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페인의 타락과 두 자유 이야기

토마스 페인의 타락과 두 자유 이야기

2020-06-20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3


글/ 조평세(트루스포럼 연구위원)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미국 독립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1776년 쓴 팸플릿 <상식(Common Sense)>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퍼져 미국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고, 당시 일부 엘리트들에게 국한되었던 독립의 움직임을 전 미국 시민의 대중운동으로 번지게 했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아담스(John Adams)는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워싱턴의 칼은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흥미로운 것은 페인은 이후 프랑스에 건너가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그는, 훗날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회자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 전면 반박하는 <인권(Rights of Man)>을 펴내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급진주의 혁명가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인본주의 이신론 사상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를 써내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간과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페인이 미국에서 <상식>을 펴냈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이성의 시대>를 쓸 때까지 그의 논지에서 중대하고 본질적인 변화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글에서 뚜렷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당시 그가 겪었을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바탕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페인과 <상식>의 배경


토마스 페인은 영국에서 태어나 37세까지 코르셋 재단사, 선상 승무원, 학교 선생, 세금 징수원 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다소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퀘이커 교도 아버지와 성공회 소속 어머니를 두었지만 이 시기 그의 신앙이나 기독교적 가치관을 엿볼만한 눈에 띄는 기록은 없다. 20대 초반에 맞은 첫째 아내는 출산 중 사망했고 30대에 만난 아내와는 3년 만에 이혼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코르셋 제조업은 금방 부도가 났고 두 번째 아내의 집안으로부터 받은 담배 가게도 실패해 살림살이를 팔아 빚을 갚아야 했다. 세금 징수원으로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근무 태만 등으로 두 번이나 면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페인이 뛰어난 재능을 발견한 계기는 그가 세금 징수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글을 써서 배포했을 때다. 그의 탁월한 필력은 뛰어난 표현력과 깊은 호소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유능한 정치 선동가로서의 뛰어난 수사적 기질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글을 통해 얻은 유명세로 페인은 런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만나게 되고, 프랭클린의 추천으로 1774년 11월 미국으로 이민해 완전히 새로운 삶을 개척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다.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페인은 출판업자 로버트 에잇큰(Robert Aitken)이 막 발행을 시작한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고용되어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깊은 불만을 감지한 페인은, 이 잡지의 창간호부터 “이곳의 모든 심장과 손이 ‘미국 자유’를 위한 흥미로운 투쟁에 사로잡힌 듯하다.”라고 쓰며 독립혁명을 위한 열망에 부채질했다. 자연히 페인은 독립을 구상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인 미국의 독립혁명가들과 두루 어울린다. 이런 배경에서 쓰게 된 팸플릿이 바로 <상식>이다.

여러 추정치가 있지만, 1776년 1월 출간된 <상식>은 그해에만 대략 50만부가 팔려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미국 13개 식민주의 인구가 250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판매실적이 아닐 수 없다.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선술집이나 공연장에서 <상식>의 내용이 낭독되었으니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페인의 글을 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가히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미국인들의 가슴을 독립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했다.

페인의 ‘상식’.

중요한 사실은, 바로 <상식>이 미국인들에게 하나의 설교처럼 다가올 정도로 그 속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게 배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상식>에서 미국의 독립 명분을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설파했다. 대표적인 예로 페인은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삿 8:23).”는 구절과 마태복음 22장 21절 등을 인용하며, 왕권신수설을 전면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 외에 누구도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는 성경적 개혁주의 가치관을 내세웠다. 또한 사무엘상 8장을 통해 ‘왕을 세우고 다스리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5~7절)이며, 창조주가 각자에게 부여한 권리를 저버리는 것임을 호소했다.

비록 퀘이커교도의 아들이었지만 신앙이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페인이, 미국에 도착한 지 불과 14개월 만에 이처럼 성경적 가치관에 충실한 논조를 통해 성경과 친밀했던 미국인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정신과 의사이며 대표적인 미국 국부였던 벤저민 러쉬(Benjamin Rush)의 긴밀한 도움이 있었다. 러쉬는 <상식>이라는 팸플릿의 제목을 정해줬을 뿐 아니라 그 내용과 논조에 크게 기여했다.

