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2020-10-10
월드뷰 OCTO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글/ 홍지수(번역가, 작가)
2015년 6월 16일,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TV 리얼리티 쇼 진행자로 유명한 69세 억만장자 도널드 J. 트럼프(Donald John Trump)는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Melania Trump) 여사와 나란히 맨해튼 트럼프타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무명보다는 악명이 낫다는 말도 있듯이 많은 사람은 그저 트럼프라는 브랜드 네임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쇼 정도로 생각했다.
그즈음 필자는 트럼프를 무자비하게 비판한 짤막한 책 번역 의뢰를 받았고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고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결국 미국에서 오래전부터 벌어져 온 현상들이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기 그 현상들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중산층을 위협하는 불법 이민
1980년대 중반 미국 정부가 불법 이민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만 명의 불법 체류자들을 사면한 이후로 이민법은 계속 느슨하게 해석되어왔고 불법 이민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원정출산 출생자를 시민으로 인정하면서 불법체류자에게서 태어난 수백만 명이 즉시 미국 시민이 되었고, 외국 국적자가 합법적으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으면 본국에서 직계가족이 아닌 친인척들을 초청 이민하도록 한 연쇄 이민제도도 불법 이민의 유인책으로 작용해 불법 이민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최근에 예일·MIT가 함께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불법 이민자의 수치는 2,200만 명에 육박한다.
공산주의를 탈출해 미국에 이민한 쿠바 이민 3세가 중산층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듯이 공화당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 불법 이민자들을 사면하면 자기들 표밭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은 값싼 저숙련 노동력을 대거 수입해야 한다는 기업들의 주장에 발목 잡혀 있었기 때문에 불법 이민 단속에 미온적이기도 했다.
한편 민주당은 불법 이민자와 그들의 미국출생 자녀를 사면하고 시민권을 부여하면 허술한 이민정책과 불법 이민자에게까지 복지지원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표밭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불법 이민의 절반은 멕시코에서 가장 빈곤한 최남단 지역 출신들로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영어를 구사하지도 못했으므로 중산층에 합류할 가능성보다는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넉넉한 지원과 보조금에 맛 들여 계속 민주당 지지자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불법 이민을 찬성하는 이들은 보통 멕시코 남부에서 막 이주한 이들과 이웃하고 살거나 불법 이민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자기 자녀를 보낼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회 기득권층이다. 그들은 경비가 철저한 고급 주택가에 살면서 인도주의, 노동력 충원이라는 명분으로 불법 이민을 받아들여 자기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수를 늘리고, 값싼 노동력으로 사업을 하고, 불법 이민자를 보모, 요리사, 정원사 등 일손으로 고용했고 뒷감당은 불법 이민자들과 이웃하고 사는 보통 국민이 해야 했다. 불법 이민은 미국 근로자들의 임금을 동결시키고 범죄를 폭등시키고 이민자를 동화시키는 용광로 기능을 훼손하고 국가안보를 위협한다.
가난한 이민자들을 중산층 유권자로 변신시킬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폐쇄하고 자격조건을 갖춘 다양하고 합법적인 이민을 받아들이는 방법뿐이다. 불법 이민은 유권자의 성향과 인구구조에 영향을 미칠 미국 선거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동시에 불법 이민은 미국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다. 왜냐하면, 미국은 여럿이 하나가 되는 용광로(melting pot)라는 전통적인 사고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여전히 서로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사고에 밀려나면 미국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중산층을 위협해온 세계화
2018년 7월,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전 국무장관은 미국 안팎에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는 트럼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해묵은 가식을 벗겨내는 그런 인물이다.” 즉, 트럼프는 73년째 계속된 냉전 시대 질서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등장해 오래전에 누군가가 나라 안팎을 상대로 해야 했을 일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좌우를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워진다는 허황된 믿음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 부유해지면 민주적으로 변모하고 그렇게 되면 세계가 평화로워질 것으로 기대했다. 따라서 미국 시장을 세계에 일방적으로 개방해, 세계 경제성장을 돕고 무역적자의 부담을 감당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법치를 토대로 한 무역체제를 구축하고,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하고 군사개입에 드는 비용을 대느라 연방정부의 부채가 늘어나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트럼프는 중국이 불공정 무역에서 이득을 보고 엄청난 무역 흑자를 올려도 정치적으로 자유화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봤다. 중국은 저작권법을 위반하고, 특허와 상표권을 침해하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 기업들에 기술 이전을 강요하고, 산업스파이 행위를 하고, 정부 보조금으로 생산된 중국 상품을 세계시장에 헐값으로 쏟아내는 불공정한 관행을 일삼았다. 이러한 편법으로 이룬 경제성장으로 중국은 정치적 자유화는커녕 한층 더 독재를 강화하고 첨단기술로 자국민을 감시하는 노력을 배가했다.
