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생명의 법적 기준에 대한 재고
2021-04-24
월드뷰 APRIL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
글/ 전윤성(미국변호사, 자유와 평등을 위한 법정책 연구소)
법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행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허용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 불법인 행위와 적법한 행위를 나눈다. 그러므로 법적 기준은 명확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일관성이 요구된다.
의학의 발달로 태아의 독자생존 가능 시기는 점점 앞으로 당겨지고 있다. 2019년에 헌법재판소는 임신 후 22주부터 태아의 독자생존이 가능하다고 판시했다. 세계보건기구도 주산기 사망률 통계에서 임신 22주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미국 질병관리본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태아 사망(fetal deaths)에 대해 임신 20주 이후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언제부터를 생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기존의 법적 기준에 대한 수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태아에 대한 살인죄의 성립 여부
2019년에 임신 초기 여자 친구의 배를 발로 걷어차서 상해를 입힌 남성에게 법원은 임산부에 대한 상해 혐의만 적용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우리나라에서 형법상 태아는 생명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태아에 대한 상해죄 등을 적용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단이다. 판례는 규칙적인 진통을 동반하면서 태아가 태반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때, 즉 분만이 개시된 때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영양제를 맞으려던 임신 6주 차 임산부에게 실수로 낙태 수술을 한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법원은 살인죄나 낙태죄가 아닌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를 적용했다.
그런데, 민법의 기준은 이와 다르다. 판례는 태아가 모체로부터 전부 노출된 때를 출생 시기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나, 예외적으로 태아는 손해배상의 청구권에 관해서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고(민법 제762조), 상속순위에 관해서도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며(민법 제100조 제3항), 유류분(상속인이 법률상 반드시 취득하도록 보장되어 있는 상속재산의 가액)에 관해서도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민법 제1001조 및 제1118조). 이렇게 태아의 법적 지위에 대한 해석이 형법과 민법이 각각 다르며, 헌법적 판단과도 차이가 있다.
한편, 외국의 경우 태아에 대한 살인죄 성립을 인정한 사례가 있다. 2018년 10월에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태아에 대한 살인죄 성립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9년에 세차장에서 임신 중인 아내에게 총격을 가해 아내와 태아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과 사형 선고를 받은 제시 라이벨 필립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임신 중이었던 브랜디 파커와 함께 살해된 태아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브로디 법(Brody Act)이 첫 번째로 적용된 사건이었다. 2005년에 파커는 임신 8.5개월 때 살해되었는데, 그 당시에 앨라배마주 법에서는 태아의 살해는 살인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2006년에 제정된 이 법은 살인죄 또는 폭행죄의 피해자를 지칭할 때, ‘사람(person)’은 독자적 생존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발육 단계에 있는 자궁 내 태아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고의로 두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을 하나의 행위 또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살해한 경우, 이를 가중 처벌 하는 앨라배마주 형법에 따라, 필립은 두 명의 사람을 살해한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필립에게 사형 평결을 내렸고, 1심 법원은 이에 따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필립은 앨라배마주 고등법원에 항소했는데, 그는 태아가 법적으로 사람이 아니므로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에 대한 살인죄로만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립은 앨라배마주 대법원에 상고했고, 상고심에서의 쟁점은 사람의 정의를 태아로까지 확장한 브로디 법에 근거해 필립을 두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을 살해한 살인죄로 처벌한 것이 적법한지 여부에 대한 것이었다. 상고심에서 그는 두 명을 살해할 고의가 없었고, 단지 한 명을 살해할 고의가 태아에게 이전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피고가 특별히 누군가를 살해할 고의를 가졌다면, 살인이 극형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살인을 둘러싼 사실적 상황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앨라배마주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앨라배마주의 형법에서 태아 생명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생명 가치와 동등하다.”라고 판시하면서, 전원일치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톰 파커 대법관은 별개 의견에서 앨라배마주법에서의 태아의 권리를 강조했다. 그는 상속과 재산 분할에 있어서 태아는 법적인 당사자로 간주되고, 따라서 태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정대리인이 선임된 후에야 판결이 내려진다는 판례를 인용했다. 그는 2013년에 태아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약물을 복용한 임신 중인 여성을 처벌할 주의 권한을 지지하는 판결에서도 유사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는 또한 전국적으로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에 대해 “법적인 변칙이고 논리적인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Roe 판결에서 연방 대법원은 역사적 또는 헌법적 근거 없이 태아의 권리에 대한 예외를 만들었고, 태아의 불가침의 생명권이 여성의 낙태할 ‘권리’와 충돌할 때 각 주가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법원이 만들어 낸 Roe 판결에 따른 예외는 자연법과 각 주의 실정법 및 보통법(common law)에 대한 일탈이다.”라고 하면서, 연방 대법원이 Roe 판결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연방 대법원이 이렇게 갈수록 고립되어 가는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예외를 파기할 것을 요구한다. 앨라배마주와 같은 주들이 계속해서 더 강하고 일관되게 태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보호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Roe 판결에 따른 예외는 미국의 법 구조에서 가장 상반되고 일탈된 법적 그리고 논리적 대척(對蹠)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판결과 같은 맥락에서, 2018년 11월에 앨라배마주는 주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태아의 권리와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이 앨라배마주의 공공정책임을 헌법에 명기했다. 웨스트 버지니아주도 주 헌법을 개정해 낙태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낙태에 대한 자금 지원도 금지함을 명문화했다.
