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왜곡의 시작 ‘흥선 대원군’(2): 조정 대신의 인사권은 국왕에게 있다
2021-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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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우리나라 근현대사 왜곡은 ‘개혁정치’의 상징인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시작한다. 흥선 대원군은 일국을 경영할 어떠한 지위나 직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이에 본 칼럼에서는 근현대사 왜곡의 시작 ‘흥선 대원군’을 다음과 같은 목차로 연재하고자 한다.
1.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공사 감독이었다.
2. 조정 대신의 인사권은 국왕에게 있다.
3. 흥선 대원군은 국가 법전을 편찬할 수 없다.
4.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실무 책임자였다.
5. 척화비, 국왕인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
6. 흥선 대원군, 어느 자리에서 해야(下野) 했나?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회의 석상에서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 리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하였다. … 천 리 지척으로 삼겠다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태산 평지라 함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 함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말이다. -황현, <매천야록(금성출판사, 175)>
대부분 교과서에 사료로 인용된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일부 내용이다. 이 책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야사(野史)이나 고종 초 10년간의 역사 서술에 중요한 비중으로 취급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흥선 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인재 등용 정책을 천명(闡明)한 언급으로 곧잘 인용된다. 이러한 야사에 근거를 둔 교과서의 서술은 아래와 같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흥선 대원군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종실을 관장하던 종친부를 권력 기구로 만들고 종친을 우대하였으며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였다. 무신도 적극적으로 포섭하였다. (동아출판사, 80)
흥선 대원군은 세도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하여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중략- 정하지만 흥선 대원군은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유력 가문과 협력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해냄에듀, 90)
교과서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흥선 대원군이 안동 김씨 일족을 몰아내고 나서 당파·지역·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고루 등용했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세도 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를 몰아낸 자리에 당파뿐만 아니라 지역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재 등용은 민주주의 국가인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먼저 흥선 대원군은 인재 즉,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삼정승(三政丞) 이하 고위 관료를 임명하는 일은 공식적 통치 기구인 국왕 고유의 업무이지, 국왕의 사친(私親)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관료를 임명하면 ‘施命之寶(시명지보)’라는 어보(御寶)가 찍힌 교지(敎旨)를 내리게 되는데, 그 어보의 주체는 국왕이지 흥선 대원군이 아니다. 만약 흥선 대원군이 직접 인재를 등용했다면 임명장에 흥선 대원군이 인사권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어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어보가 있을 리 없다. 흥선 대원군은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흥선 대원군이 국왕을 등에 업고 실권을 행사하며 자기 사람을 심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법·부당한 권력 행사에 의한 인사 관여이지 인재 등용이라 할 수 없다. 지금 같으면 중대 범죄 행위에 해당된다.
흥선대원군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은 역사 왜곡이다
흥선 대원군이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지 여부(與否)를 떠나 고종 즉위 후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다양한 세력을 등용했다는 교과서의 서술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편한국사>37권 「대원군의 내정 개혁」에는 대원군의 인재 등용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먼저, 안동 김씨를 몰아냈다는 부분과 관련한 서술에서는 ‘대원군 집정기에 안동 김씨 세력이 고위 관료층 내에서 점하는 비중은 그 이전에 비교하면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강력한 지배집단의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었다.’라고 서술하는가 하면,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포함한 기존 세력을 제거하기는커녕 이들과 연합하여 왕조체제를 재건하려 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당파·지역·신분을 넘어서 다양한 인재를 등용했다는 부분과 관련해서도 ‘대원군의 인사정책이 비록 세도 정치 시기에 볼 수 없었던 몇몇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현상일 뿐으로 본질적으로는 종래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대원군 집정기의 인사정책의 본질은 외척 벌열의 세도 정치 시기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니, 흥선 대원군이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것, 안동 김씨를 몰아냈다는 것, 당파·지역·신분을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것 등 어느 것 하나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이전에 있었던 세도 정치가 고종 때 들어와 세도의 중심이 외척인 안동 김씨에서 왕의 사친으로 옮겨진 것에 불과하다.
2020년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고등학교 교과서의 서술도 중구난방이다.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고 무신도 적극적으로 포섭하였다(동아출판)’라고 하여, 이미 인재 등용의 성과를 이룬 것으로 서술하는가 하면, ‘외척 세도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하고, 능력에 따라 다양한 정치 세력을 등용하려 하였다(씨마스)’라고 하여 결과가 아닌 미래형으로 서술한 경우도 있다. 반면 ‘흥선 대원군은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유력 가문과 협력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해냄에듀)’라고 하여 여타 교과서와는 약간 결이 다르게 서술하며, 인재 등용의 성과를 인정하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한 것으로 묘사했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흥선 대원군은 인재를 등용할 자격이나 지위에 있지 않았는데도 마치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해 가르치고 있는 흥선 대원군에 관한 서술이 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우리 교과서는 불법·부당한 권력 남용(濫用)을 마치 정당하고 합법적인 통치행위인 양 서술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