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이승만의 반공(反共)
2021-03-11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
글/ 양준석(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교수)
많은 한국인이 이승만(李承晩)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이승만은 처음부터 ‘냉혹한 반공 투사’였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공산주의는 콜레라 질환과 비슷한 것이다”라고 한 이승만의 언급이 반복되어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견지했던 공산주의 그리고 반공인식은 몇몇 그의 언급과 반공 투사 이미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이승만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소련 공산주의와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동유럽부터 시작되는 공산 진영의 급속한 확대와 같은 냉전 양상을 먼저 포착하며 공산주의와의 협력에서 강한 반공으로 변화하는 인식을 나타냈다.
대한제국 시기 이승만은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핀란드처럼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러시아의 잔학함과 참혹함은 “하늘의 해도 빛을 잃을 지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경계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러한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공로(恐露) 인식을 볼셰비키 혁명을 거친 러시아에 반대하는 태도로 쉽게 나타내지 않고, 국제정세와 독립을 향한 방향을 염두에 두며 시간을 가졌다. 이승만은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공산주의의 합당한 부분과 부당한 부분을 나열하며, 공산주의에 관한 판단 보다 민족의 독립이 시급한 문제임을 지적한다. 1921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이승만은 대표단을 소련 정부에 파견했고,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한 다음 7월 소련에 입국 직후 강제추방을 당했으나, 오히려 소련 정부에 감사를 전달했다. 또한, 이승만의 소련 입국을 도와준 중국인들에게 강제추방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도 그의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이 공산주의와 소련에 보였던 행동은 공로(恐露)와 반공보다 해방과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와도 협력의 길을 모색하는 형태로서의 방략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변화는 냉전의 도래에서부터 출발했다. 1947년 3월 미국은 공산주의 때문에 위기에 빠진 그리스와 터키를 지원하는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고, 1948년부터 마셜 플랜(Marshall Plan) 참가를 포기한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되며 냉전은 본격화되었다. 이승만은 냉전으로 치닫는 국제적 변화를 ‘조숙’한 입장으로 정리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미 이승만은 1945년 12월 23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글을 통해 “우리는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폴란드 극렬분자는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폴란드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공산주의의 파괴적 위험성이 세계적으로 폭증하는 상황, 박헌영과의 국내에서의 주도권 경쟁을 위한 대립 속에서도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극렬파를 구분하여 위협상황의 원인 규명을 시도하는 이승만의 신중함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5년 10월 귀국 초기 “공산주의든지 민주주의든지 서로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 악수”할 시기라며, 공산주의와의 협력도 가능하다고 보던 인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 인식은 냉전의 국제적 양상이 한반도에 그대로 투영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거치며 더욱 켜졌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은 1941년 대서양헌장의 기본 원칙인 개인의 정치적 자유에 기초한 협상 방식을 추구했지만,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의 평등에 기초한 통제적 협상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에 양측 모두 ‘민주주의’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접점은 마련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적 협상 방식을 강요하는 소련과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승만의 실망은 반공 의지뿐 아니라 한반도 이남에서만이라도 안전지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태도를 강화시켰다. 트루먼독트린 직후 이승만은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연합과 협력을 추구하는 미 군정의 노력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38선 이남에 “과도적 독립 정부를 즉각 수립하는 것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남북한의 통일을 실현하게 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9월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성과를 얻지 못했고, 미 국무부의 Korea 문제 유엔 이관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남북한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미 국무부의 최종 확인이었다. 이것은 통일을 위한 한반도 이남에서의 정부 수립 정책 방향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승만은 강해진 반공 인식에 기초해 공산주의와 대립하며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유엔에 의해 정부 승인을 받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48년은 2.7총파업, 제주4.3사건, 국군14연대반란사건 등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유혈사태가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휩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선거운동”이 진행된 5.10 총선거와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을 기초로 국가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승만은 신생 국가를 국제무대에 올리기 위해 냉전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던 파리의 제3차 유엔총회에 장면(張勉)을 비롯한 한국대표단을 파견했다. 당시 한국대표단 구성원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서구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매개로 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대한민국 정부승인을 이끌어 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38선 이남 지역에 한정된 의미가 아닌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박헌영, 홍명희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파견해 유엔 정치위원회 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 정치위원회는 북한대표단을 유엔의 감독하에 한국인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단으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프랑스 입국을 거절했다. 