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왜곡(4)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실무 책임자였다
202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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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나아가 대원군은 지역 양반들의 근거지였던 전국 600여 개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당시 서원은 면세 혜택을 누리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본래의 목적과 달리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서원 철폐는 국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에 기여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 유생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고등학교 한국사. 해냄에듀, 91>
이는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관련된 서술이다.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 대원군이 집권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서원 정리를 결심하고 이를 명령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불법·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흥선 대원군이 합법적 통치기구인 양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서원(書院)이나 향현사를 설립한 것은 혹은 도학(道學)이나 절의(節義), 혹은 공훈이 있거나 업적이 있어서 세운 것으로 후세 사람들의 존경과 사모에서 나온 것이다. 법대로 시행하였거나 훈로(勳勞)가 정해졌거나, 부지런히 일하여 변란을 막은 사람에 대해서는 실로 제사를 지내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첩설(疊設)이나 사설(私設)을 금지시키는 제도가 있는 것은 외람되게 함부로 세우는 폐단을 염려해서이다. -중략- 묘당(廟堂:의정부)에서 예조(禮曹)에 있는 문건을 참고하거나 혹은 다시 해도(該道)에 관문을 보내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해서 충분히 상의하고, 이어서 예제(禮制)를 가지고 존속시킬 것인지 훼철할 것인지를 구획하여 정하는 것을 한결같이 법도에 부합시켜서 속히 품정(稟定)하여 시행함으로써 번잡하거나 어지러운 폐단이 없게 하라.” <승정원일기, 1864년 7월 27일>
이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원의 존폐 여부는 흥선 대원군의 명령이 아닌 대왕대비의 전교로 결정되었다. 실상, 서원을 철폐해야 한다는 논의는 고종 때 처음으로 불거진 문제가 아니었다. 인조 때인 1644년 영남 감사 임담의 상소에서 처음 제기된 서원 문제는 효종과 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이나마 서원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가 이어지다가 숙종 때가 되어서야 서원 남설(濫設, 여러 곳에 설치함)에 대한 적극적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영조 때가 되면 서원 건립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이 금지되자 서원 대신 사우(祠宇) 건립이 성행했다. 특히 동일 인물을 제향(祭享, 제사 의식)하는 첩설(疊設, 중복해 설치함)의 경우가 심각해져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은 전국에 44개 소(祠宇 포함)나 되고, 10개 소 이상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서원 남설은 차츰 학덕이 뛰어난 유학자를 배향한다는 본래의 건립 취지에서 벗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나 선정을 한 수령을 배향하는가 하면, 심지어 문중에서 추향(追享) 하는 사례도 빈번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에 영조는 1741년(영조 17)에 19개의 서원을 포함해 모두 173개 소의 서원과 사우를 훼철(毁撤, 헐어버림)했다. 이후 서원 남설은 다소 주춤했으나 대민 착취와 서원의 부패로 인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폐단이 화양서원 묵패(墨牌)다. 묵패는 화양서원에서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문서로 애초에는 서원에서 드는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발행했으나 차츰 서원의 제수(祭需) 비용을 충당한다는 구실로 착취와 토색질에 이용되어 힘없는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일단 묵패를 받고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서원으로 끌려가서 요구된 금품이 마련될 때까지 감금당하거나 사형(私刑)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화양 묵패는 협박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폐단을 인식하고 있던 대왕대비 조 씨는 고종의 즉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즉시 시정 명령을 내렸다. 각 읍에 있는 서원에 대한 실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의정부에서는 예조에 있는 서원 관련 문건을 참고하거나 지방의 보고서를 살펴서 존폐의 기준을 정해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는 것이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서원 철폐가 단행되었음은 이처럼 <승정원일기>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 철폐에 관한 <신편한국사>의 서술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확고해지자 고종 2년 3월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만동묘(萬東廟)의 철폐 명령을 내렸다. 서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배향한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이었으며,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중국 명나라의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만동묘였다. <신편한국사,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1689년 우암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사당을 세워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낼 것을 유언(遺言)하자 1703년 민정중 등에 의해 건립된 후, 1776년 정조가 어필로 사액(賜額)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 심각해졌다. 