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어디선가

누군가, 어디선가

2020-07-20 0 By worldview

월드뷰 07 JUL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소설가)


그 주일 아침 보스턴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내렸는지 길은 이미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고, 교회에 가기 위해 나설 때는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스턴 대학의 기숙사가 있는 세일럼에서 교회가 있는 퀸시까지는 자동차로 40분 거리다. 눈이 내리고 있어 더 일찍 집을 나섰다. 4살, 1살 두 딸을 뒷자리 카시트에 앉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필라델피아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던 남편이 보스턴으로 간다고 하자 보스턴에서는 차 없이 지내기 힘들 것이라며 한 친구가 자신이 타던 자동차를 선물로 주었다. 막 새 교회를 담임하게 된 친구는 교회에서 새 BMW를 제공하자 자신이 타던 자동차를 주저함 없이 넘겼다. 남편은 그냥 받기가 미안해 가지고 있던 주석 한 세트를 친구에서 선물로 주었다. 차는 마일리지 10만이 넘은 13년 된 쉐보레 8기통, 몸체가 길고 큰 차였다. 문제는 이 낡은 자동차가 미국 지도상으로 보면 새끼손톱만큼의 거리지만 자동차로는 10시간 거리인 필라델피아에서 보스턴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가였다. 친구는 게라지(garage)에 함께 가서 이 차가 보스턴까지 잘 갈 수 있을지 문의했다. 게라지의 기사는 몇 군데를 점검해주면서 차는 낡았지만 원래 튼튼한 차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송별회 자리에서 자동차 얘기가 나오자 그 자리에 함께 모인 친구들은 돌도 안 된 아기(당시 8개월 된 둘째)를 데리고 가다가 중간에 차가 서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이구동성 걱정했다. 그러자 두 달 전 필라델피아로 공부하기 위해 온 다른 친구가 자신이 우리 가족을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친구는 당시 가죽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새 포드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제안에 마침표라도 찍듯 같은 교회의 형제와 자매가 낡은 쉐보레 자동차는 자신들이 몰고 따라가겠다고 자청했다. 가다 차가 고장으로 서게 되면 버리고 자신들은 필라델피아로 되돌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낡은 쉐보레 자동차는 보스턴으로 와서 남편의 첫 번째 차로 우리 가족의 발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편이 자동차를 운전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서너 달, 눈길의 운전은 처음이었다. 자동차가 세일럼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차선은 눈에 덮여 사라져 보이지 않고 대신 눈길 위에 선명하게 차바퀴 길이 나 있었다. 그 길만 잘 따라가면 될 것 같았다. 차가 얼마쯤 달리자 자동차의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어오고 특히 발이 시렸다. 그 차는 여름에 에어컨이 잘 되지 않았는데 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앞 조수석에 앉은 나는 참고 참다 남편에게 말했다.

“발 시리지 않아요?”

“발 시리지? 보닛 열고 뭘 하나 만지면 히팅이 된다고 했어. 잠깐만 기다려봐.”

남편은 바로 도로 옆에 차를 주차했다. 보닛을 열고 무엇을 만졌는지 난방이 되기 시작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남편은 ‘거봐, 됐지?’ 하는 표정으로 만족해하며 다시 안전벨트를 메고 액셀을 밟았다. 그때!!! 차가 윙-하면서 빙글 돌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하나님!!!!” 하고 소리치며 몸을 돌려 뒷자리 딸들을 바라보았다. 차가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스케이트를 신은 듯 빙그르르 몇 바퀴를 돈 차가 쿨렁거리며 쌓인 눈을 넘더니 바퀴들이 낸 길로 들어서 앞으로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의 단말마 비명에 잠시 어리둥절 눈을 떴던 딸들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남편은 표정에 변화 없이 앞을 보고 운전하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앞에도 옆에도 다른 차들이 펄펄 내리는 눈길을 기어가듯 가고 있었다. 이렇게 긴 차가 돌면서 어떻게 다른 차들과 충돌하지 않았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차는 방금 무슨 일이 있기나 했었냐는 듯 시치미를 딱 떼고 고요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차가 빙그르르 돌던 조금 전의 상황이 재연되면서 옆 차들과 연거푸 꽝꽝 부딪치는 장면이 계속 연상되었다. 그렇게 접촉하고 부딪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가고 있는가. 좀체 진정되지 않는 가슴의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그때 벼락 치듯 떠오른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기도! 기도의 덕이구나!

