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2020-11-21
월드뷰 NOV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소설가)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첫마디의 연필 잡는 부분에 언제부턴가 도톰하게 굳은살이 붙어 있었다. 그 첫 마디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며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두 손을 나란히 펴고 비교해보니 서로 달랐다. 왼손은 원래의 손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둘째, 셋째, 다섯째 손가락에서 변형이 시작되고 있었고, 특히 가운뎃손가락 첫마디 관절이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부푼 부분이 욱신욱신 쑤시고, 쑤시는 부근에 열감도 있었다.
옛말에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나도 내 아버지처럼 병원 가는 것을 싫어해 서너 달을 뭉개다가 결국 병원을 찾았다. 정형외과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퇴행성관절염이 왔네요.”
그러면서 의사는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퇴행성이 오기에는 좀 이른 나이라고 생각한 듯 “오른손을 많이 쓰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라고 물었다.
그해 뉴욕에서 직장을 잃고 필라델피아로 이사하자 어떻게 우리 가족의 소식을 들었는지 그 지역의 한 목사님이 만나자고 청하셨다. 보내준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도착해 사무실에 들어가니 목사님은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두툼한 바인더 서너 권과 박스 하나를 내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말씀하셨다.
“창세기 설교 원고와 테이프예요. 책으로 만들 수 있게 정리해주세요.”
의외였다. 동문 선배 목사님이었지만 처음 뵙는 분이었고, 더군다나 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의아했다. 내가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일은 바로 전 교회에서 겨우 일 년여 했을 뿐이었다.
“… 저를 어떻게 믿으시고요? 제가 먼저 두세 편만 가지고 가서 샘플로 해드릴 테니 원고 읽어보시고 나서 결정하시지요.”
“아니요! 안 봐도 됩니다. 그냥 맡아주세요. 이건 얼마 되지 않지만 우선….”
미리 준비하신 듯 돈 봉투를 바인더 위에 올려놓으셨다. 무거운 원고와 테이프 더미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떠나온 교회의 목사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내가 뉴욕에 도착한 다음 날 바로 당신의 집 지하실 서재로 날 데리고 가 말씀하셨다.
“이게 다 내 설교 원고야. 이걸 전부 책으로 만들어줘!”
서가엔 벽을 빙 둘러선 책꽂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교 바인더가 꽂혀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평생 강단에서 전한 그 설교가 책으로 만들어지길 간절한 눈빛으로 원하셨다. 그 일을 위해 한국에 나갈 때마다 몇 년에 걸쳐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날 소개받자 원고 세 편을 주고 정리해보라고 먼저 테스트를 하셨다. 그분은 내가 정리한 원고가 퍽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바로 나를 당신의 교회로 데려가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다. 당시 남편은 독일의 몇 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이미 받아놓고 독일문화원의 강좌를 들으며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동부의 제일 큰 교회에서 나는 풀타임, 남편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교회 옆 사택과 의료보험 등의 혜택! 경제적 어려움 없이 남편이 공부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로 방향을 잡은 터라 미국으로의 유학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토플성적도 필요한데, 찾아보니 남편에겐 7년 전의 성적표가 한 장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드리고 독일로 가더라도 설교집 출간을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몇 년 만에 적임자를 찾았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고 미국 쪽으로 즉시 수속을 시작하길 채근하셨다. 혼란스러웠다. 의논 끝에 우리는 기드온처럼 기도하기로 했다.
‘하나님, 비자가 먼저 떨어지는 곳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고 믿겠습니다!’
