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함께 만동묘(萬東廟)의 복구, 서원(書院) 신설 허용, 국적(國賊) 신원(伸寃)의 중지, 사자(死者) 입양(入養)의 중지, 호전(胡錢: 청나라 돈) 사용 혁파, 토목공사를 위한 원납전(願納錢) 징수 중단 등의 건의와 함께 마지막에 모든 정사(政事)를 정부 조직에 따라 운영하고 종친들은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의 창덕궁 출입 전용문인 공근문(恭勤門)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함으로써 더 이상의 정치 간여(干與)를 못 하도록 했다.

▲ 흥선 대원군

만일, 이 상소가 대원군을 대상으로 했다면 대원군을 명시하고 그 죄상을 조목조목 나열한 다음 처벌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 상소로 인해 대원군의 영향력이 사라지긴 했으나 이를 두고 ‘흥선 대원군 탄핵 상소’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음은 고종의 친정 선언이다. 1863년 12월, 12살 어린 나이의 이명복이 철종(哲宗)을 이어 즉위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2년이 갓 넘은 1866년 2월 13일, 대왕대비는 철렴(撤簾: 수렴청정을 거둠)을 선언하면서 대소의 공사(公事)를 고종이 직접 총괄하도록 전교(傳敎)하고 이를 아래와 같은 언문 교서(諺文敎書)로 남긴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상의 나이가 이미 혈기 왕성한 때이고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서 슬기로운 지혜가 나날이 성숙되어 중요한 공무(公務)는 밝게 익히게 되었고 학문도 독실하게 해서 능히 모든 정사를 총괄할 수 있고 복잡한 사무를 직접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왕업을 계승해 나갈 수 있고 장차 후세에 가서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내가 처한 바에 그냥 계속 앉아있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보존하고 큰 원칙을 바로 세우는 바가 아니므로, 오늘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대소의 모든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하게 하라.

<고종실록, 1866년 2월 13일>

이어, 2월 26일에는 인정전(仁政殿)에서 고종의 친정을 축하하는 의식을 진행했으며,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이달 26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들로 사형죄 이하의 죄인은 모두 용서해 주라.’는 특별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 친정은 국가적 경사이기에 축하연을 베풀고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던 것이다. 고종 행장(行狀)에도 ‘병인(1866) 2월. 이달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이 친정을 시작했다 (丙寅 二月. 是月, 大王大妃殿撤簾, 王始親政).’라고 적고 있다. 물론 1873년 11월 4일 최익현의 처벌을 논하는 과정에서 잠시 친정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했으나 바로 없었던 것으로 하고 공식화되지는 않았다. 1863년 고종 즉위 이후 합법적인 최고의 권력 기구는 국왕인 고종과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참여한 대왕대비였으며, 1866년 대왕대비가 철렴한 이후에는 국왕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대부분 교과서의 연표에는 ‘1863 고종 즉위, 흥선 대원군 집권’이라 하여 대원군이 마치 정상적 권력을 행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만약, 1873년이 되어서야 고종이 나라를 직접 다스렸다면 <승정원일기>나 <고종 실록> 등에 수록된 그 이전의 기록은 누구의 통치 행적인지 설명이 안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원군이 집권해서 1873년 하야했다고 할 경우, 고종 10년간의 모든 역사는 대원군의 통치 행위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는 합법적 통치기구인 고종은 뒷전으로 제쳐두고 불법·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흥선 대원군을 마치 합법적 최고 통치권자이자 조선을 재정비할 개혁적 정치가인 양 많은 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있다.

그 기간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이니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다. 10년 동안 우리 역사에서 고종은 보이지 않고 흥선 대원군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는 정상적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며 불법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는 역사 서술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