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자산 탕진 속에 외교 대통령을 기대하며
2021-04-15
월드뷰 APRIL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1 |
글/ 최원목(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음은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한일관계 해법(?)이다.
“한국 정부는 한·일 위안부합의가 양국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토대 위에서 이번 판결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도 동의할 수 있는, 그런 해법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한일 간에 협의해 나가겠다. 강제징용 문제는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원고들이 동의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게 우선이다.”
즉, 기존의 한·일 위안부합의도 유효한 합의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동의도 중요하고, 이미 결정된 강제집행 조치는 강행해서는 안 되고,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동의도 중요하다고 하면서 외교적 해법을 찾으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법이라는 게, 결국은 일본 측이 또다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이 만족할만한 배상을 민간차원에서 충분히 지급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방식을 일본 측이 수용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해졌다. 왜냐하면,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회견으로 한국 법원의 강제집행에는 어쨌든 제동이 걸렸기 때문에, 일본 측이 기존 입장을 번복할 필요성이 더더욱 없어졌다.
얕보인 대한민국의 외교 수준
현 정부 들어서서 하루가 멀다고 일본 때리기를 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지금에서야 한·일 위안부합의가 유효하니 강제집행 조치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한·일 관계와 그에 연동된 대미 관계가 지금까지 파국으로 치달았는데 인제 와서야 불가능한 해법을 내며 피해자들의 동의까지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자신은 그동안 일본 때리기로 국내정치에서 얻을 것을 다 얻었으니, 일본기업에 대한 강제집행(현금화 조치) 카드를 버린다는 백기 선언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갈등 증폭의 책임은 강제집행 책임자와 피해자 측에 돌리겠다는 말인가?
책임회피와 무능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최고위 공직자가 자신의 신념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해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면서 결국 백기 선언도 돌려서 말하고 있다.
일본 측에서 볼 때, 한국 내 일본기업자산 강제집행으로 현금화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조치가 국내정치용 ‘블러핑’에 불과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니,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외교 수준을 얕보게 생겼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결국 제풀에 꺾이는 외교와 정치 수준이니, 수세대 동안 쌓아 올린 한국외교의 자산은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외교 수준이 “극일”이 아닌 “반일”의 수준에 머물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 때리기의 핵심에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금 인용 판결(2018년 10월)이 자리 잡고 있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의 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고 최종 판결했고(10명 지지, 2명 반대), 문재인 정부는 일본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을 사실상 독려해왔다. 아마도 그동안 과반수의 국민이 이 판결의 내용과 문 정부의 대일 압박외교에 박수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속은 시원하기에.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한국외교 난맥상의 커다란 원인이 바로 이 판결과 이를 강제집행하려는 청와대의 기획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사법부의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강제집행을 그대로 추진하겠다는 게 문재인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총리가 방한을 거부해서 한·중·일 정상회담도 개최하지 못했다.
삼권분립 원칙은 국내에서나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대외관계에 있어 입법부·행정부·사법부를 아우르는 국가의 대표자는 대통령인데, 사법부가 판결한 사항이라 국가의 대표자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도대체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논리인가? 그럼 국가의 대표가 분야별로 3명(입법-국회의장, 사법-대법원장, 행정-대통령)이 있다는 말인가?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했는지는 국제재판의 단골 메뉴다. 대통령이 취한 행정조치도 국제재판에서 국제법 합치성을 심사받는데, 대법원이 내린 국내 판결이 국제재판의 대상이 됨은 당연하지 않은가. 대법원판결의 국제법 위반 여부에 대한 최종책임은 국가의 대표자인 대통령이 지는 것이고, 대통령이 국제법을 위반한 국내 판결을 바로잡거나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미국 대법원 최종판결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국제법 위반판정을 받아, 미국 행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배상 및 사과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한 후, 국내적으로 국제법 위반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침을 하달하는 등의 조처를 한 예가 있다. 이러한 사항은 국제법상의 국가책임(state responsibility) 개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상식화된 것이다.
대통령의 자격
현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는커녕, 일본과 갈등을 확대해왔다. 그것이 반일 감정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고 반대자를 친일파로 몰아 적폐 몰이를 하기 위한 프레임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반미노선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대놓고 반미노선을 걸을 수는 없으니,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더욱 친밀해지고 있는 일본을 때려댐으로써 반미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반미-반일을 동시에 이뤄 NL(민족해방)로 가는 주요 수단이 일본 때리기인 셈이다.
그 핵심 고리가 되는 판결을 대법원의 다수의견이 제공했다는 것은 사법부 독립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판결이 대한민국의 외교를 국민도 못 느끼는 사이에 NL 노선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 단초인 셈이니, 일반 국민도 이 중요한 판결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왜 이 판결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조약의 해석원칙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까지 내려진 것인지를 국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침묵으로 죽는 게 아니고 대중의 요란한 박수 소리로 죽는다. 먼저 정확히 알고, 그래도 반일을 위해 손뼉 치려거든 처라.
대한민국에서는 문재인 이념 노선의 폐해를 적어도 외교 분야에서 정리해줄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나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실용외교의 대가가 필요하다. 중국 사회주의가 그나마 100년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실용외교와 평화공존의 대원칙을 수립한 저우언라이 외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 노선이 외교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막아줄 사람, 미·중 탈동조화[decoupling, 탈(脫)동조화]의 광풍 속에서도 한·미 디커플링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해줄 사람, 가치동맹과 경제협력 파트너는 서로 다른 차원이고, 경제협력이 가치동맹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확립해줄 외교의 대가 말이다. 차기 대통령은 본인이 실현할 능력은 없더라도 이런 원칙을 존중하고 방해하지 않을 사람이 반드시 선출돼야 한다.
<wmchoi@ewha.ac.kr>
글 | 최원목
외교통상부에서 외교 및 국제법 전문가로 근무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교수(조지타운대 통상법 박사)로 재직 중이다. Korea Journal of International and Comparative Law 편집장, 한국국제경제법학회장, Journal of International Economic Law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