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지 않았다고? 너는 낙제야!”
2020-11-22– 무신론자 교수와 대결하는 한 청춘의 이야기 <신은 죽지 않았다>
월드뷰 NOV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
글/ 남정욱(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무신론자 교수와의 대결, <신은 죽지 않았다>
‘죽었다’와 ‘없다’는 다르다. ‘죽었다’는 있었는데 없어진 것이고, ‘없다’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없는 것이다. 무신론은 이 둘이 사이좋게 부르는 합창이다. 신이 없다고 한 사람들은 대체로 과학자들이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작가나 철학자들이지만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포이어바흐, 니체, 디드로, 밀, 러셀, 푸코, 브레히트, 흄, 카뮈, 프로이트 같은 이름들을 칠판 가득 적어놓고 이들도 통찰 끝에 신은 죽었다고 했으니 너희도 공손하게 진리에 따르라며 학생들을 윽박지르는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첫 시간에 아예 ‘God is dead.’라고 노트에 쓰게 한 후 서명까지 받아 학생들의 기를 죽인다. 여기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며 한 크리스천 학생이 반발하고 나선다. 교수는 자신과 학생들을 설득할 기회를 주겠다며 세 번의 발표 기회를 제안한다. 그러니까 교수는 검사, 반발 학생은 변호인 그리고 학생들은 배심원들이 되는 것이다. 표결에서 질 경우 반발 학생이 받아야 할 불이익은 낙제다. 참고로 반발 학생은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이다. 지력의 총량이나 인생의 경험으로 봤을 때 결코 학생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그러나 반발 학생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설득하라는 동네 목사의 말에 힘입어 기꺼이 그 싸움에 도전한다. 미국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 2014)> 이야기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신이 없다고 달려드는 건 젊은 놈이고 방어하는 쪽은 교수일 것 같다. 당연히 아니다. 저 위대했던 유럽이 2차 대전 이후 망하는 일을 하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아메리카도 정신 자체가 내내 추락하는 중이다. 대학가, 문화계, 종교계가 모조리 좌익의 온상이다. 변곡점은 대략 60년대 후반이다. 프랑스는 68년부터 본격적으로 망하기 시작했고 아메리카는 베트남 반전 운동으로 문화·예술이 완전히 좌익화되는 69년 말부터다. 그리고 그 시기 학생 신분을 거친 좌익들은 이제 신분이 바뀌어 강단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물들이는 중이다(우리나라 얘기 절대, 아니다). 멍청한 신 대신에 이성의 힘을 알려주겠다며 교수들이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가끔은 가정교육으로 크리스천 정신을 함양한 젊은 청년들이 충돌하는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이 영화 역시 그 사례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 속 철학 교수의 이름은 제프리 래디슨이다. 그는 ‘무신론 = 없음 + 신神’, ‘불가지론 = 모름 + 신’이라는 공식을 적어주고 무신론이 그리스어 ‘theos(신)’와 ‘a(없음)’의 합성어라며 인문학 지식을 뽐낸다(대부분의 어린 애들은 그리스어, 라틴어 이야기를 하면 깜빡 죽는다). 반발 학생의 이름은 조쉬 휘튼이다. 전략을 묻는 조쉬에게 동네 교회 목사는 성경 구절 하나를 덜렁 던져준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협박하라는 얘기인가? 조쉬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아인슈타인으로 패고 스티븐 호킹으로 찌르고 화려한 교수의 말발
나쁜 일은 몰려서 온다. 인생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까짓 자존심과 신을 지키는 일에 난리냐며 고등학생 시절부터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결별을 통보한다. 앞으로 5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너는 불안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이유다(여자들은 이상하다. 이별 통보를 할 때 꼭 사족을 단다. “엄마가 너 만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해” 따위의. 이게 논리인가). 여자는 여자고 배틀은 배틀이다. 교수의 반대 논리는 서사적이고 압도적이다. 첫날 발표에서 교수에게 무참히 깨진 조쉬는 절치부심 다시 논쟁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역부족이다. 조쉬는 또 박살이 나고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의 눈초리는 싸늘하다. 마침내 세 번째 토론. 조쉬는 래디슨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은 왜 신을 미워하십니까?” 갑자기 들어온 복부 훅에 래디슨은 당황한다. 조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안면에 스트레이트를 퍼붓는다.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미워할 수 있나요?” 이 대목에서 래디슨은 무너진다. 그리고 그의 무신론 기원이 어머니의 죽음에 냉정했던 신에 대한 증오라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배심원 역할인 학생들은 “God’s not dead.”를 고백하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래디슨의 완벽한 패배다.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면
영화는 사실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메인 스토리라인은 조쉬와 래디슨 사이의 전선(戰線)이지만 하위 플롯이 몇 개 더 있다. 무슬림 아버지 밑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소녀, 무신론자인 아버지에게 맨날 혼나는 중국인 유학생, 암 선고를 받은 안티크리스트 웹 저널리스트, 그리고 유신론자인 래디슨의 애인이다. 이들은 알게 모르게 조쉬와 연결되어 있는데 신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신과 화해하거나 대체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를 못 만들어도 너무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와 연출과 편집이 영화를 말아먹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배우들의 연기는 나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이보다 더 못 만든 영화를, 장담컨대 나는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데 3탄으로 만들어진 시리즈물의 첫 번째 작품인 이게 가장 잘 만든 거란다. 공포다. 디테일의 포기도 끔찍하다. 중국인 유학생은 중국에 있는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광둥어로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만다린어로 대꾸한다. 둘은 완전히 다른 언어다. 마치 독일어로 묻는데 아랍어로 답하는 것처럼 대단히 공포스럽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게 엔딩이다. 회개인지 후회인지 모호한 심리상태에서 떠나간 애인을 만나러 가던 래디슨은 차에 받혀 세상을 하직한다. 래디슨이 애인과 재회하고 크리스천으로 다시 태어나는 암시 따위를 보여주었더라면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도 그 빤함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중급 정도의 작품을 보면서도 대단하다, 훌륭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예술이다 탄복을 하는 아량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이런 이유로 영화를 추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신론, 자기가 유기견이란 사실을 알게 된 강아지가 낑낑대며 내는 앓는 소리
솔직히 무신론자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차라리 다른 신을 섬기는 게 그보다는 나으며 이들에게 선의는 너무 과한 대접인 동시에 무신론은 자기가 유기견이란 사실을 알게 된 강아지가 낑낑대며 내는 앓는 소리라는 게 평소의 신조다. 신을 부정한 끝에 버림받은, 불쌍하고 ᄊᆞ가지 없는 피조물의 칭얼대는 소리라는 얘기다. 그들에게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다. 인간에게 신이 없으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무신론은 현실 세계에 지옥을 불러오는 초대장이다. 해서 나도 추가로 한 줄 보탠다.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면 신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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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정욱
작가이며 출판, 영화, 방송 등 문화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사>, <결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