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에서 본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2021-05-18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5)
월드뷰 MA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2 |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여러 나라 입장을 살펴보자. 먼저 프랑스의 태도이다. 당시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 있었고, 천주교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그리하여 1860년대에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어서 조선도 식민지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다.
조선에서 탈출한 천주교 선교사 리델(Félix-Clair Ridel)에게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는 이런 기회에 조선의 왕을 바꾸고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인데, 만일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면 천주교 박해의 문제를 청이 해결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프랑스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벨로네는 먼저 이 문제를 청의 총리아문에 제기했다.
벨로네가 청나라 공친왕에게 1866년 7월 13일(음력 6월 2일) 보낸 문서에서 자신들은 조선을 정복하러 갈 것이며, 중국은 스스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프랑스의 논리는 이렇다. 만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면 천진조약의 내용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야 하며, 만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면 청은 조선에 대한 어떤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2. 조선에 대한 중국의 입장
여기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미묘하다. 원래 중화 질서에 의하면 내치는 자주적이지만 국제문제는 천자국인 중국이 담당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으로서는 조선의 문제에 개입하기 어려웠다. 중국은 스스로 국제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은 프랑스에 조선이 외치와 내치를 자주적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조선을 중화 질서에 묶어 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이 프랑스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다. 즉, 프랑스와는 마찰을 피하고, 조선에는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해야 할 일은 양극단을 피하고, 중간적인 타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공친왕이 동치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신 등이 살펴보건대 작년에 벨로네가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청하여 조선에 문서를 보내달라고 한 것은 프랑스에서 조선에 가서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그러한 뜻을 품어온 지 오래입니다. 올해 3월에 조선에서 프랑스 주교 등을 살해한 일이 분명히 있었으며, 프랑스 공사가 이미 조회를 보내왔으니, 만약 프랑스 공사를 저지한다면 그 고집스러운 성품에 갑자기 수긍하면서 따르지는 않을 것이고, 만약 프랑스 공사가 하고자 하는 대로 놔둔다면 조공하는 신하국이 그 피해를 입는 것을 어찌 홀대하며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함께 상의한바 마땅히 이번에는 양극단을 금하도록 권고하여, 다만 프랑스 공사에게 조복을 보내기를, 중국에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서도 중재하여 저들이 갑자가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조정하는 가운데 은밀히 그들의 헛되이 교만하게 구는 기세를 꺾어, 차후에 프랑스 공사 등이 다른 말이 있으면 총리아문에서 수시로 정형을 살폈다가 기회를 보아 설득하며 아울러 예부에 알리는 외에, 삼가 우선 처리한 연유를 공손히 주접으로 갖추고, 영국 공사 웨이드와 올콕의 조회 각 1건과 프랑스 공사 벨로네의 조회 1건, 신 등이 영국과 프랑스 공사에게 조복한 각 1건을 초록하여 어람(御覽)으로 올립니다.
위의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프랑스가 조선을 공격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둘째, 조선이 피해를 입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셋째, 중국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하여금 “양극단을 금하도록” 권고해야 한다. 넷째, 중국은 기회를 보아 프랑스를 설득한다. 다섯째,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영국에도 알리고 있다.
