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2020-10-22 0 By 월드뷰

월드뷰 OCTOBER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1


글/ 조혜경(소설가)


떠나 온 도시는 길로 기억되었다.

낯선 도시에의 적응은, 두고 온 도시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거나,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바람에 일제히 은화처럼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거나,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라도 고요한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두고 온 길들이 환히 떠올랐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천변의 한벽루길, 우물 속처럼 고즈넉한 경기전 옆길, 독수리를 만나러 가던 동물원 길, 빨간 양산을 받고 오르던 신혼의 언덕길, 어둠이 내리던 프랭클린 에비뉴, 리누드가든, 아우데스트라트…. 모든 길 위엔 기억이 저장되어 있었고, 때론 덩어리로 때론 파편으로 그 기억들은 순식간에 나를 그 길 위에 세워놓았다.


내 기억 속의 첫 길은 그 겨울 대숲을 지나던 길이다.

내 나이 열 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시내 오스카 극장에서 영화 ‘춘원 이광수’를 보고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는 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편으로 길을 잡으셨다. 철둑을 넘어 곧장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거리 못미처 대로변에 집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철둑을 넘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셨다.

“할아버지 어데 다른 데 가시게요?”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내 손을 꼭 쥐고 걸으셨다. 교회로 오르는 언덕길을 지나쳐 작은 개천과 마주한 길에서 왼편으로 들어서자 대나무 숲을 지나는 길이 이어졌다. 겨울이었지만 날은 포근했고 감빛 석양이 대나무 줄기를 부드럽게 감싸는 저물녘이었다. 빨간 털 장화를 신은 나는 응달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얼음 눈을 일부러 골라 밟느라 깡충거리고 할아버지는 내 손을 놓지 않고 큰 걸음으로 따라와 주셨다. 가끔 마른 대나무 잎에 바람이 스치는지 할아버지가 연필을 깎아줄 때 나는 삭- 삭-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길은 좁아졌고 구불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얼마쯤 가자 신기하게 영생학원 옆길로 이어졌다. 그 길은 나도 아는 길이었고, 바로 우리 집으로 내려가는 큰길과 만나는 길이었다. 대문 앞에 서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봐라, 이렇게 돌아서도 집에 올 수 있지?”

대학생이 되어 나는 그 길을 혼자서 한번 걸어본 적이 있는데,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보다 길은 음침했고, 골목은 어두웠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뭇잎의 잎맥을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고 있는 길들의 도시를 떠나 서울에서 시작된 거대한 아파트 숲의 생활은 마음 붙일 만한 길을 찾기 쉽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233동 505호까지 걷는 빤한 길엔 지치고 피곤한 소시민의 구두 뒤축 소리만 무성했다. 이어 시작된 신혼집이 있던 사당동과 방배동에서도 나는 끝내 나의 길을 찾지 못하고 두고 온 도시의 선명한 길들을 자주 떠올렸다.

떠나온 도시가 2시간 40분 고속버스를 타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거리에서 12시간 비행기로 날아야 갈 수 있는 거리로 멀어지자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그리움은 깊어졌다.


뉴욕 플러싱의 겨울은 오후 4시면 어두워졌다. 6시, 일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은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었다. 혹여 ‘마약을 하는 친구’를 만나면 어떤 거부도 하지 말고 그가 뒷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동료가 일러주었다. 마약이 고픈 사람들이라 5불만 손에 쥐면 바로 떨어져 상점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나는 돈의 액수에 비례해 내게서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청바지 뒷주머니 양쪽에 20불씩 넣고 길을 나섰다. 체리 에비뉴의 할머니 댁에서 아이를 받으면 크고 단단한 누비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춥지 않도록 외투로 뒤집어씌웠다. 돈을 외투 주머니로 옮겨 넣고 프랭크린 에비뉴까지 15분쯤 걸리는 길을 걸어오자면 겨울에도 등에서 땀이 솟았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조도는 턱없이 낮아 길은 어둡고 지저분했으며 그 시간엔 걷는 사람도 드물었다. 간혹 아스팔트를 쪼갤 듯 큰 소리로 음악을 틀고 달리는 자동차가 지날 때면 아이도 나도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은 등에 뭔가를 짊어지고 바삐 걷는 동양 여자를 흘깃거렸지만 나는 아이를 품에 느낄 시간이 그때밖에 없어 유모차를 집에 두고 구태여 아이를 업고 다녔다. 집 근처 상점에 들르면 밝은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내 등의 외투 속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은 웃으며 물었다. “그게 뭐니?”라고. 그러면 나도 웃으며 외투를 벗기며 말했다. “내 딸.”이라고.

