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국왕인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척화비, 국왕인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2021-05-22 0 By 월드뷰

근현대사 왜곡의 시작 ‘흥선 대원군’ (5)


월드뷰 MA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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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척화비(斥和碑)를 ‘1871년(고종 8년) 흥선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라 정의하고, 1871년 신미양요 후 미군이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싸운 뒤 4월 25일 퇴각하자,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전국 각지에 세웠다고 했다.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다는 서술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흥선 대원군은 신미양요가 끝난 뒤 병인양요 때 반포한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건립하였다. 이는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금성출판사, 96>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한다는 의지를 널리 알렸다. <천재교육, 101>

과연 그럴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밝힌 1871년 4월 25일 자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연생전(延生殿) 진강(進講) 시에 영의정 홍순목과 나눈 척화와 관련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고종은 이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하교를 하고 이를 조보(朝報)에 실어 반포하도록 했다.

이 오랑캐가 화친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예의를 지켜온 나라가 어찌 개나 양 같은 무리와 서로 화친한단 말인가. 비록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통렬히 끊어버리고야 말 것이니, 만약 ‘화친’이라는 글자로 말하는 자가 있거든 매국(賣國)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승정원일기, 1871년 4월 25일>

화친(和親)을 말하는 자에 대한 엄격한 법률을 적용할 것을 지시한 고종의 명이다.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실린 <고종실록>에는 아래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때 종로(鐘路) 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는, ‘오랑캐들이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고종실록, 1871년 4월 25일>

이는 곧 고종의 명이 조보에 실려 반포되자 바로 척화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국가 시책이니 국왕의 명에 의해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세워진 비석에는 ‘양이의 침범에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 행위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나의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서 신미년에 세움(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고종의 명에 의하여 척화비가 세워졌다는 사실(史實)은 1876년 1월 27일 자, 우통례(右通禮) 오상현의 상소(上疏)에도 나타난다.

“전하께서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도(邪道)를 배척하시며 네거리에 비를 세워 ‘양이(洋夷)가 침범하였는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 행위이다.’는 글을 새겨 만년토록 온 나라의 백성에게 경계하셨으니, 누구인들 아주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고종실록, 1876년 1월 27일>

척화비(국립중앙박물관)

특히 이 글에서 ‘만년토록 온 나라의 백성에게 경계하셨다.’라는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민(臣民)은 자손(子孫)과 같은 뜻의 단어로 척화비에 새겨진 ‘나의 만년 자손들에게 경계한다.’라는 문장과 단어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의 글이다. 백성들을 신민(臣民)이라 하고 자손(子孫)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국왕 외에 따로 없다. 흥선 대원군은 군주가 아니니 백성을 자손이라 일컫는 것은 어색하다. 당연히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웠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물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흥선 대원군이 척화비 세우는 일을 진두지휘하였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실무를 담당한 것이지 최고 통치자로서 명을 내린 것은 아니다. 척화비는 국가 최고 통치자인 고종이 화친(和親)을 배척한다는 의지를 담아 세운 비석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대국민 담화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담화문 성격의 비석을 공식적 통치 기구에 있지 않은 흥선 대원군이 세운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다음은 척화비 건립 시기와 관련된 문제다. 교과서에는 대부분 신미양요 이후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1866년에 문장을 짓고 이때 전국 도회지에 세웠다고 했으니 척화비 건립의 시점은 1866년 병인년이다. 게다가 신미양요의 경과를 살펴보면, 1871년 4월 14일 미군의 포함(砲艦) 2척이 손돌목에 이르렀을 때 수병(守兵)이 포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어 4월 23일에 초지진 상륙작전을 개시한 미군에 의해 24일에 덕진진과 광성보가 연이어 점령당하고, 어재연 장군이 전사하고 수(帥)자기를 빼앗기는 참패를 겪었다. 그리고 1871년 4월 25일 자 고종실록에는 “이때 종로 거리와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미군 포함이 작약도에서 조선 대표를 기다리다가 본국으로 귀환한 5월 16일에 신미양요는 종료되었다. 따라서 척화비 건립은 신미양요가 끝난 다음이 아니라 1866년에 이미 글을 지어놓고 신미양요 중에 세워졌던 것이다. 우리 역사는 척화비를 건립한 주체나 시기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