새벽마다, 밤마다, 날마다 기도해주시는 분들! 그분들의 모습이 영화의 필름처럼 내 머릿속에서 차르르 돌아갔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다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날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그분들의 기도 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는 주행을 마치고 조용히 교회 주차장에 멎었다. 남편이 딸들을 품에 안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나는 내릴 수 없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오금이 저리다, 오금이 당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그때 경험했다. 결국 남편이 아기를 다시 내려놓고 내 무릎을 문질러 펴서야 다리가 펴져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피노키오처럼 걸어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접촉 사고도 없었지만, 그 일은 밤마다 잠자리에 누우면 생생하게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나중에 다시 그 길을 지나며 보니 자동차를 멈췄던 그 자리는 긴 다리 위였고, 다리 밑으론 몇 미터 낭떠러지였다. 다리 위라 더 빨리 노면이 얼었고, 눈길 운전에 서툰 남편은 평상시처럼 액셀을 힘주어 밟자 차가 스케이트를 신은 것처럼 빙글빙글 돈 것이다.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잠을 설치게 될 때마다 동시에 나는 기도해주시는 분들을 떠올렸다.


나의 친할머니는 매일 이백 명이 넘는 목사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신 할머니는 세수하시고 곱게 머리를 묶어 은비녀를 꼽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셨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목사님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그 이름은 할머니께서 평생 한 번이라도 만나신 목사님들의 성함이었다. 젊어 참석하셨던 부흥 집회 강사님이나 섬기시던 교회에서 1년, 2년 사역하고 떠나신 부목사님들까지 할머니의 기도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 할머니는 새벽 미명에, 점심 식사 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이름들을 다 외워 부르시면서 기도하셨다. 매일 세 번씩 호명되는 목사님은 누군가, 어디선가 당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계셨을까?

“할머니! 그렇게 많은 이름을 어떻게 다 외워요?”

“천하에 쉽지. 한 분 한 분 더해지니까.”

목사님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들의 목양을 위한 기도를 하신 다음에야 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 기도 내용은 그때그때 입시나 취업, 결혼 등 가족 구성원의 형편에 따라 달랐지만, 늘 한결같이 변함없는 내용도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유일한 아들, 나의 아버지와 세 손자가 ‘수석 장로가 되어서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부친은 겨우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할머니의 기도에 부응하셨다. 내가 결혼상대자로 할머니께 신학생을 인사시키자 당신의 평생 기도가 손녀에게 옮겨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할머니는 감격하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기도 명부에 남편의 이름이 올랐다. 결혼하고 유학길에 올랐기에 그 후로 몇 분이나 더 할머니의 기도 명부에 목사님의 이름이 올랐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말도 설고 물도 선 낯선 이국의 땅에서 9년을 지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났으나 너무 쉽게 어떤 일이 해결될 때마다 나는 먼저 할머니의 기도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누군가를 지명하며 기도하셨다면 K 선교사님은 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기도하셨다. 36년 전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은 강남 터미널 4층에 사업장을 가지고 계셨다. 어느 날 그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분은 4층까지 가는 동안 눈을 꼭 감고 계셨다.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아니, 기도…”

“무슨 기도요?”

“이곳을 오가는 모든 사람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터미널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그렇게 기도하게 돼.”

무심히 스쳐 지나는 수많은 사람을 위한 기도라니! 저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 어디선가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날의 일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나는 그 순간 내 맘대로 그분을 내 평생의 기도 동역자로 모셨다.