사 가지고 들어 온 식은 피자 한 쪽으로 저녁을 먹고 아이를 씻겨 자리에 누우면 종일 할머니와 신나게 논 아이는 순하게 잠이 들고, 종일 업무에 시달린 나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아도 쉬 잠들지 못했다. 그러면 마치 당연한 수순인 듯 서울의 길들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내가 별로 정도 붙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떠나오기 직전 동네의 허름한 길들이 먼저 떠올랐다. 입덧이 심해 엄마와 함께 손잡고 냉면을 먹으러 내려가던 언덕길, 리어카에서 푸르고 싱싱한 오이를 고르던 소란한 시장길, 늦은 밤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남편이 타고 올 버스를 기다리던 신작로길…. 꿈결도 아닌 생시에 두 눈을 뜨고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그 길들을 배회하고 방황했다. 심장을 떠난 혈액이 저 발끝의 모세혈관까지 돌아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듯 내가 기억 속의 길 구석구석까지 헤집고 돌아올 즈음엔 여지없이 베갯잇이 적시어 있었다.


남편이 다니던 학교가 있는 필라델피아 리누드가든으로 이사하자 시간이 많아졌다. 잃는 게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게 있다는 엄마 말씀이 옳았다. 직업을 잃은 나는 동시에 급여를 잃었지만 넉넉한 시간과 가난한 휴식을 얻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었고, 조금 후엔 동생을 얻었다. 늦잠을 잘 수도 있었고,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느긋하게 다람쥐 집을 찾으며 넓은 뜰을 산책할 수 있었다. 편한 아침,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가 구워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잠깐 부엌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신기하게 딱 두 번 방문했던 플러싱의 구두 수선가게가 떠올랐다.

집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던 길가 구두 수선집은 낡은 간판에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진열대를 가지고 있었다. 딱히 진열된 구두가 없어 나는 그냥 지나칠 뻔했다. 가게 안의 사내가 입고 있던 스웨터 색이 내 시선을 붙잡았는데, 보니 사내는 구두를 손질하고 있었다. 사내는 내 부친이 가장 좋아하는 코발트블루 빛깔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가게의 모습처럼 적당히 색이 바랜 낡은 스웨터는 중년의 수선공과 함께 가게의 정물인 듯 잘 어울렸다.

대학교 4학년 때 쌀 한 가마니 돈을 지불하고 명동 구둣방에서 산 자줏빛 롱부츠를 꺼내 놓자 수선공은 구두 가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Lovely burgundy!(아름다운 자줏빛!)’라고 혼잣말을 했다. 나는 통으로 된 가죽을 길게 잘라 자크를 달아줄 수 있겠는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내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을 매료시킨 붉은 대추 열매 빛깔의 긴 가죽 구두가 어느 나라 제품인지 더 궁금한 것 같았다. 수선공의 거친 크래커 같은 발음에 당신도 먼 나라에서 왔는가, 하고 묻자 그는 잠깐 시선을 진열장 밖 하늘로 돌리며 ‘내 그리운(nostalgic) 고향은 모스크바’라고 대답했다.

노스탤직…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현관 계단에 앉아 다람쥐가 오기를 기다리며, 달려온 다람쥐가 아이가 밤나무 밑에 갖다 놓은 땅콩을 양 볼에 쟁이는 것을 바라보며, 빠른 손놀림과 풍선처럼 부풀어가는 다람쥐의 볼을 조마조마 지켜보며 나는 모스크바, 노스탤직, 노스탤지어, 서울, 코리아… 같은 단어를 조용히 발음해 보곤 했다.

다음 과정이 바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조금 일찍 끝낸 학위는 미국 내에서 우리의 신분을 위협했다. 그 와중에 둘째가 태어났고, 결국 우리 가족은 예정에 없던 보스턴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필라델피아에서 8시간,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차창 밖으로 자주 보이는 침엽수를 바라보며 마음도 침엽수잎처럼 날카로워져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학위를 다 마치고 돌아갈 수는 있을까?

계획에서 벗어난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초조함이 스멀스멀 마음에서 피어오를 때 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봐라, 이렇게 돌아서도 집에 올 수 있지?