거의 다 될 것 같던 독일행은 집이 구해지지 않아 차일피일 지체되고, 급히 준비한 서류에 7년 전의 토플성적을 첨부한 미국행은 뉴욕의 크레딧이 있는 교회의 풀 스칼라십 등의 서류가 더해지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국, 미국 비자를 먼저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 생활. 그분도 나도 당신의 책 한 권, 영아부 교재 네 권 만드는 것 도움을 끝으로 우리가 서로 등을 돌리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뉴욕의 선배 목사가 공들여 데려온 사람이 일을 그만두고 근처에 와 있다는 소식을 필라델피아의 목사님이 들은 것 같았다. 당시 큰 교회 목사님들은 당신의 설교를 책으로 엮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필라델피아의 목사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 무엇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원고 더미를 내게 안긴 것이다. 뉴욕 교회 사직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많은 책을 만들어드려야지 생각했던 뉴욕의 목사님과는 결별하고, 생각지도 않은 필라델피아 목사님의 원고를 받아들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겨우 월급 한 달 분의 퇴직금으로 이사비용과 아파트 보증금을 내고 나니 우리 통장엔 잔액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하긴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일이 시작되었다. 원고정리를 시작할 그 무렵엔 컴퓨터가 귀해 나는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써 내려갔다. 목사님의 원고를 집중해 보면서 테이프를 한 번 듣고 원고지에 정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복음적이어서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많은 은혜도 받았다. 원고정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로 계속 이어졌고, 정리가 끝난 설교는 바로바로 서울의 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보기에도 멋있게 출간되었다. 그 일은 내가 필라델피아를 떠나 보스턴으로, 네덜란드로,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해서도 이어졌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컴퓨터로 작업을 시작했으니, 셀 수 없이 많은 원고를 오른손으로 원고지에 쓴 것이다.
‘특별히 오른손을 많이 쓰는 일을 하셨냐’는 의사의 말에 나는 무수히 많은 날 원고지에 연필로 쓰던 그 작업이 당연히 떠올랐지만, 말없이 웃고 대신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기계같이 많이 써서 낡았다, 생각하시면 돼요. 이제 아끼고 덜 쓰셔야지요, 뭐. 드릴 약도 딱히 없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상추 할머니’ 앞에 걸음을 멈추고 일부러 잠깐 쪼그리고 앉았다. ‘상추 할머니’는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 노천에서 철 따라 채소를 파시는 분이다. 80살 가까이 되신 노인으로 햇빛에 그을러 가무잡잡한 얼굴에 투박하고 거친 손을 가지신 분이다. 뙤약볕이 강하던 어느 날 얼음물 미숫가루를 타 갖다 드리며 낯을 익혀 나는 할머니의 단골이 되었다.
“어디 갔다 와? 이쁜이는 유치원 갔어?”
쉬지 않고 쪽파를 다듬으시는 할머니 손을 내려다보며 나는 동문서답을 했다.
“손가락 아프셔요?”
“손? 안 아퍼!” 하시면서 잠깐 두 손은 펴 보이시더니 “하이고! 참 숭허게도 생겼네!” 하시곤 얼른 거둬들였다. 평생 넓은 밭에 온갖 채소를 직접 재배해서 내다 파시는 할머니 손은 마디마다 옹이가 박히고 관절마다 심하게 부푼 상태에서 손가락이 바깥쪽으로 조금씩 휘어 있었다. 상추나 쑥갓을 담아주시는 손을 늘 보았지만 새삼 그날 할머니의 손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약도 없이 지내자면 할머니 연세쯤 되면 얼마나 손이 불편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안 아프셨어요?”
“왜 안 아퍼! 아펐겄지. 몰러. 기억도 안 나. 일허다 보믄 아픈지 워쩐지 알간?”
나보다 훨씬 심한 상태인데도 아프시지 않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원고를 치면서 관절이 쑤셔 불편할 때마다 ‘상추 할머니’의 말씀이 공명처럼 편안히 들렸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사람들의 손을 주목해서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 나는 알게 되었다. 손도 얼굴처럼 표정이 있다는 것을. 손은 얼굴과 달라 감추거나 꾸미지 못한다는 것도. 그 주인이 살아온 이력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정직함을 손은 가지고 있었다. 피를 나눈 가족부터 수십 년 친구들, 이미 어느 정도 성격을 알고 있는 친지들의 손을 살펴보면서 손은 그 주인의 성격도 일정 부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푸근하고 너그러운 손, 까탈스럽고 강박적인 성격의 손, 깔끔하고 단정한 손, 게으르고 나태한 손, 청렴결백한 손, 탐욕이 비계처럼 붙어 있는 손….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자신만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그리운 손은 엄마의 손이다. 평생 먼저 화를 내시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해본 일이 없는 엄마의 성격은 손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푸근한 손. 