임산부를 폭행 또는 살해해 태아가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었을 때 태아에 대한 살인죄, 상해죄 적용을 부정하는 것은 법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타당하지 않다. 적어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고려한다면, 임신 22주 이후의 태아에 대해서는 살인죄와 상해죄를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22주 이후의 낙태에 대해서는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의 적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낙태 생존아 보호 문제
2020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임신 34주 된 태아를 제왕절개 방식으로 낙태 수술을 시행하고 태아가 살아서 태어나자 살해한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살인죄 등을 적용해 징역 3년 6개월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낙태 시술에 참여했던 간호조무사 등의 진술이 일관되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라고 하는 점을 받아들여 “피고인이 살아있는 상태로 나온 아이를 살해한 사실이 인정된다”라고 판단했다.
2005년 유사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산모의 뱃속에서 태아를 꺼낸 이후의 행위는 낙태가 아니라 살해라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임신 28주밖에 안 된 태아에 대해 유도분만 방식의 낙태 수술을 했으나 태아가 산 채로 나왔다. 그러자, 미리 준비해둔 염화칼륨을 신생아의 가슴에 주입해 숨지게 했다. 대법원은 살인의 고의를 인정해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고, 서울고법은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만약 낙태 수술 과정에서 태아가 살아서 출생한 경우에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아 태아가 사망한 경우에도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가 문제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관련된 선례를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1970년대에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에서는 낙태가 만연하고, 낙태 수술 후 태아가 살아서 나온 경우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낙태 생존아는 긴급의료조치를 받지 않으면 곧 사망할 수밖에 없다. 낙태 시술소에서 낙태 생존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 없는 주가 많다. 2015년에 연방의회에서 처음으로 낙태생존아보호법안(The Born- Alive Abortion Survivors Protection Act)이 발의되었지만, 아직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019년에는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민주당의 필리버스터에 막혀 통과되지 못했고, 올해 1월 45명의 의원이 동참한 가운데 벤 새스(Ben Sasse) 상원 의원이 이 법안을 다시 대표 발의한 상태다. 낙태생존아보호법안은 낙태 생존아에 대해 필요한 의료 조치를 취하지 않은 자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부분 출산 낙태의 금지
부분 출산 낙태(Partial-Birth Abortion)는 태아를 임산부의 신체로부터 일부 추출한 후에 행해지는 낙태 기법이다. 의료계에서는 흔히 확장 추출술(dilation and evacuation)로 불린다. 유도분만을 통해 태아의 두부(頭部)를 먼저 추출하고, 두개골 함몰을 가해 사망케 한 후에, 태아의 나머지 사체를 자궁경관을 통해 추출하는 방법이 있고, 태아의 발부터 목 부위까지를 먼저 추출한 후, 두개골 함몰을 가해 사망케 하고 나서 사체를 추출하는 방법이 있다. 부분 출산 낙태는 태아의 특정 부위 신체 조직을 추출해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다는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95년 이후로 31개 이상의 주에서 부분 출산 낙태를 금지하는 주법을 제정했으나, 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효력이 중지된 경우가 많았다. 2003년에 연방의회는 부분출산낙태금지법(The Partial-Birth Abortion Ban Act)을 제정했고, 이후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연방 대법원은 2007년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연방 대법원은 부분출산낙태금지법이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하는 위헌성이 없고, 여성의 낙태할 권리에 대한 과도한 제한(undue burden)을 가하지도 않는다고 판시했다.
유네스코가 2005년에 채택한 ‘생명윤리와 인권 보편선언’은 전문에서 “도덕적 감수성(moral sensitivity)과 윤리적 반성은 과학기술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생명윤리가 그러한 발전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에 관하여 취해져야 할 선택에 있어 주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면서…”라고 선언하고 있다. 의학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도덕적 감수성은 오히려 점점 약화하고 있고, 특정 영역에서는 도덕적 해이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가 되었다.
태아가 살해된 장소가 모체 안인지, 밖인지 아니면 일부분만 밖으로 나와서 인지에 따라 유, 무죄가 달라지는 것은 법적 기준의 일관성이 크게 결여된 것이다. 생명의 가치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출생한 지 얼마 안 된 미숙아나, 아직 출생하지 않은 태아나 생명은 모두 존엄하고 고귀한 것으로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heavenlyadvocate@gmail.com>
글 | 전윤성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한동대학교 국제법률대학원에서 미국법을 전공했다. 미국 아메리칸대학교 로스쿨에서 국제법으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LG전자 사내변호사, BASF Korea Legal Counsel로 근무했으며, 현재 자유와 평등을 위한 법정책 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