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의 원칙
2021-02-05
월드뷰 FEBR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
글/ 박기성(성신여자대학교 교수)
‘받아들이거나 떠나거나(take it or leave it)’
십계명의 하나인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는 소유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는 ‘소유가 없는 곳에는 정의도 없다’라고 설파한다. 사람들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거래하면서 서로 이익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시장경제이다. 시장경제를 추동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의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떠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티셔츠를 고를 때 품질에 비해 가격이 괜찮으면 사는 것이고(take it) 아니면 당연히 안 산다(or leave it).
다른 상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 상품을 팔려면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높여야 한다. 다른 상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거나 품질이 좋으면 상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가격을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장 경쟁이라는 압력에 의해 소비자는 같은 품질의 상품을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가격에 살 수 있고, 상점은 잘 팔리는 상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소비자들이 가격을 낮추라고 시위를 하거나 상점을 점거・농성할 수 없고, 상점들이 연합하여 가격을 높이라고 데모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을 제공하는 근로자에게는, 노동의 가격인 임금과 근로 조건의 향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해서(단결권), 단체로 협상하고(단체교섭권), 협상이 잘 안 되면 파업 등의 노동쟁의를 통해 사용자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단체행동권). 반면에, 미용실 원장이 서비스에 비해 미용료가 낮다고 시위를 하거나 동네 의원 원장이 서비스에 비해 의료비가 낮다고 공공장소를 점거하여 농성하는 것들은 금지되어 있다. 노동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인격을 가지고 있어 근로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한다면, 미용이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용사나 의사도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하지 않는가? 더 나아가 기업가도 파업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이 되면 거래는, 경쟁이 아닌 ‘교섭’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소비자는 같은 품질의 재화나 서비스를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없고 판매자는 상대적으로 가장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없다. 결국,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다.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떠나거나의 원칙이 지켜져야 최적의 자원 배분이 이루어지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제15조)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했지만, 경제적 자유가 보장된 것은 1954년 2차 헌법 개정 때이다. 민간기업의 국유화 또는 공유화가 엄격히 제한되었고(제88조), 대외무역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날 여지가 생겼다(제87조). 그러나 국가 주도의 경제 운영은 박정희 정부까지 지속되었고, 전두환 정부 때 완화되었지만, 그 후에는 더욱 강화됐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노골적으로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그 구실로 저소득 취약 계층을 지원하고 재벌기업을 억제한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비정규직의 강제적인 정규직화, 통상임금의 범위 확대,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관련 일자리안정자금의 신설, 법인세, 소득세, 종합부동산세 인상, 국민연금기금을 통한 대기업 통제(연금사회주의), 재벌 해체를 위한 여러 정책 등 수많은 반시장 좌파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이런 정책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미국을 시장 만능 사회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은 ‘시장(market)’과 ‘자발성(volunteerism)’이다. 빌 게이츠(William H. Gates)와 워런 버핏(Warren E. Buffett)과 같은 부호들은 큰 재산을 자발적으로 사회에 기부하고, 지체 장애 학생의 학업과 생활을 도와주는 등 수많은 자발적인 봉사를 한다. 자발성을 높이기 위한 세제상의 혜택도 있고 학교에서 관련 교육도 활발하다. 자발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동네 슈퍼나 빵집, 서점 등이 문을 닫아 골목 상권이 위축되는 것이 안쓰러운 사람은 골목 상점에 가서 상품을 사는 자발성을 발휘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제약 없이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안심소득제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시장경제에서 낙오하거나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는 세금을 재원으로 해서 이들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 필자는 현행 복지 및 조세 제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복지 혜택을 확대・개편한 안심소득제(Safety Income System)를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4인 가구 기준(이하 동일) 연 6,000만 원 이하의 소득을 버는 가구에 그 가구의 소득과 6,000만 원의 차액의 50%를 지원하는 것이다. 소득이 전혀 없는 가구는 연 3,000만 원(월 250만 원)을 지원받고, 소득이 연 1,200만 원(월 100만 원)인 가구는 연 2,400만 원(월 200만 원)을 지원받아 처분가능소득이 연 3,600만 원(월 300만 원)이 된다. 이 제도에 필요한 추가적인 예산은 연 31조 원으로 추정되는데, 중앙정부의 복지 관련 예산이 2020년 대비 2023년에 73조 원이나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그 증가분의 반 이하를 사용하면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침체 일로를 겪다가 설상가상, 우한 폐렴 사태로 급전직하, 역성장하고 있다. 자살률이 치솟고 있으며 수많은 가장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현행 복지 제도에서는 재산이나 부양가족을 따져보는 적격성 심사(means test)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급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지원이 원활하게 되지 않고 있다. 안심소득제에서는 소득으로 지원 여부 및 지원액을 결정하고, 국세청이 소득에 대해 (매월 원천징수하고 연말에 정산하듯이) 매월 선 지원하고 후 정산해서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받는 복지 혜택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소득과 연 6,000만 원과의 차액의 50%를 추가로 지원한다. 그러므로 안심소득제는 기존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더 채워주는 범 복지 제도(Pan-Welfare System)이다.
현행 복지 제도는 근로 의욕을 약화시키지만, 안심소득제는 강한 근로 유인을 제공해 국내총생산 증가에 기여한다. 또한, 중위 소득 이하의 가구에 대한 지원액이 각 가구 소득에 반비례하므로, 소득 격차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소득재분배 효과가 탁월하다. 그리고 소득 자료에 전문성이 있는 국세청이 안심소득제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 행정 비용이 절약되고, 복지 혜택 전달 과정에서의 예산 낭비 및 누수가 최소화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실직이나 사업에 실패해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할 가능성이 있고 우한 폐렴 사태 이후 이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이런 처지에 놓일 때 안심소득제는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kpark@sungshin.ac.kr>
글 | 박기성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한국노동경제학회 회장을 거쳐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 경제학회에서 수여하는 청람학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칼럼은 필자의 <박기성 교수의 자유주의 노동론(서울: 펜앤북스, 2020)>에 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