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슬픔 그 너머

커다란 슬픔 그 너머

2021-03-25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작가)


그날 우리 여고 동창 서너 명은 동창회관에 앉아 우편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지난 연말에 발송한 회보가 수십 통 반송되어 기수별로 분류하며 주소록 업데이트를 위한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90세가 넘으신 선배는 어쩌면 돌아가셔서 우편물이 반송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레 우리 동기 중 먼저 세상을 뜬 친구들 이야기로 옮겨졌다. 누군 언제 왜 죽었고, 누군 또 언제 왜 죽었는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야기하다가 대화의 대상이 여고 1학년 때 죽은 친구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혜경아! 너에게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너 그때 왜 그랬어?”

“…?”

“왜 걔 무덤에 그렇게 찾아갔었어?”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학교에 소문이 쫙 났었지. 너 맨날 거기 가서 누워 있고 그런다고.”

그랬다. 매일은 아니고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마다 그 친구의 무덤에 갔었다.

여고 1학년 때 죽은 그 친구는 중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 친구가 워낙 노래를 잘해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면 매번 마이크를 잡고 구성지게 노래를 했기에 우리는 모두 그 친구를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그 친구가 결석이 길어지고 병원에 입원하자 담임선생님께서 반 대표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하러 가셨다. 누워 있는 친구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고, 친구의 엄마는 우리를 보고 자꾸 눈물을 훔치셨다. 문병 다녀온 며칠 후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많은 친구가 장례식장에 갔다. 친구의 엄마는 우리를 보자 하염없이 우셨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셨다. 발인하는 날 영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반대표들은 장지까지 동행했다. 40여 년 전엔 화장이 흔치 않아 친구는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처음엔 죽은 친구와 절친이었던 한 친구가 내게 같이 가보자고 청해서 함께 무덤에 찾아갔었다. 꽃을 한 다발 사 들고 갔다. 놀랍게도 그곳에 죽은 친구의 엄마가 계셨다. 친구의 엄마는 우릴 보자 죽은 딸이 살아온 것처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시며 또 계속 눈물을 닦으셨다. 매일 아침 그곳에 와 계시다가 해 떨어지면 집에 가신다는 것이었다. 함께 간 친구는 그 엄마와 서로 가족들 안부를 주고받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두 번쯤 그 친구와 함께 갔던 것 같다. 토요일이 되어도 함께 가자는 말이 없는 친구에게 이번엔 내가 묻자 다른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우릴 기다리고 계실 죽은 친구의 엄마가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가서 친구의 엄마에게 잠깐 인사라도 하고 오자 하는 마음으로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그곳에 갔다. 친구의 엄마는 딸의 무덤가를 돌면서 그간 뜯은 쑥으로 쑥떡을 해오셨다며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딸과 친했던 친구가 오지 못한 것을 순간 허전해하시는 표정이 보였다. 조금 앉아 있다가 내가 먼저 산에서 내려오며 ‘다음엔 저도 못 와요.’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해 계속 가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토요일마다 그 엄마를 뵈어도 서로 할 말은 별로 없었다. 그 엄마는 산을 오르내리며 쑥을 뜯고,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딸의 무덤에 꽂아 주었고, 나는 친구의 무덤 옆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시를 읽거나 소설을 읽었다. 큰 산 전체가 크고 작은 무덤으로 가득 찬 묘지들 가운데 앉아 있자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문은 인간은 왜 죽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내 기억에 가장 가까이서 본 죽음은 기차에 치여 죽은 거지의 죽음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고 외할머니와 함께 어딘가 다녀오던 길이었다. 기찻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는데, 더 저만치에 뭔가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할머니는 치마로 내 얼굴을 감싸시며 그 현장을 못 보게 하셨지만 가마니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양말 신은 발을 나는 이미 보고 말았다. 술 먹고 기찻길에서 자다가 그리되었다고 했다. 내가 본 것은 보통 때 쌀을 담는 누런 가마니와 신발이 벗겨진 발 한쪽이었지만 그 장면은 오래도록 내게 무서움의 상징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 가마니에 덮인 주검의 공포로 자리 잡은 죽음은 날마다 딸의 무덤가를 헤매는 엄마의 슬픔과 눈물에 범벅되어 당시 내 앞에 늪처럼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늪 앞에 망연자실 서 있었고, 허무주의가 내 발목을 휘감아 늪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그 특별한 외출은 초여름 조회시간에 내가 운동장에서 쓰러지는 일이 벌어져 끝났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몸이 점점 약해지는 원인을 집에서 알게 된 것이다. 한약을 지어오시고, 종합영양제를 구해 먹이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준비하며 어른들은 노심초사 애를 끓이셨다. 그러나 이내 음식을 통한 섭생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한 날 이모부의 호출을 받았다. 이모부는 지역의 명사로 존경받으며 박학다식하셔서 집안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인정받는 분이셨다. 이모부는 내게 그간의 일을 간단히 물으셨다. 그리곤 인간의 일생에서 내가 지금 어느 시기에 서 있는지 짚어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인 ‘나’는 모든 사물과 인식을 새롭게 조명하고 판단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으며, 그러할 때 같은 반 친구의 이른 죽음은 당연히 충격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친하지 않았어도 한두 번 찾아가다 친구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토요일마다 그곳에 찾아간 ‘나’는 이모부가 평소에 알고 있던 ‘나’의 모습이라면 당연하다고, 그리고 그 공동묘지에 앉아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라고,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다 인정해주셨다. 그리고 곧이어 성경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계보를 종이에 그려주시며 해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원죄에 대해서, 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구속사에 대해서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해주셨다. 장시간에 걸친 이모부의 말씀은 그간의 나의 갈증과 답답함을 해갈시켜 주었다. 조금 지나치다고 판단될 법한 나의 일탈에 대하여 이모부는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나만이 가지는 특별함으로 인정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계속 가면 그 엄마도 나를 기다리기 위해 계속 가 계실 수 있으므로 이제 그만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나의 동의를 구함으로 마침내 그 일에 종지부를 찍게 해주셨다. 과연 이모부는 혜안을 가지신 분이셨다.

