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칠 수 없는 것
2021-01-20
월드뷰 JAN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작가)
지금도 종종 그날 그 가구점 안의 풍경이 환히 떠오른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둘째 딸과 사당동 가구거리 불 밝힌 상점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가구점 안에 진열된 소파를 탐색하며 새 소파를 찾는 중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네 번째 이사를 준비하면서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사는 소파였다. 우리는 그간 사용했던 분홍색 소파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8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소파는 두 번째 이사할 때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사용하던 소파를 산 것이었다. 당시도 은행 대출을 이용해 마련해야 했던 전세금이 힘에 부쳐 이사에 필요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다. 앞서 살던 집은 너무 좁아 소파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기에 거실에 일인용 소파 하나를 놓고 사용했었다. 어린 딸들은 TV를 보기 위해 작은 검정색 소파에 서로 먼저 앉으려 했고, 때론 셋이 불편하게 끼어 앉기도 했다.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할 때 좀 넓어진 거실에 아이들을 위해서도 소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자신들이 쓰던 소파를 싼값에 사겠냐고 제안해서 선뜻 승낙한 것이다. 어설픈 분홍색도 펑퍼짐한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용해보니 그 소파는 인조가죽이어서 날이 조금 더워지면 끈적이고, 한여름엔 소파의 가죽이 딸들의 맨살에 들러붙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소파 위에서 뒹굴고 뛰고 즐겁게 지내 소파는 금세 낡아지고, 2년에 한 번씩 천갈이를 하며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 살 소파는 가죽으로, 색깔도 좀 잘 선택하고 싶었다.
2년마다 치러야 하는 이사는 몸도 마음도 내겐 힘든 일이었다. 터무니없이 오른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A4용지에 숫자 계산을 하고, 은행을 방문하고, 대출 심사를 받고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더구나 허리가 부실한 나는 포장 이사를 예약했지만 우선 버릴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녹초가 되곤 했다.
전날 혼자 가구거리에 나가 몇 군데 들러 보며 나는 이미 맥이 좀 빠져버렸다. 내가 원하는 가구는 예산을 훌쩍 벗어나 있었고, 겨우 3인용 소파 하나를 사러 간 손님은 주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구거리에 혼자 나가 소파를 결정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자 둘째 딸이 자신이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봐주겠다고 해서 함께 나온 길이었다. 전날 눈여겨 봐두었던 두어 상점에 들러 구경하고 좀 더 보자며 상가를 따라 걸었다. 그 가구점은 둘이 동시에 눈짓으로 ‘저거 한 번 볼까?’ 하고 들어간 곳이었다. 상점 안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인 듯한 남자가 일어서 우릴 맞으며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좀 지쳐 말하고 싶지 않았다. 딸이 대신 주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딸이 이것저것 살펴보는 동안 한쪽 의자에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저만치 앉아 있던 다른 한 남자가 내게 물었다.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대답 대신 거절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일어나 정수기 쪽으로 오더니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게로 다가와 내밀며 다시 말했다.
“드셔보세요. 기분이 좀 좋아지실 거예요.”
나는 그가 내민 손이 부담스러워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만 까딱하고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딱히 마시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가만 감싸들고 있었다. 조금 후 딸에게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한 모금 드셔보세요. 피곤이 풀리실 거예요.”
권유가 아니라 강요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심정으로 나는 비로소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 또래의, 아니면 나보다 서너 살 아래 정도의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래, 내가 원한 것이 바로 그거야!’ 하는 듯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따님이랑 함께 소파를 고르러 다니시니 얼마나 좋으세요? 매우 뜻깊은 추억을 만드시는 날이네요. 그렇게 특별한 날이 많지 않답니다. 우리 인생에서요. … 근데 어머니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셔서요.”
이때 가게 저편에서 딸과 함께 있던 주인 남자가 끼어들었다.
“야! 인마, 너 손님한테 지금…!”
“아니, 나는 어머니가 너무 좋은 시간을 놓치고 계신 것 같아서…. 제가 실례했다면 용서하세요.”
“저 친구가 따님과 함께 오신 모습이 부러웠나 보네요.”
주인이 서둘러 변명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남자가 건네줘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달짝지근한 커피를 목으로 넘기는데 목울대가 아렸다. 울컥한 기분이 들었고 자칫 눈물이 쏟아질 것도 같았다.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끝내 한 마디도 못하고 대신 목례를 하고 상점을 나왔다. 다른 상점에서 몸이 닿는 부분만 가죽으로 된 베이지색 소파를 계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나는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이미 와르르 무너져 내렸음을 알았다. 무너져 내린 것은 무엇일까?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의 상처를 뒤덮었던 껍질? 꼿꼿하게 지켜온 자존심? 앞만 보고 달리던 질주 본능? 그 실체를 정확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합리적 추론에 의한 이성보다 감성의 어떤 선이 퉁겨지고 계속 울리고 있음을 감정이 먼저 알아차려 자꾸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누가 볼까 봐 흘러내리기 전에 닦아내며 유리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밤 버스의 유리창에 한 여자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어느 구석에도 표정이 없는 데스마스크 같은 얼굴.
