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토마스에 대한 평가

2021-06-17 0 By 월드뷰

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 (6)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2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토마스는 왜 조선에 왔는가? : 선교, 통상, 그리고 평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중심인물은 역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였다. 토마스가 조선에 온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적인 목적이 가장 강했다. 그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기 전에 이미 두 차례 조선인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1865년 가을에 직접 조선에 왔고, 두 번째는 중국 북경에서 동지사를 만나서 조선의 사정을 들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서 그는 조선 선교의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 함대의 통역으로 나선 것도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조선행에 동의했던 런던선교회 북경 책임자인 에드킨스(Joseph Edkins)는 토마스의 조선행이 “본국의 선교회를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여행은 “토마스의 조선 선교의 견지에서 볼 때 그 의미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 토마스는 조선에 와서 그와 만난 문정관에게 자신은 천주교인이 아니고, 개신교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 야소성교(예수교)는 천도를 체현하고, 인심을 바로잡아 사(邪) 속(俗)을 교화하고 있으니 인의와 충효를 모두 갖추었다. 전부 천하의 백성들에게 따르라고 할 만한 좋은 것이니, 천주교와는 다르다.”2) 여기에서 토마스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는 인의와 충효를 받아들이는 종교이며,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토마스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조선인들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 같이 국가에서 금지하는 사교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은 나중에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기록되어 조선으로 하여금 천주교보다 개신교를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했고, 결국 고종은 개신교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다.

둘째 목적은 조선과 통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함대가 베트남으로 떠난 다음, 토마스는 조선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바로 무역선인 제너럴셔먼호이다. 여기에서 선교와 무역이 결합한 것이다. 토마스는 선교사이지만 세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당시 국제사회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우리가 평양으로 가는 것은 그곳에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다. 현재 배에 타고 있는 손님은 평양에 가서 통상 무역을 하고 싶어 한다.”라고 말했다.3) 통상은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조선의 입장에 대해서 토마스는 이미 중국에서 6월 13일 자로 보낸 자문에서 조선에 통상을 명하였다고 말하면서 아직 그것을 모르냐고 반문했다.4) 영국은 앞서 여러 차례 조선과 통상을 시도했다. 미국 선적이지만 영국인이 운영하는 무역선 제너럴셔먼호와 함께 토마스는 통상에 나섰던 것이다. 비록 토마스의 일차적인 목적은 선교였지만 제너럴셔먼호를 통해서 왔기 때문에 통상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통상을 금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도 무역은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토마스의 노력은 조선에 기회를 제공한 것이며, 조선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목적은 조선에 닥친 전쟁의 위협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일시적으로 베트남으로 갔던 프랑스 함대는 그곳의 반란을 정복한 다음에 곧바로 조선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필자는 토마스가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조선 선교를 꿈꾸는 선교사로서 조선을 이런 상황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큰 배가 이미 왕경으로 갔는데, 그 배는 우리 배와 같지 않다. 매우 분노하고 있으므로 약탈할까 두렵다.”라고 하며 프랑스가 얼마나 조선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박규수에 의하면 토마스는 “프랑스 병선이 바야흐로 대거 내도한다. 만약 우리에게 교역을 허락하면 마땅히 양국을 위해 전쟁을 멈추게 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5) 토마스는 영국과 조선의 통상을 통해 장차 조선이 프랑스에 당할 분노를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토마스는 당시 프랑스가 조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조선의 왕을 폐위시키고, 천주교 여신도의 남편을 조선의 왕으로 세우고 천주교를 국교로 만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벨로네(Henri de Bellonet) 공사는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에게 “황제 폐하의 보호령 아래 조선의 운명이 위임될 제후는 기독교 종교를 공언해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도 복자 순교자들의 벗이자 제자이며 입문자인 여성의 남편이 사전에 지명되면 좋을 것 같으며 그러면 그가 주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그런 의사를 표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6) 토마스와 영국은 조선이 프랑스에 독점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토마스는 오히려 조선이 영국과 통상 조약을 맺게 되면 프랑스가 조선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조선으로서는 서양 세력의 균세를 통해 독립을 보장받고, 영국은 자신들이 원래 바라던 통상 이익을 얻게 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는 조선에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 선교 단체에서 제작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2. 토마스는 제국주의의 침략자인가?


