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현실이 된 영화 ‘조커(Joker)’
2020-12-21
월드뷰 DEC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
글/ 김철홍(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영화 ‘조커’를 보았다. 영화가 끝난 뒤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응? 이 영화 뭐지?”였다.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메시지는 영화 속에 상당히 세련되게 영화 곳곳에 담겨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 메시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영화의 내용을 처음부터 꼼꼼히 반추하면서 영화 곳곳에 숨겨진 코드들을 찾아보았다. 그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영화 제목은 ‘조커’지만 오락영화가 아니다. 공포영화다.
1. 도대체 행복할 이유가 없다
주인공 아서(Arthur)는 ‘하하’(Haha)라는 작은 용역회사에서 일한다. 그의 직업은 광대 역할이다. 사람을 웃기는 게 직업이지만 그는 직장에서 행복하지 않다. 직장 상사는 동네 양아치 애들에게 아서가 얻어맞느라 망가져 버린 광고판 비용을 그의 주급에서 공제한다. 직장 동료 렌달(Rendall)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충고하면서 그에게 권총을 준다. 동료애, 우정이 느껴지는 대목이지만 사실 그건 렌달의 속임수다. 자신의 경쟁자인 아서를 제거하기 위한 술수다. 결국, 아서는 어린이 병원에서 환자 위로 공연을 하다가 권총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직장에서 해고된다.
아서는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다. 어머니 식사도 챙기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씻어드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가 쓴 편지를 읽다가 아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토마스 웨인(Thomas Wayne)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고담(Gotham)시 시장 선거에 출마한 유명 정치가다. 엄마는 아서가 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생부(生父)를 찾아간다. 정문을 지키는 사람은 그의 엄마가 정신착란에 빠진 병자라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서는 엄마의 말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는 정말로 정신병자였고, 심지어 자신은 친아들도 아니었다. 입양된 아들이다. 엄마와 동거하던 남자는 어린 아서를 심하게 때리고, 학대했고, 엄마는 그것을 묵인했다는 기록을 찾아 읽게 된다. 아서가 지금 약을 먹어야 하는 정신병적 증상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연유다. 알고 보니 아서는 엄마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었고, 엄마는 아서를 지금까지 속였다.
아서의 직장과 가정을 넘어서 영화는 사회적 주제도 다룬다. 직장에서 해고된 날 뉴욕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아서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어떤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아서는 주체할 수 없는 병적인 웃음을 웃기 시작하고 그것 때문에 부유한 청년 엘리트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월 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경제 제도는 주인공을 두들겨 팬다. 아서는 갖고 있던 총으로 그들을 쏜다. 도망가는 마지막 한 사람도 쫓아가 죽인다. 이 사건은 단순한 폭행이 아니다.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갈등과 학대를 보여주는 장치다.
토마스 웨인은 이 영화에서 정치를 상징한다. 아서는 토마스가 아버지라고 착각하고 그를 만나러 가지만, 냉대를 당한다. 아서는 내가 원하는 것은 없고 그저 존중(respect)을 받는 것과 한 번 안아주는 거(hug) 정도라고 말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의 얼굴을 강타한 강력한 주먹뿐이었다. 아서는 정치가에 의해 모욕당하고 두들겨 맞는다.
아서는 머레이 프랭클린(Murray Franklin) 토크쇼의 애청자다. 이 토크쇼는 그의 삶의 낙이다.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 분)는 그의 영웅이고 롤 모델이다. 어렸을 때 엄마는 그에게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래야 커서 밥 벌어먹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서는 엄마에게 “나는 커서 코미디언이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아서는 행복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웃기는 스탠드업(Stand up)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 꿈이다. 자신의 노트에 다른 사람을 웃게 할 소재를 열심히 메모하지만, 재능은 별로 없다. 어느 날 머레이는 아서의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아서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이 영화에서 토크쇼는 그의 헛된 인생의 목표이면서 언론과 대중매체를 상징한다. 대중매체는 아서의 꿈을 짓밟고 뒤통수를 치고, 그를 심리적으로 두들겨 팬다.