손을 잡고 걸으면 끊임없이 내 손을 만지작만지작하시던 손. 내게 한없이 너그럽던 손. 외할아버지의 단정함과 외할머니의 통 큰 손을 반씩 닮은 엄마의 손은 자신에겐 철저히 절제하고 타인에겐 너그럽고 통 크셨던 평생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던 손은 시댁 작은어머니 손이다. 살점 없이 마르고 언제봐도 물에 젖어 있는 것 같던 손. 평생의 수고로 손가락 마디마다 다 도드라지고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던 손. 작은어머니 남편은 6·25 때 납북되셨다. 열아홉 살에 결혼하고 함께 채 이 년을 살지 못했다고 했다. 태중의 아기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내가 결혼하고 처음 인사드릴 때 그렇게 태어나신 아주버님은 37세셨다. 작은어머니는 평생 그 아들 한 분을 바라보고 사시며 큰댁의 제삿날이나 명절, 시댁 모임에 늘 함께하셨다. ‘경성제대를 졸업하신 인텔리로 인물도 훤하고 너무 멋있는 오빠였다’라고 시고모님은 작은아버님을 회상하셨다. 수원농업시험장에 근무 중 내무서에 불려갔다가 그길로 못 돌아오셨단다. 작은어머니는 뵐 때마다 고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지만, 스물한 살 그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을 어찌 견디고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사셨을지…. 그 서러운 시간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아버님과 아주버님은 혹 북한에 살아계실 작은아버님의 소식을 끊임없이 수소문하고 계속 이산가족상봉 신청도 하셨지만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이것이 정녕 현실일까 싶은 우리 역사의 한을 온몸으로 지고 평생을 살아내신 작은어머니는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덮치던 날 세상을 뜨셨다. 이승을 벗어나서야 그 모진 질곡을 벗어버린 작은어머니의 생이 너무 가슴 아팠다. 참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나는 소설 속에서라도 그리던 남편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작은어머니가 상봉단으로 북한 땅에 가서 남편을 만나고, 두 손을 마주 잡는 소설을 한 편 썼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뵐 때마다 외경심마저 들게 하던 작은 어머니의 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막내딸은 아빠를 닮아 죽죽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뼈가 앙상하게 보이는 마른 장작 같은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3 때 입시를 앞두고 오랜 시간 화실에서 스케치하고 늦은 밤 귀가하는 딸의 손은 4B 연필 흑연 가루로 날마다 숯검정이었다. 소파에서 잠시 쉬는 지치고 피곤한 새까만 손은 안쓰러웠다. 볼 때마다 다른 검은빛의 농도만큼 그 손에 꿈이 축적되고 있다고 믿었다. 힘주어 연필을 쥐기에도 연약해 보이던 그 손으로 딸은 당차게 자신의 꿈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제 사회를 향하여 막 한 걸음 내디딘다. 나처럼 그 손에 혹 퇴행이 올지라도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처럼 힘껏 꿈을 펼쳐 보기를 소망하며 나는 딸의 손에 가득 축복을 쥐여준다.
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짝을 고를 때는 세 가지를 함께 해보겠노라고. 소주 마시기, 당구 치기, 바둑 두기. 아버지는 당신이 즐겨 하시던 ‘놀이’를 함께 해 봄으로 상대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셨다. 유감스럽게도 내 짝은 교역자 신분으로 소주를 함께 마실 수도, 당구는 쳐본 일도 없어 결국 바둑만 다섯 판을 두었다. 35년을 함께 지내보니 당시 사위로 인정하신다며 말씀하셨던 부모님의 평가가 크게 틀리지 않음을 알겠다.
내겐 딸이 셋 있다. 무엇으로 나는 상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는 나는 딸들에게 ‘할머니 때부터 믿는 집안의 자제면 족하다’고 말해놓았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나도 모르게 상대의 손을 은밀히 살펴볼지 모르겠다.
코비드19가 미국을 휩쓸던 때 뉴욕의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보내고 그 지하실의 바인더 중 몇 권이나 책으로 엮으셨을까? 필라델피아 목사님의 설교가 책으로 출간될 때마다 당신이 그토록 공들여 만들었던 기회를 허망하게 놓아버린 뉴욕의 목사님을 나는 매번 떠올렸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회한 같은 것이 늘 동반되었다. 당신 앞에 굴러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던 필라델피아의 목사님도 은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고를 부탁할 때마다 하신 말씀처럼 그 많은 설교집이 ‘문서선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을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지 않지만 나는 두 목사님의 손을 알 것만 같다.
내 손가락도 이제 아프지 않다. ‘상추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 다만 치열한 노동의 흔적이 나무의 옹이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더더욱 부끄럽지도 않다. 할머니의 탄식이 내게서도 절로 나올 뿐이다. 하이고, 참 숭허게도 생겼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