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팔트 위에 앉은 어버이날
2020-07-17
월드뷰 07 JUL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3 |
글/ 이나무(카자흐스탄 선교사)
나는 시골 마산에서 살았다. 수출자유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누나들의 자취방 사이에 있는 조그만 교회당에서 신앙에 눈을 떴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시대, 아스팔트에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자유의 “이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가난한 교회당 긴 의자에 빼곡히 앉은 아이들은 동그란 눈을 뜨고 선생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 이야기,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진짜 “이념”이었다.
교회가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만, 이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이념이란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의 실재이며(플라톤), 사람이 인간, 자연, 사회 과정(Process)의 에고(ego)를 인식하는 정신적 실재(헤겔)이기 때문이다.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아도, 세상이 먼저 이념에 대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이념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보는 안경이다. (대체될 수 없는 세계관이다.)
이념은 존재에 대한 로고스(이야기)이다. 절대적인 개념이다. 진리를 추구하므로, 다른 절대적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왕좌의 게임처럼 도전하는 것은, 굴복시키거나 불처럼 소멸시킨다(고후 10:3-6, 히 12:25-29). 이념은 존재 이유와 신에 대해 알고 싶은 인간 이성의 종착역이며, 유일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믿음의 로고스(성경 이야기)는 이념이라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이념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 이념”이라 감히 부를 수 있다.
나는 S.F.C.를 통해 믿음을 고백했다. “다 함께 오른손을 들고 강령을 제창하겠습니다! 에쓰엡씨 강령!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중략)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웨스트민스트가 서부 총잡이들의 고향인지, 대소요리가 중국집 메뉴인지 뭔지 몰랐다. 그저 교회 다니는 시골 형, 누나들이 나쁜 짓 안 하고, 좀 더 착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까까머리 중학생은 자신이 죄인이고,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념”과 동떨어진 수출의 역군 누나들이 왜 하루뿐인 휴일과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며, 교회를 위해 바보같이 희생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세상 이념은 믿음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대립한다. 1949년 6월에 S.F.C.에서 발간한 <신앙운동(信仰運動)> 창간호에서 청년 홍반식(Ph.D 구약학)은 “이 강산 위에 예배하는 곳은 많으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을 만나기 어렵고, 외치는 자 많으나 진정한 복음을 듣기 어려운 때”라고 당돌하게 외쳤다. 지금 이런 청년들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위대한 S.F.C.정신이 다시 이어지길 소망한다. 잡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온다. 임원진에 회장, 부회장을 비롯해 ‘사상부장’이 있었다. 사상(이념)과 교회의 대립은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50주년 S.F.C.강령해설집을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개혁주의 신앙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재연하는 역사상의 애굽과 바벨론과 아랍과 로마와 나치와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 우리 앞에 재연하는 온갖 20세기 바알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중략) 기묘하게 뻗어가는 신근대주의(사신신학=의기신학=신정통주의=바르트신학)와 싸워 이겨야 한다. (중략) 이성을 왕으로 삼는 과학 지상주의와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한다. (중략)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이기는 길만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개혁주의 교회는 복음에 저항하는 이념과 싸움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이들이 묻는다. “사회주의 정책이 더 감동적이고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교회는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약자를 위한 사회정책이나 사회보장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념”과 싸우는 것이다. 건국 초기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보수 정당(한민당)을 이끈 기독교 지도자(장덕수)들은 오히려 사회주의 정책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토지개혁, 노동삼권, 기업이익분배 등). 그러나 사회주의 정치제도는 단호히 거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념”을 위해 무슨 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반기독교를 목표로 하는 반인륜의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것이, 영화 <국제시장 >에서 보았듯이, 북한에서 탈출한 350만 피난민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맺는다. 50년 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버이들이 돋보기와 지팡이를 의지하고 아스팔트에 앉았다. 그리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간절히 속삭인다. “얘들아… 무신론 이념은 무섭단다…. 지금, 이 유령과 싸우지 않으면, 언젠가 자유를 뺏기고 노예가 되고 말 거야!” 어떤 분들은 교회가 “이념”의 덫에 빠지지 말자고 한다. 그럼 집에 도둑에 들었는데, 그냥 두면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대구 동신교회 권성수 목사님의 말씀처럼, 지금은 이념의 시대이고, 이념과 싸우는 시대이다.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가 있다면,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진보(Darwinism)의 “이념”은 교회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교회는 비커에 담긴 개구리처럼 서서히 데워지고 있다. 사회주의와 결탁한 진보의 “이념”은,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뇌사 상태에 빠지게 할 것이다. 분명 위기이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신천지에 빠진 청년들을 보며, 반성과 더불어 희망을 보았다. 6개월이 넘는 교리과정과 꿈과 부모까지 포기하며 신천지에 빠져버린 청년들을 보면서, 이유가 궁금했다. “따뜻한 모임이 그리웠고, 성경을 깊이 가르쳐 주었어요!” 탈출한 이들의 고백이다.
사랑하는 교회에 당부하고 싶다. 사람 냄새나는 작은 모임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더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언컨택트(Uncontact) 시대가 열린다고 하지만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그만큼 더 커지지 않겠는가? 아울러 성가대가 동원되고, 준비가 많이 필요한 대형 예배보다, 시간과 형식을 간소화한 작은 예배들이 더 많이 자주 드려졌으면 좋겠다. 미숙해도 평신도에게 맡겨보자! 그럼 작은 교회도 많은 횟수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성례와 교육에 집중해서, 성도들을 강하게 훈련하자! 코로나19와 이념의 거센 도전 앞에서, 내 사랑하는 교회가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잡고 슬기롭게 응답하기를 기대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leejumin318@gmail.com>

글 | 이나무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8년 전 KPM(장로회고신)소속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파송되어 교회 개척과 이양을 앞두고 있다. 공산권 이슬람 사역지의 특성상 사회주의 철학과 무슬림 사상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