공친왕은 당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던 예부에 7월 24일(음력 6월 13일) 자문을 보냈는데, 이 자문은 조선에 전달되었다. 자문은 중국이 과거의 불간섭 정책을 버리고, 평화를 위해서 중재를 하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는 공친왕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의한 “양극단을 금하도록 한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다. 필자는 아마도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문서를 전달할 때, 구두로 통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3. 조선에 대한 영국의 입장
공친왕이 동치제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공친왕이 당시의 상황을 영국 공사에게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 공친왕은 영국이 중국에 조선과의 통상과 항해를 위한 연안 탐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영국이 중재에 나서도록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영토를 점령하기보다는 무역을 추구했다. 공친왕은 “영국은 통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환(患)은 크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영국의 정책은 러시아와는 매우 다르다고 한다. 가능한 대로 영국 정부는 선교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점은 프랑스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고,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으나 영국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무역이었다. 이런 영국의 입장은 1865년 9월 8일(음) 영국 공사 토마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가 총리아문에 보낸 문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영국 수군의 배가 조선 연안에서 측량하려고 했는데, 거절당하자 영국공사가 공친왕에게 당시 엄중한 국제정세를 설명하면서 조선이 먼저 개방하지 않으면 오히려 조선이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면서 베트남의 예를 들고 있다. 따라서 조선이 스스로 통상을 개방할 수 있도록 중국이 조선에 권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문서는 영국이 프랑스와는 다른 정책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영국 공사는 조선이 여러 나라와 통상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조선을 특정한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하면서 베트남(안남)의 예를 들고 있다. 베트남은 결국 이런 국제관계를 잘하지 못해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조선이 베트남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국과 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으로서는 만일 조선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버리면 더는 조선과 자유롭게 통상을 할 수 없게 되므로 그렇게 되기 전에 통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다 같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있지만, 영국은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가 조선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웨이드는 떠났고, 새로이 올콕(Lutherford Alcock)이 부임했다. 1866년 4월 20일(음), 그는 조선 정부에 중국 북부지방을 거쳐서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고자 하니 이것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 북부 해안은 조약에 의해 측량할 수 있으나 조선 해안의 측량은 중국 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같은 영국의 통상 추구는 1866년 7월 12일(음력) 토마스가 대동강을 향해 가고 있을 때도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 상선 르나호는 강화도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서 조선은 청국으로부터 통상 허가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고, 영국 상선은 허락을 받아 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러므로 조선은 청국의 허락을 받으면 통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영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단지 중국에 있는 외교관에게 제한되지 않았다. 1866년 8월에 영국 외무부는 올콕 공사에게 조선과의 조약 체결이 가능한지 물었다. 바로 이때는 로버트 토마스가 조선에 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이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토마스는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올콕은 얼마 후 조선에서 토마스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조선과의 협상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다시금 올콕에게 조선 국왕과 이 조약을 맺는 일을 추진하라고 전권을 부여했다. 필자는 이런 영국 정부의 행동은 조선을 프랑스가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4. 국제 사회의 변화와 조선의 입장
중국은 이중적인 질서를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만국공법의 질서에 의해서 서양 여러 나라와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과거 자신의 제후 국가에는 이런 만국공법을 적용하지 않고 사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는 여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은 1860년대의 국제 사회의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도 조선은 중화 질서에 빠져 있었다. 즉 여전히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다른 나라들은 오랑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중국과 조선은 어떤 관계인가? 우선 중국은 국제 사회에서 조선을 지켜 줄 능력이 없었으면서도 여전히 조선의 종주국이기 원했다. 중국이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프랑스와 조선에 각각 양극단을 피할 것을 주문하는 정도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국은 영국을 이용해 프랑스를 견제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소위 균세정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선은 우선 제후국은 무외교(無外交)라는 원칙에 따라 쇄국의 원인을 중국에 돌리려고 했다. 즉 통상을 하려면 소위 상국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국이 조선의 통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종 문서를 보면 중국이 오히려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유로 개방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성리학적 질서 고수 원칙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쇄국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문을 여는 순간 서양 종교가 들어와 유교 질서가 무너지고, 이것은 지배 계층의 근간을 파괴할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제후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서양 세력을 막고 있었다.
조선은 대외적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이 6월 13일(음력) 보낸 자문에 조선이 답을 보낸 것은 약 한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병인박해는 프랑스인들이 조선의 법을 무시하고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이 같은 일들은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렇게 쇄국을 하는 것이 조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이 문호를 개방했고, 일본은 이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장 변두리에 있던 일본이 이제 아시아에서 지도적인 국가로 부상하고, 조선은 국제정세에 가장 늦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세상은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 세계에 들어왔는데, 조선이 이것을 부정하고 과거를 고집한다는 것은 결국 자살과 다름없었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