세계화가 진전되어 생산비가 저렴한 해외로 산업시설이 이전되면서 미국 제조업은 공동화되고 미국 중산층은 실질임금이 정체되고 일자리를 잃었다. 제조업이 떠나고 산업이 공동화된 내륙 심장부에서 백인 산업근로자 계층은 점점 약물에 중독되고, 자살과 범죄가 증가하고, 건강이 악화되고, 수명은 짧아졌으며 이혼과 가족 해체가 빈번해지고 출생률도 하락했다. 상당 기간 이러한 병리 현상은 국가적인 위기의식에 불을 지피지 못했지만, 트럼프가 등장해 세계화에서 이익을 보는 엘리트 계층들이 공정무역이 아니라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미국 산업근로자 계층에게 손해를 끼치고 미국의 국익을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군사외교 정책에서도 트럼프는 개입주의를 주장해온 외교정책 기득권층과 과거 세 차례 행정부와는 달리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양당 모두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반드시 할 필요도 없었던 전쟁을 하느라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비판했다. 해외 개입이 딱히 비도덕적이어서라기보다 개입해서 싸워줘도 도움을 받은 당사자들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미국인들에게 손해만 끼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트럼프는 미국이나 동맹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미국이 행동에 나선다는 “원칙 있는 현실주의(principled realism)”를 표방한다.
중산층의 부활을 내건 트럼프
양쪽 해안지역에 거주하는 고학력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은 부의 재분배와 정부 지원을 미끼로 소수인종과 빈곤층과 연대했고, 이 두 계층은 그 사이에 끼어 고군분투하는 내륙지방 거주자들에 대한 경멸을 공유했다. 바로 이 낀 계층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계층이다. 기득권층은 자유무역이 공정무역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고 기업들에 값싼 비숙련기술 노동력을 제공해주기 위해 불법 이민자 문제는 대체로 묵살했으며, 해외정세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정책은 세계를 이끄는 강대국으로서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여겼다. 어마어마한 연간 연방 예산 적자도 못 본척했다. 양쪽 해안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엘리트 계층의 정서와 관심사가 그 사이에 있는 지역들의 정서와 관심사보다 훨씬 중요했다. 마치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양쪽 해안지역 거주자들에게 우선으로 봉사하는 듯했다.
기득권층은 정부지원금이나 최저임금인상 등으로 몰락하는 중산층을 달래려 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정부의 지원 같은 진통제가 아니라 영혼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일자리였다. 좋은 일자리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독립적이고 행복하고 생산적으로 만든다. 일자리가 없으면 정부가 비대해지고 범죄가 늘어나고 가족이 해체된다. 일해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성실하게 일한 대가를 누려야 삶에 대해 자신감을 얻는다. 일자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좌우 기득권층 가운데는 중산층의 실업을 인명 손실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달랐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미국 내륙지역이 낡고 뒤처진 지역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계화에 편승하지 못한 게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고 한때 산업의 심장부였던 지역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부활할 태세가 되어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트럼프의 공약을 믿은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당선시켜 산업 심장부의 꺼져가는 불씨를 막판에 살리기로 했다.
트럼프를 혐오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2016년 미국 주류언론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하고,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에게 참패하고, 대통령 취임 후 초기에는 국정 수행에 실패한다고 예측했다. 모두 빗나갔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의 선거구호는 그동안 좌우 기득권층에게 외면당한 절반의 국민에게 비현실적인 장밋빛 낙관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병든 정신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비쳤다. 본래 위대한 국민이 정치인들을 잘못 만나 나라가 곤경에 빠졌는데, 이제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나고 추구하는 정책을 바꾸면 곤경에서 벗어나 예전의 위대함을 되찾는다는 뜻이었다.
공화당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싱크 탱크 ‘헤리티지재단’은 트럼프 행정부가 통치 1년 남짓한 시점에서 이미 334개 공약 가운데 3분의 2를 실행했다고 발표했다. 보수 진영이 숭배하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취임 후 같은 시점 공약 이행률이 겨우 49%이었다는 비교분석도 내놓았다. 이는 대단한 찬사다. 그리고 현재까지 트럼프는 바위처럼 단단한 지지층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주요 언론매체가 “가짜뉴스”를 보도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77%에 달했다. 미국 국민도 신뢰하지 않는 미국 주류언론들을 인용하며 미국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과시하는 한국의 좌우 사회지도층과 주류언론, 그리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국민 대부분은 트럼프를 “돈밖에 모르는 무식한 양아치 장사꾼”이라고 빈정거리면서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Joe Biden)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국에 유리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전 세계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국민은 뒷전인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난 미국 국민은 “미국 우선(America First)”을 내세운 트럼프를 뽑았다. 그리고 한국인의 희망사항은 미국 대선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트럼프가 재선될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한국의 사회지도층이라면 트럼프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 이 글은 북앤피플에서 2017년 출간한 홍지수의 저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와 곧 번역해서 출간될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의 저서 <The Case for Trump>(한국어 제목 미정, 2020년 베이직 북스(Basic Books)에서 출간)를 참고해 작성했다.
글 | 홍지수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석사,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 석사를 받았다. KBS 앵커, 미국 매사추세츠 주정부의 정보통신부 차장, 리인터내셔널 무역투자연구원 이사를 지냈다. <펜앤드마이크>, <미디어펜>, <뉴데일리>, <월간조선> 등에 칼럼을 썼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