아서가 정기적으로 사회복지사를 만나 상담을 한다. 그 상담사는 사회보장제도를 상징한다. 상담사를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아서는 “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러자 상담사는 “사실 아무도 너 같은 사람에게 관심 없어. 그리고 심지어 나 같은 사회복지사에게도 너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인 사회복지도 무너져 버린다.
아서의 삶은 총체적 난국이다. 온갖 난관이 겹겹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의 인생에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다. 직장도, 친구도, 가정도, 경제도, 정치도, 언론도, 심지어 사회보장제도도 다 엉망진창이다. 도대체 행복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2. 이젠 억지로 웃지 않는다
그래도 아서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는 진심으로 웃고 싶다. 하지만 그에게는 웃을 이유가 없다. 어머니는 항상 그에게 “Smile and have a happy face.”라고 말했다. 토크쇼 나가기 전 분장실 유리에는 “Put on a happy face”라고 쓰여 있다. ‘하하’ 용역회사의 계단 위에는 “Don’t Forget to Smile”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나는 전혀 웃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아서에게 웃음을 강요한다. 아서에게 행복할 이유가 없는데, 세상은 그에게 행복을 강요한다. 아서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쓴다: “People expect you to behave as if you don’t” 이 세상은 아서에게 가식적으로 행동할 것을 강요한다.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한 척해야 하고, 즐겁지 않은데도 웃어 보여야 한다.
이 영화의 최고의 아이러니는 웃는 것이 그에게는 정신질환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웃음은 병이다. 약을 먹어야 하는 병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음이 터져 나오는 병. 그것은 세상이 그에게 강요한 병이다. 세상은 아서에게 광대로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이제 아서는 절대 그런 식으로 강요받은 삶을 살지 않기로 한다. 직장에서 짐을 싸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계단 위에 걸린 간판의 글씨 일부를 검은색 매직으로 지워 “Don’t Smile”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은 사회가 가르쳐온 삶의 방식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이다. 저항의 선언이다.
지하철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토마스 웨인이 TV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말을 한다.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인범의 편을 들면서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고 있다고 사회자가 말하자 토마스 웨인은 범인이 광대의 마스크를 쓴 사람이었고, 범인은 자신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을 시기하여 죽인 거라고 말한다. 우리 같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그런 하층민들을 비겁한 광대(Clown)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담시(Gotham City)에서는 토마스 웨인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난다. 데모를 하는 사람들은 광대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토마스가 고담시의 시민들을 광대라고 불러 모욕했기 때문이다. 데모대는 문제는 부자들이며, 사회의 제도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토마스는 마지못해 사과하지만, 자신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며 그들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데모대는 “Down with Wayne”이라고 외치면서 경찰을 밀친다.