토마스는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제국주의 침략의 전형적인 예로 설명하고 있고,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는 북한의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7)

첫째, 토마스가 타고 온 배는 단순한 상선이 아니라 무기로 무장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제너럴셔먼호는 무력으로 침공할 계획을 갖고 조선에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좀 과한 평가이다. 당시는 상선이라도 안전을 위해서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문정관의 기록을 보면 셔먼호가 처음부터 무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항해를 위해서 식료품을 요구했고, 조선 측이 식료품을 제공해 주었을 때 여기에 상응하는 감사를 표하고, 답례를 하려고 했다. 제너럴셔먼호가 무력을 행사한 것은 자신의 신변이 불안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물론 무력을 행사해서 인명을 살상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가 처음부터 무력을 통해서 통상을 달성하려고 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둘째,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내양으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은 이양선이 외양에서 항해하는 것은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셔먼호는 대동강을 따라서 내륙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이것은 분명히 국경을 무단 침입하는 행동이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복잡한 관계였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며,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질서 안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중국으로부터 모종의 허가를 받아서 조선에 온 것이다. 그는 1865년 조선에 올 때도 호조를 받아왔고, 오문환과 영국 측의 문서에 의하면 1866년 셔먼호와 함께 올 때도 토마스는 중국의 공친왕으로부터 호조를 받아 조선에 왔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자신이 조선에 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내양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에게 제너럴셔먼호와 토마스는 제국주의의 침략자로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선교와 통상에 대한 강한 열망, 그리고 프랑스와 조선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위험을 알리고, 이것을 피하게 해야 한다는 강한 바람이 있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내해로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선교를 진행하려고 했다. 특별히 선교와 통상의 자유를 강조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토마스의 행동은 달리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반미 운동의 출발로 이해하고 있다. 북한 교과서는 이 사건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며, 여기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응우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역사책은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는 미국 놈들이 침략선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침입해 왔을 때 인민들의 앞장에서 용감히 싸워 놈들의 배를 불태워 버리시었다.”라고 주장한다.8)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끝난 다음 조정(朝廷)이 내린 포상자 명단에는 김응우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반미에서 찾고, 그 뿌리를 김일성의 조상에게 두려고 하는 의도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사실과는 다른 선전에 불과하다.

사실 188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에는 이 배의 선적이 미국이라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배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영국인 토마스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이 사건을 미국과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배가 미국 소속이라는 것을 안 것은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이며, 이때, 이들은 배에 탄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인 줄로 알고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점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한국 최초의 대미 투쟁으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북한 정권의 역사 조작인 것이다.


3. 토마스 사건의 역사적 의의


필자는 1860년대 당시 조선 사회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이 네 가지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성리학적인 조선 사회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대원군은 이 길을 걸어가고자 했지만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이었다. 둘째는 동학처럼, 전통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적인 것을 배우지 않고서는 당시 조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셋째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조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인박해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천주교의 배후 세력인 프랑스는 조선 왕조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자신들의 통치를 수행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했다. 이런 프랑스의 입장을 조선이 따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의 등장이다. 19세기 영국은 서구의 문명을 전달하고, 통상을 증대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영토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영국은 개신교 국가로서 기독교를 식민지국에 강요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1866년 토마스의 선교는 순교로서 끝이 났다. 영미 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 선교는 그 첫걸음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은 결국 조선을 개항하는 데 있어서 천주교와 천주교 국가인 프랑스를 택하기보다는 개신교와 개신교 국가인 미국을 택했다. 결국, 토마스가 열어놓은 그 문을 통해서 미국과 영국 중심의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은 개화 인사들과 더불어 조선을 새로운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토마스가 열어놓은 영미 개신교의 문화 가운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mspark@stu.ac.kr>


1) 조셉 에드킨스가 티드만에게 (1866. 7. 25); 민경배, 『로버트 토마스』, 178.
2) 『평안감영계록』 32 병인 7월 13일; 『일성록』 병인 7월 18일.
3) 『평안감영계록』 32 병인 7월 13일; 사료 고종시대사
4) 하지만 중국에서 보낸 6월 13일자 자문에는 통상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토마스가 의도적으로 자문을 왜곡하여 말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자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
5) 『환재집』 권 7 (성균관대학교 동문화연구원, 2016), 의황해도관찰사미국인조회, 장 8 앞뒤;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122에서 재인용.
6) 벨로넷 —> 로즈 (고종 3년 6월 2일); Documents relatifs à l’histoire des relations franco-coréenne, Choi Seok-Woo(崔奭祐) compilés par: (Seoul, 1986), 272~273; 사료 고종시대사
7) 한철호 외, 『한국사』 (미래엔, 2011), 105.
8)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3), p. 6.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 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