나는 장년이 되어 많은 사람과 교제하며 다양한 고민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고등학교 시절 함께 해주셨던 이모부의 그 따뜻하고 지혜로웠던 상담의 방식을 늘 떠올렸다. 충분히 들어주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고, 의문에 답을 찾아주고, 문제의 매듭을 짓는.

죽음이 내게 다른 공포로 다가온 것은 뉴욕에서 한 장례식에 참석한 후였다. 장례식장에 간 것은 고등학교 때 그 친구 장례식장 참석 이후 처음이었다. 퓨너럴 홈(Funeral Home)에서 진행된 장례예배 후, 뷰잉(Viewing) 순서가 있었다. 문상객이 관 속의 시신을 잠깐 보고 지나는 것이다. 뉴욕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나는 천여 명의 교인을 거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관 속에 누워계신 장로님도 생전에 뵌 적이 없었다. 교역자 신분으로 참석한 나도 앞사람을 따라 걷다가 고인 앞에 3초쯤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자는 듯 평온하신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어린 딸을 먼저 재우고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관 속에 누워계신 호흡 떠난 장로님의 얼굴과 뷰잉할 때 관 옆에 서서 하염없이 울던 유족들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포와 슬픔이 뒤섞여 밤새 나를 괴롭혔다. 50대 후반인 장로님은 전 주일까지 밴을 몰고 성도들을 픽업하는 봉사를 하셨다는데, 몸이 좀 피곤해서 병원에 가보니 간암 말기로, 며칠 안 돼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별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유족의 충격과 애끊는 슬픔이 내게도 고스란히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죽는 꿈을 꾸고 꺽꺽 울면서 잠에서 깨곤 했던 일이.

장례는 자주 있었지만, 장례예배의 뷰잉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았다.

죽음이 내게 현실이 된 것은 할아버지의 소천이었다. 내가 긴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해 겨울이었다. 귀국하고 온 가족이 인사드리러 갔을 때 할아버지는 셋이 나가 다섯이 되어왔구나, 라고 기뻐하시며 그간 두어 번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너를 보지 않고는 죽을 수 없어 버텼노라고 말씀하셨다. 90세가 되신 할아버지는 골다공증의 통증으로 고생하시며 많이 연약해져 계셨다. 겨울 방학에 아이들과 와서 며칠 놀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는데, 12월 초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갈하신 성품대로 할아버지는 혼자서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신 후 나오셔서 주저앉으셨다고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셨다. 나는 안타까움에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할아버지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런데 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천천히 뛰면서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타본 적이 없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떠올랐다. 광활한 눈벌판을 달려온, 긴 여정의 종착역에 들어서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기차. 아! 어떡해! 할아버지가 가시는 것 같아! 라고 나는 뒤에 서 계시는 가족들을 향해 탄식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후 삼촌은 할아버지의 허리 밑에 손을 넣어보시더니 손이 들어가지 않자 “운명하셨네.”라고 말씀하시며 흐느끼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삼 일 내내 울었다. 할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음을 확실히 알고 믿고 있는 것이 울음을 멈추게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이제 다시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이 그저 슬펐다. 너무 울어서였을까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턱이 벌어지지 않았다. 양치질을 할 수 있을 만큼도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엑스레이 필름엔 표정 없는 거대한 해골이 찍혀 있었다. 뼈엔 이상이 없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근육의 이상 때문이라는 의사의 말은 건성으로 들리고 처음으로 본 섬뜩한 나의 해골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온갖 희로애락의 표정 한 겹만 걷어내면 무표정의 주검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첫 소설집을 읽은 지인이 말했다. 모든 소설에 죽음이 있다고. 다시 보니 정말 나의 모든 소설에 죽음이 묘사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글 속에서 죽음에 천착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쩌면 여고 시절 어린 딸의 죽음과 그 어미의 설움을 목격하면서 입은 심리적 외상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죽음’의 문제는 내게 힘들다. 평소 소원대로 주무시다 평안하게 가신 할머니를 보내드릴 때도, 느닷없이 가버린 아빠, 긴 투병, 깊은 외로움 속에 떠난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나는 많이 울었다. 믿음 없는 자처럼, 천국의 소망이 없는 자처럼 대책 없이 울었다. 헤어짐은 그 자체로 커다란 슬픔이다.

이제 어느덧 나도 헤어짐의 슬픔을 견뎌야 하는 시간보다 헤어진 분들을 다시 뵐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이 짧아진 나이가 되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이별의 커다란 슬픔 그 너머에 있는 영생의 소망을 품게 해주신 주님께 새삼 감사드린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