이에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므로 사적으로 제사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의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의 향사(享祀)를 정지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아! 선정(先正) 송시열은 우리 효종 대왕과 공덕을 같이한 신하이다. 큰 의(義)를 붙잡아 우주에 펼쳤으니 이 나라의 백성들이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된 것이 누구의 공로이겠는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사무친 통한이 가슴에 맺힌다는 말을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에 수제자(首弟子)를 향하여 남겼던 것은 모두 부득이한 고심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것이 만동묘(萬東廟)를 설치하게 된 유래이다. 그런데 숙종과 영조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천자(天子)에게 제후(諸侯)가 조회를 드리는 예절을 참작하고 하늘에 보답하고 해를 주(主)로 삼는다는 원칙도 내세워 묘(廟) 대신에 제단(祭壇: 대보단)을 꾸며놓고 세 황제를 함께 제사 지내니 의리가 극히 정밀하고 예절이 극히 엄숙하였으며 음악과 춤 등 모든 것이 격식대로 다 갖추어졌다. -중략- 만동묘의 제사는 이제부터 정철(停撤)하고 지방위(紙榜位)와 편액(扁額)은 대신과 예조판서를 보내 모셔 오게 해서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에 보관하고 편액은 그대로 경봉각에 걸도록 하라. <승정원일기, 1865년 3월 29일>
이에 따르면 만동묘의 향사 정지도 흥선 대원군의 명이 아닌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해 5월 제주(祭酒) 송래희의 상소에서 ‘삼가 듣건대, 최근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정지하고 편액을 철거하도록 자성(慈聖: 대왕대비)께서 전교하셨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한 언급이나, 윤 5월 행부호군(行副護軍) 임헌회의 상소에서 ‘삼가 듣건대, 자성전하께서 전교로 대보단과 만동묘가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으니 만동묘의 제향(祭享)을 정지하도록 명하시고 어필로 내린 편액을 옮겨 보관하라고 하셨다 합니다.’라는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만동묘가 흥선 대원군이 명령에 따라 철폐되었다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다.
서원 철폐의 절정은 대왕대비 조 씨가 철렴(撤簾: 수렴청정을 거둬들임)을 하고 고종이 친정을 수행하고 있던 시기인 1871년에 있었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하교(下敎)하기를, 연전에 만동묘에 지내던 제사를 그만두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 도학(道學)에 관한 학문이 있고 충성과 절개를 지킨 사람에 대해 서원(書院)을 세워 중첩하여 제향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서원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것은 삼대(三代)의 법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에 대해 사모하는 뜻을 보인 이후 점점 늘어나서 지금은 한 사람을 중첩해서 제향하여 많게는 4, 5, 6개소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향현(鄕賢)이라 해서 서원을 내고, 마침내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선액(宣額)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말하기 어려운 폐단도 이 가운데 있다. 비록 사액(賜額)한 서원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에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된 것은 예조판서가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정(稟定)하여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하라. <고종실록, 1871년 3월 9일>
1865년 만동묘의 제사를 정지하고 이어서 1868년과 1870년에는 사액하지 않은 서원과 사액서원이면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철폐를 단행했다. 그리고 1871년, 전국의 서원을 대상으로 한 사람에 하나의 서원만을 존속하고 나머지 첩설된 서원은 모두 철폐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고종은 서원의 존폐(存廢)를 예조에서 흥선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하여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품정이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아뢰어서 의논하여 결정함’이란 뜻이니, 예조에서 흥선 대원군에게 아뢰어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명에 따라 서원 철폐의 실무를 총괄 지휘한 실무 책임자였다.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1864년, 민폐 문제를 구실로 사원(祠院)에 대한 조사와 존폐 여부를 묘당(廟堂:의정부)에 맡긴 인물도 흥선 대원군이고, 1868년과 1870년의 서원 훼철을 명령한 인물도 흥선 대원군이고, 1871년 47개 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도록 명령한 인물도 흥선 대원군만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고종은 어디에도 없다.
흥선 대원군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다만 국왕의 명에 따라 서원 철폐의 존폐 여부를 결정할 실무를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교과서나 백과사전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흥선 대원군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 지위에 올려놓았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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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