긴 주행에 간간이 눈을 뜨는 아이를 다독이며 나도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조금 돌아가는 걸 거야. 나중에 가보니 그렇게 먼 길도 아니었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 고향을 떠나 유리하던(잠 27:8)’ 우리 가족은 8년 4개월, 긴 유랑의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G시에 정착했다. 비록 집이 작아 상자의 짐을 다 풀지 못하고, 작은 방에서 아이들은 부대꼈지만 G시는 곳곳에 아름다운 길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아장아장 걷는 막내를 데리고 도서관이 있는 중앙공원 길을 날마다 걸었다. 작은 분수를 지나고 플라타너스가 내어주는 그늘을 따라 도서관에 들러 수족관의 물고기와 인사하고 공원 끝의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고 돌아오는 그 길을 아이도 무척 좋아했다. 아파트 뒤편으론 커다란 호수가 있는 대공원 길이 열리는데, 공원 안의 넓은 광장길은 언제 걸어도 매혹적이었다. 하얀 종이처럼 펼쳐진 광장에 하늘 끝에서부터 습자지에 스미듯 연보랏빛 놀이 고요히 번지는 그 일몰의 시간이 특히 좋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도 광장의 나무 한 그루인 듯 그 노을에 젖어 들자면 공원 숲 언저리에 푸른 이내가 피어오르고 하늘엔 은빛 물고기 같은 비행기가 동체를 반짝이며 떠갔다. 그 무렵 내가 쓴 소설들은 거의 다 그 길 위에서 만들어졌고, 길 위의 풍경들이 묘사되었다. 슈퍼마켓을 가는 일상의 길조차 다감하여 나도 아이들도 떠나온 직전 도시에서 그리도 좋아했던 염소길과 당나귀길, 수영장을 나와 자전거로 달리던 아우데스트라트를 더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날마다 운중천길을 걷는다. 가족이 일터로 나가면 나도 아파트 문을 나선다. 바로 내려가지 않고 조금 돌아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산길엔 이 지역을 밀어버리고 거대한 아파트를 짓기 전부터 자리하고 있었을 오랜 수령의 소나무와 벚나무가 있다. 신도시 개발로 건너편 나무들이 잘리고 실려 가는 광경을 목도하며 길 하나를 경계로 살아남은 나무들이다. 서러웠을 법도 한데 무심하게 봄마다 환한 꽃을 변함없이 내어준다.

신도시에 아파트가 당첨되었을 때 가장 크게 기쁨을 표현하신 분은 나의 아버지다. 엄마도 분명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워낙 말씀이 적으신 분이니 “저~엉말 잘 됐구나! 하나님이 주셨구나!” 그 정도 말씀이 기억난다. “와아!!”, “야아!!”를 연발하시며 만세 부르듯 크게 기뻐하셨던 아버지는 우리가 이 집에 이사하고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예정했던 집들이도 하지 못 했다. 결국, 아버지는 집 구경도 못 하고 떠나셨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부재를 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나의 발걸음을 운중천길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찬송가도 성경 낭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엔 이어폰을 빼면 운중천을 낮게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위안이 되어주었다. 이 새로운 도시에 아버지와 단 한 발짝도 함께 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 새삼 허전했다.

엄마를 집 옆으로 모시자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운중천길을 엄마와 함께 다닌 것이다. 남편을 여의고 4년을 홀로 지내시던 엄마가 안방에서 넘어지셔 척추가 골절되었다. 모든 치료를 다 받았지만 끝내 그 전으로 회복되지 못하셨다. 나는 우리 동네 아파트를 얻어 엄마를 모셔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동네를 산책했다. 운중천을 함께 보며 소풍처럼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저 노란 꽃이 너무 앙증맞구나!” 엄마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끼손톱보다 작은 노란 들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3년 반을 투병하신 엄마도 소천하셨다.

해오름교를 지나 운중천길로 내려간다. 길 곳곳에 엄마가 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인처럼 나도 바람 부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본다.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1)이 들리는 것도 같다. 이 아름다운 길을 얼마나 더 걷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나온 날 걸으며 사랑했던 길들이 한 길로 연결되며 언젠간 나도 본향길에 들어설 것임을 확신한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

<hkcho7739@naver.com>


1) 마종기의 시 ‘바람의 말’ 중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