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4) 새로운 가능성: 한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2021-04-19
월드뷰 APRIL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로버트 토마스는 누구인가?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는 누구인가? 그는 영국 웨일스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중, 한때 방황하기도 했으나 회중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회중 교회는 영국 국교회와는 구별되는 청교도의 전통을 가진 개신교의 일파로 일찍부터 해외 선교에 큰 관심이 있었다. 당시 영국에는 국교회인 성공회로 회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토마스는 성공회로 옮기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성서의 복음을 단순하게 전하려는 청교도 정신을 계승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토마스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상적인 목회보다는 해외 선교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신학 공부는 목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외 선교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 과목 공부보다는 해외 선교를 위한 어학 공부에 노력을 더 기울였다. 그는 웨일스 출신으로 웨일스어 외에 영어를 잘 구사하고 있었기에 어학에 상당한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어학 공부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된 중요한 이유는 해외 선교를 하려면 토착어를 사용해 그 지역의 문화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토착어를 통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천주교와 다른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토마스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지역은 중국이었다. 당시 많은 영국인이 중국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미 영국 교회는 상당수의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했다. 토마스는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흥미를 느껴 이후 높은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토마스는 전형적인 개신교 성직자로서 기독교 복음의 우월성을 믿었다. 그는 비록 중국 문화가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이교 문화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인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신앙적인 확신과 더불어 토마스는 당시 영국인이 가졌던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확신했다. 이미 서양은 민주주의와 자유무역, 그리고 산업화로 물질문명에 있어서 아시아를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선교사 대부분에게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은 선교의 근본적인 모티브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국가의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는 국가의 힘을 통한 선교를 지향하며 가톨릭 국가가 세워지는 곳에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신교는 개인의 인격적인 결단이 신앙의 필수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인격적인 결단 없이 강요된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특히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토마스는 선교는 국가의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성실한 ‘지적인 설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조선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군사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7세기 말, 영국에서 관용령이 등장하면서 개신교에 신앙은 근본적으로 개인에게 속하는 문제이며 이것을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의 본질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개발했을 뿐만이 아니라 교육, 봉사, 구제와 같이 개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선교 방법을 시도했다. 이런 개신교의 선교는 이전의 천주교 선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는 이런 근대적인 생각을 지닌 개신교 선교사였다.
2. 로버트 토마스의 1865년 가을 제1차 조선 방문
토마스는 회중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결혼한 다음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63년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는 중국에 도착한 다음 해 3월, 유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토마스는 당시 먼저 와서 일하고 있던 선배 선교사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선교사를 사임하고 산둥성의 지푸(芝孚) 주재 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해 1865년 8월 말까지 근무했다. 여기에서 중국어만이 아니라 러시아어, 몽골어까지 배우면서 그의 국제적인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지푸에서 세관의 통역으로 일하는 동안,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중국 책임자였던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을 만났다. 당시 지푸에는 조선에서 피란 온 천주교인이 많이 있었는데, 윌리엄슨은 이들을 통해서 조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윌리엄슨은 토마스에게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말했고, 토마스는 윌리엄슨의 권유로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였다. 윌리엄슨은 토마스에게 당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조선에 배포하는 임무를 부탁했다. 토마스는 세관의 통역을 사직하고, 영국 영사관으로부터 여행을 위한 여권을 발급받은 후, 1885년 9월 4일 조선을 향해서 떠났다. 그는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첫 번째 선교사였다.
토마스는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다니면서 그 지역의 천주교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때 그곳에서 토마스는 천주교인들이 종교의식은 알고 있었지만, 복음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개신교 선교의 필요성을 더욱 확신했다. 토마스는 그 지역의 조선인들이 외국인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토마스가 조선의 말을 배우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토마스가 전해 주는 기독교 서적을 받았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롭지만, 조선인들은 이것을 각오하고 토마스에게서 책을 받았다. 이런 일을 통해서 토마스는 조선 선교는 조선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토마스는 조선인에게 자신은 천주교인이 아니고 개신교인이며, 프랑스인이 아니고 영국인임을 알렸다. 그는 자신을 조사하는 문정관에게 자신이 영국인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당시 조선은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고, 영국은 조선과 무역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도 영국의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남종삼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은 대원군에게 러시아를 막기 위해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건의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은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하나였다.
그때 토마스는 서울까지 가려고 했지만, 폭풍우 때문에 가지 못하고 구사일생으로 12월 초 만주 해안을 통해 육로로 북경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북경에 가는 길에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전도했다.
3. 조선 동지사와의 만남: 1866년 초 북경
토마스가 런던선교회에 사직서를 냈지만, 이것이 처리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토마스는 자신이 선교사직을 사직한 것이 경솔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에서 런던선교회는 토마스의 사직서를 반려하고, 그에게 북경에서 새롭게 선교할 기회를 주었다. 북경에 도착한 토마스는 북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토마스는 북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북경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외교 공관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북경은 제후국들이 조공을 바치러 수시로 방문하는 소위 국제도시였기 때문이었다. 토마스는 이곳에서 앞으로의 선교를 계획했다.
당시 북경에는 서양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는 총리아문이 있었는데, 그 책임자는 중국의 실권자이며 온건 개혁론자인 공친왕이었다. 총리아문의 부속으로 중서학원(Anglo- Chinese School)이 있었는데 이 학교는 주로 외교관의 자제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의 책임자는 미국인 선교사 마틴(David Martin)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토마스에게 넘겨주고자 했다. 특히 러시아 공사가 이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런던선교회 북경 책임자였던 에드킨스(J. Edkins)도 이에 찬성했으나, 마틴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 학교를 영국인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을 통해서 토마스가 당시 극동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 중국 정부와도 관계를 맺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본다. 나중에 토마스는 자신이 공친왕과도 친분이 있다고 증언했다.
토마스에게는 북경에서 매우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북경에 온 조선인 동지사(冬至使)들과의 만남이다. 토마스는 북경에 있는 어떤 외국인들보다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다고 자랑했다. 이미 지난해 가을, 조선에 가서 선교의 가능성을 찾아보았던 토마스는 북경에서 만난 동지사를 통해서 조선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동지사는 조선에 천주교가 상당히 크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토마스에게 알려 주었다. 조선에는 12명의 천주교 신부가 있었고 수만 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런 조선 상황에서 토마스가 염려한 것은 정교회의 등장이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지난해 가을에 전달한 서적이 평양까지 전해졌다는 것과 사람들이 기독교 서적을 찾는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이 기독교의 진리에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토마스는 조선에서는 한문이 널리 통용되기 때문에 중국어로 번역된 서적들이 조선에서 귀하게 사용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어의 유용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선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마스가 보기에 조선 선교의 가장 큰 장점은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린 종교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북경에서 동지사들을 만나 깨달은 것은 이제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부흥하고 있고 러시아 정교회도 조선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면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를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마스도, 북경에 있던 동지사들도 1866년 초 조선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 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