남자의 말이 맞았다. 딸과 새 가구를 고르러 다니는 길이니 둘이 함께 라일락꽃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행복해도 부족할 그 시간, 나는 마지못해 동행한 채무자같이 함께 다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처럼 놓친 것일까? 놓쳐버린 것은 무엇일까? 남자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좋은 시간을 놓치는’ 것도 모르고 나는 지내온 것 아닌가!
2년 주기로 전세 재계약 기간이 돌아올 때마다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직원 사택이 우리에게 배당되기를 기도했다. 학교에 여러 채의 사택이 있었음에도 그러나 좀체 그 기회는 와 주지 않았고, 예상을 뛰어넘어 오르는 전세금은 가정경제를 압박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늘 아르바이트를 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집에서 기다리기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한국에 돌아와 적응하는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틈틈이 글을 쓰는 일은 내가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은 시간이었기에 고요한 시간을 잡아야 했고, 9년 만에야 딸을 같은 하늘 아래 둔 부모님은 나와의 만남에 늘 갈증을 느끼셨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 찾아뵈면 ‘딸내미 보는 것이 대통령 보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대통령은 날마다 TV에서 보는데 딸은 한 달에 잘해야 두어 번 볼 수 있다는 투정 섞인 말씀이셨다. 여전히 약한 위를 달래가며 고군분투하는 남편에게도, 유년의 때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연세 들어 심신이 연약해가는 부모님께도, 달란트를 꺼내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는 나 자신에게도, 내가 관계하는 몇 모임에도 충실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안간힘을 쓰며 과부하가 걸렸고, 지쳐가고 있었나 보다. 귀국 후 10년째였다. 그러므로 그날, 가구점 남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내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느꼈다.
얘야, 너무 애쓰지 말아라.
좀 내려놓아도 된다.
오늘 하루 내 은혜가 네게 족하지 않느냐?
그렇게 소파를 사고 이사한 그 집에서 이사한 다음 날부터 둘째의 피부질환이 시작되었다. 6개월 가까이 계속된 투병 과정은 그간 우리 가족이 겪었던 일 중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두 개씩 싸던 아이의 도시락에 반찬이, 과일이 생각대로 예쁘게 담기면 잠깐 만족하고, 밤새 피범벅이 된 침구가 햇볕에 뽀얗게 뽀송뽀송 마르면 순간 감사했다.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도 그랬다. 넘어지셔서 척추가 골절된 엄마. 병원 치료를 다 마치고 우리 집 근처로 모셔올 때만 해도 어떻게든 재활에 성공해 다시 걷게 해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워커를 잡고 서서 숫자 700까지 세실 때는 희망이 보였다. 다리에 근육이 붙고 힘이 생겨 엄마 혼자서 워커에 의지해 걸으실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80이 넘은 노인에겐 다른 복병이 숨어 있었다. 콩팥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방광이 기능을 잃게 된 것이다. 한 번 늘어나 버린 방광은 탄력을 잃어 다시 수축되지 않는다며 이제 소변줄을 끼고 살아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 나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변 주머니를 달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야구 경기장의 포수가 떠올랐다. 쪼그린 자세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긴장한 채 수없이 날아오는 공을 받아내는 포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복병을 향해 어금니를 깨물며 나도 속으로 외쳤다.
‘좋아! 던져!! 뭐든지 다 받아줄게!’
그러나 쉽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엄마를 지켜보는 것,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희망(엄마! 빨리 나아서 함께 여행도 가고, 스파에도 가자!)을 앵무새처럼 얘기하는 것, 침대에서 답답하게 하루를 지내다가 잠시 들른 딸과의 시간이 아쉬워 좀 더 있기를 원하는 눈빛을 떨치고 엄마 집을 나서는 것…. 날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근처 작은 도서관에 들렀다. 시집 한 권을 뽑아 시 한 편을 읽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면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고통이, 슬픔이, 허망함이 조금씩 묽어지고 옅어졌다. 서가 옆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커다란 유리창으로 번져 들어오는 석양빛이 부드럽게 등을 감싸고 때론 어둠이 따스하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남자의 말처럼 ‘좋은 날’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 슬프고 힘든 날들 속에서도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의 ‘뜻깊은 추억’을 위해 수년간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꿈꾸듯 춤추며 땀 흘리던 운동도 그만두었다.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간다.
그 소파는 여전히 우리 거실에 있다. 가죽이 많이 상해 이제 낡은 소파가 되었다. 그 소파와 함께 다시 나는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광풍이 이는 고난의 바다를 지나는 중이다. 나는 지금, 이 ‘특별한 날’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순간순간 숨을 고르는 방법도 터득해가고 있다. 어쩌면 이제 배의 고물 위에 누워 편히 잠을 청하는 배짱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항해, 이 배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배의 키는 주님이 잡고 계신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