유엔에 의해 대한민국은 합법 정부로 승인받은 것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성은 부정된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열전으로 휘말려가던 시기, 이승만의 반공 의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마침내 중국의 공산화가 완성되고 있던 시점인 1949년 9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AP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파괴 및 게릴라전으로 신생 대한민국을 좌절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공작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38선 이남의 사태는 절대적으로 확보되었으나,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자들이 한 사람을 더 살해하고 일 부락을 더 방화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도록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가져야 한다.”라고 하며, 이미 8월에 장면 대사를 통해 무기 원조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음을 밝혔다. 또한 “우리는 적당한 무기만 충분히 공급받는다면 소련 지도자들이 손아귀에 전 세계를 넣으려는 생각을 포기할 때까지 우리의 영토를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국에 군사원조를 절실하게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활동은 미국에 대한 원조의 기대와 구호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1949년 3월 미국 주도의 소련에 대한 군사봉쇄의 일환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발표되었으나, 미국은 아시아의 반공 군사동맹에는 회의적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1949년 5월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강조하며, 미국에 대해 1) 나토와 유사한 태평양 동맹의 형성, 2) 상호방위를 위한 미국과 한국 혹은 다른 나라와의 협정체결, 3) 공산주의 침략에 대해 한국을 방위하겠다는 트루먼 대통령이 의준한 선서, 이렇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요청에도 미국이 태평양지역에 대한 반공 동맹에 부정적 태도를 나타내자, 1949년 8월 이승만은 진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함께 태평양동맹 결성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모택동에 의한 중국 공산화가 완성되는 시점에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면서도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자립적 반공체제 구축을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신임을 받던 외무부 장관 임병직(林炳稷)은 “공산주의자의 침략은 아세아에서 개시되었으므로 의례 극동의 국가들은 강력하고 견고하며 협조적인 bloc으로 결속”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 수상이 아시아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동맹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대해 아시아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더욱 안전보장조약이 필요하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냉전의 탄생과 구조에 대한 지도자의 명확한 인식, 정당성과 정통성에 기초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로의 국제적 등장, 이승만의 강한 반공인식에 기반을 둔 태평양동맹 구축 시도의 경험이 있었기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의 조건이 완비되었고, 1950년 6월 포화 속으로 들어간 한국은 생존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승만의 반공이 무조건적인 고정형태가 아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는 1945년 10월 연설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대로, 조선공산당,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했던 조봉암(曺奉岩)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여 농지개혁법안을 주도했다. 이는 당시 이승만이 견지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일관적 측면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맹목적 반공주의자라는 세간의 인식과도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없었다면, 즉 변화하는 냉전의 국제정치적 배경을 이해하고, 강한 반공인식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면, 냉전기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역사를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릴 필요도 없지만, 짐작이 가능한 사례를 1900년대 초 중동부 유럽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구가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만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인 마사릭(Tomáš Masaryk)의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편한 인식은 유사했다. 마사릭은 러시아혁명 시기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대안이자 지향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마사릭의 민주주의 유산을 공유하고, 이어받은 베네쉬(Edvard Beneš)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자들에게 ‘투항’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순수를 가장한 기만’-‘거짓’-‘독재의 완성’ 단계로 진행되는 공산화를 맞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48년부터 1989년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까지 전체주의에 의해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활동이 짓밟히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해방 이전 반공 의지를 표출하지 않던 이승만은 해방 후 ‘극렬파 공산주의자’들과 타협과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반공 의지와 정책으로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과 생존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틀을 만들며, 세계라는 무대에 대한민국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chirira@hanmail.net>
글 | 양준석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집위원(2021), 한국정치학회 이사(2021), 국제정치학회 연구위원(2018)이다. 최근 저서로는 <한미관계와 기독교>(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