그렇게 시작된 기도의 동역은 한국의 권사님과 함께 좀 특별한 기도팀이 되었다. 내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 한 분은 미국에, 한 분은 한국에 계셨는데, 나는 위급하고 다급한 일이 생기면 국제전화를 걸어 함께 40일씩 금식 기도하기를 청했다. 각자 12시간 한 끼를 금식하면 셋이 합하여 넉넉히 하루를 금식하는 것이 되었다. 남편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중 위궤양에 걸렸던 일, 부심으로 논문을 평가해주어야 하는 네덜란드의 교수 한 분이 제때 읽어주지 않아 애를 태웠던 일 등이 기억난다. 대개 40일이 다 가기 전 기도는 응답받고 어려운 일은 해결되곤 했지만 우리는 40일을 채워 기도했고, 응답은 곧 우리의 간증이 되었다. 돌아보니 염치없게도 나는 너무 많은 기도의 빚을 졌다.

‘기도의 빚!’을 생각하니 가슴 뭉클하게 먼저 떠오르는 한 분이 있다.


어느 날 우리가 섬기던 보스턴 퀸시영생교회에 한국에서 목사님 한 분이 방문하셨다. 섬 선교를 하시는 분이셨다. 예배를 마치고 함께 식사할 때 그분이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K 목사님을 아세요? 동문이실 텐데요.”

K 목사님은 남편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강의시간에 앞뒤로 앉아 나와 함께 자주 담소를 나눈 사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근황을 물으니 K 목사님이 당신의 옆 섬, 우도에서 섬 선교를 하시는데 지금 너무나 힘든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힘든 가운데’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친한 사모님께 달러를 빌렸다.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간단히 편지를 써서 함께 넣었다.

“K 목사님께 꼭 좀 전해주세요.”


그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 구태여 보스턴을 거쳐야 했던 복잡했던 일들이 순탄하게 다 해결되고, 다음 박사과정이 잘 연결되어 네덜란드로 떠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몇 년 후,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어 중국에 갔을 때 우연히 K 목사님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지하교회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 K 목사님!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근거리에 있다고 해서 연락을 부탁하고, 우리는 허름한 찻집에서 잠깐 만났다. K 목사님은 만나자마자 그때 전해 받은 봉투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정말 죽고 싶어서 다 포기하고 그 섬으로 갔어요. 할머니 몇 분 남은 섬이었어요. 사역할 의욕도, 살고 싶은 의욕도 없이 지낼 때 그 봉투를 전해 받았어요. 본인들도 힘든데, 이걸 나한테 보냈다, 생각하니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매일 새벽 봉투를 앞에 놓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몇 달을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엘리야의 까마귀를 보내주시는구나,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신대원을 졸업하고 처음, 봉투로 연결되고도 20여 년 만에 만났지만, K 목사님의 신분상 우리는 함께 식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와 한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사실 그때 봉투를 드린 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과부의 두 렙돈 같은 헌금을 받아든 그는 가난한 유학생의 손을 빌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격하여 날마다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다. 보스턴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일은 너무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그토록 바라던 장학금이 연결되어 남편이 더는 번역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의 그 순탄함에 앞서 K 목사님은 새벽마다 눈물로 우리를 생각하며 기도하셨다는 것을 20년이 지나 알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한 번 더 K 목사님을 만나고 또 소식이 멀어졌다. 지금도 중국의 어느 지하교회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복음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현재 느닷없이 불어닥친 광풍 이는 고난의 바다를 지나고 있다. 우리가 당한 시험을 당신의 일처럼 아파하시는 나의 기도의 동역자들이 기도팀을 구성했다. 24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릴레이 기도를 이어가고, 미국, 독일, 브라질, 한국, 지구촌이 하나 되어 매일 밤 9시, 각자의 처소에서 연합예배를 드린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청라에 위치한 한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성도들이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하시는 현장을 보고 나는 놀라고 감격했다. 그리고 포기했다. 기도의 빚을 갚겠다는 생각을. 그 옛날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누군가 어디선가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많은 분이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안 순간 나는 인정했다. 결코 이 기도의 빚을 다 갚을 수 없음을. 그러므로 나도 그 누군가를 위해 어디선가 기도해주는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