아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세 명의 월가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에 시위가 시작된다. 광대로 살기를 거부한 것은 아서 한 사람이 아니다. 이제 수많은 아서가 생겨난다. 수많은 광대가 거리에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기득권 세력(establishment)을 적으로 보고, 그들과 싸워 사회 제도 자체를 바꾸겠다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3. 복수와 파괴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아서가 부유하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힘을 가진 월가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그는 지하철 화장실로 뛰어가 그곳에서 춤을 춘다. 느리고 흐느적거리는 춤 속에서 그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아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를 찾아가, 왜 나에게 행복하라고 말했냐고 따진다. 자신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이 비극(tragedy)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빌어먹을 희극(comedy)이었다고 말하면서 엄마를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 죽인다. 아서는 자신을 속인 직장 동료가 집으로 찾아오자 그를 가위로 찔러 죽인다. 화장한 흰색 얼굴에 붉은 피가 튀어 있는 모습에서 광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토크쇼에 출연하기 위해 분장을 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춤을 추는 아서, 그는 이제 행복해 보인다. 그의 춤에는 희열이 느껴진다. 경찰은 그를 체포하려고 쫓아오고 그는 지하철로 도망친다. 지하철은 광대의 마스크를 쓰고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경찰은 아서를 쫓다가 지하철에서 무고한 시민을 총으로 쏘고, 분노한 승객들이 경찰을 두들겨 팬다. 아서는 토크쇼에서 세 명의 월 스트리트 사람들을 자신이 죽였다고 고백한다. 진행자가 그 말이 전혀 웃기지 않다고 말하자, 아서는 이 세상의 제도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결정하듯이, 무엇이 웃기고 무엇이 웃기지 않는지도 너희들이 결정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끔찍하고(awful) 미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머레이가 그의 잘못을 비판하자 아서는 머레이가 자신을 놀렸던 것을 말하면서 생방송에서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아서는 체포되고 온 거리는 폭동과 시위로 가득하게 된다. 경찰차에 실려 가면서 불타는 거리를 바라보는 조커는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경찰관이 “네가 해놓은 것을 보라”고 말하자, 아서는 “Isn’t that beautiful?”이라고 말한다. 경찰차가 사고로 엠뷸런스와 부딪히고 시위대는 아서를 구해준다. 폭력과 폭동, 방화가 가득한 뉴욕의 거리를 지나가던 토마스 웨인의 가족은 시위대에 의해 살해당한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아서는 그들의 영웅이 된다. 시위대 앞에서 다시 춤을 추는 아서, 입을 찢으며 웃는다.
4. 영화, 현실이 되다
조커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이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웃기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이제 때려 엎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조커’는 독기로 가득 찬 영화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반사회적인 영화인 것 같다. 이 영화는 단순히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그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부조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에 따르면 인생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영화는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우정도, 회사도, 가족도, 경제도, 정치도, 매스 미디어도, 모두 다 부숴버리라고 말한다. 사회보장제도를 개선하는 것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이 영화는 “지금 장난하냐? 지금 난 미쳐버리겠는데 농담하냐?”라고 반문한다.
지난 학기가 연구 학기라 미국 보스턴에서 지난 2월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보고 나서 영화가 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란 사회가 이 영화가 묘사하듯 그렇게 부조리한 사회도 아니고, 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런 폭동이 미국에서 일어날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조지 플로이드(George Perry Floyd)가 미니애폴리스에서 체포과정 중 죽는 일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도심에서 시위, 약탈, 폭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흑인 인권 운동으로 시위가 시작했지만, 안티파(Anti-facist) 조직이 시위를 주도하면서 영화 조커가 묘사한 것을 넘어서는 폭력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졌다. BLM(Black Lives Matter) 시위대가 개인 주택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지나가는 백인 할머니를 때리고, 경찰을 공격하고, 무차별 총격이 난무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가 개봉된 지 불과 일 년 만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현실이 되었다. 솔직히 영화보다 현실이 더 충격적이다. 대한민국만 망가져 있는 게 아니라, 미국도 많이 망가져 있다. 우리나라 좌파는 미국 좌파만큼 많이 망가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아 좀 위로가 된다.
조커는 미국 사회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깊이 망가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커가 그려준 세계관은 문명 전체를 향한 깊은 증오와 앙심을 노출시켰다. 조커가 묘사한 그런 사람이 전체 인구 중에 몇 명이나 될지 모르나,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자신과 조커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 사람들은 기존사회를 뒤집어엎고 어떤 대안 사회를 꿈꾸고 있는 걸까? BLM 시위대의 핵심세력이 드러내 보인 그들의 정체성을 보면 결국은 ‘사회주의’다. 무슨 세련된 대안적(alternative) 사회를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조커들이 정권을 잡고 자본주의를 부수고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시키면 과연 조커들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조커들을 제외한 모든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망가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조커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과 행복을 없애고 있다.
<paulstudy@naver.com>
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대학원(M.Div.)과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