언어 자체를 비롯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성경적 개혁주의 세계관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던 당시 미국인들에게 기독교 가치관으로 정치적 수사를 풀어내는 접근은 필수적이었다. 페인의 <상식>이 미국인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었던 이유도 사실 여기 있다. 정치적 선동의 직관과 기질이 뛰어났던 페인은, 러쉬 등의 도움을 통해 성경적 세계관이 깊게 뿌리내려 있었던 미국인 특유의 정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효과적으로 독립혁명의 정치적 명분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페인의 선동가적 기질과 필력이 당대 최고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결국 <상식>의 진정한 가치와 그 위대함은, 페인 본인에 기인하기보다, 미국 독자들의 수준 높은 ‘성경적 문해율(biblical literacy)’과 기독교적 ‘상식(common sense)’이 이끌어낸 결과이다.

엘리아스 부디노의 ‘계시의 시대’.


탈기독교와 <이성의 시대>


페인은 이후 교량 설계에 재능을 발견하고, 1787년에 이를 위한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미국에서 시작된 혁명의 바람이 본국 영국과 유럽에까지 번지는 것을 예감하고 내심 자신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상식>에서 설파했던 자유의 원칙은 다름 아닌 인류 보편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본능적으로 끌려 들어간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의 <성찰>(1790)에 반박하는 형식으로 <인권>(1791, 1792)을 펴내면서 그의 정치 선동가적 재능을 다시금 발휘하게 된다. 이후 10년 동안 버크의 <성찰>이 3만 부 팔린 것에 반해 <인권>은 거의 백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비록 혁명의 바람은 영국 해협을 넘지 못했지만 페인이 느꼈을 성취감과 존재감을 가늠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적 가치관이 문화적 바탕을 이루었던 미국과 달리 유럽의 사회문화적 풍토는 지극히 세속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과 교회가 결탁해 여전히 강력한 정부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개개인이 신앙을 풍성히 누리는 진정한 개혁주의 세계관이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었다는 사실과, 또한 계몽시대를 거치며 유럽의 지적 풍토를 설정한 루소(Rousseau)와 볼테르(Voltaire)같은 인본주의 철학자들의 깊은 영향력에 기인한다.

페인의 <인권>을 보면 미국에서 썼던 <상식>과 달리 이러한 세속적 바탕에 충실한 논조를 펴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선 짧은 팸플릿이 아니라 9만 단어에 달하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에서처럼 성경 인용이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하나님(“God”)이라는 표현은 단 11번 등장할 뿐이다. 또한 인간 권리의 원천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명시하기보다 ‘자연’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상식>과 대조적인 그의 ‘탈기독교’는, 이후 세 번에 걸쳐 써낸 <이성의 시대>(1794, 1795, 1807)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페인은 이제 신은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인간사회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제도와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배교’를 범한다. <이성의 시대>의 도입부에서 페인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글을 시작한다. “나의 생각(mind)이 곧 나의 교회다.”

사실상 페인은 아예 <이성의 시대>에서 탈기독교를 넘어 반(反)기독교적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에게 성경과 교회는 ‘사람의 발명’일 뿐이었고 오로지 ‘자연세계’만이 신의 발명으로써 인간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까지 발명된 모든 종교 체계 중에서 기독교라고 일컫는 것보다 전능하신 신을 더 경멸하고, 인간에게 더 볼썽사납고, 이성에 더 혐오감을 안기고, 더 자기모순적인 것은 없다.” 결국 정부의 목적은 신의 자리를 탐하는 ‘바벨탑’이었고, 그것은 그가 과거 <상식>에 썼던 미국의 독립정신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그리고 페인 개인에게는 “너희가 신과 같이 되어(창 3:5)” 죽지 않을 것이라는 뱀의 속삭임을 덥석 물어버린 ‘타락’이었다.

실제로 <이성의 시대>는 미국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실망감과 배신감을 일으켰다. 위그노(Huguenot) 가정의 후손으로 미국 대륙회의의 의장을 역임한 미국 국부(國父) 엘리아스 부디노(Elias Boudinot)는 <이성의 시대>의 이신론을 격렬히 반박하는 <계시의 시대>(The Age of Revelation)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독립운동 시기 페인과 가까웠던 조지 워싱턴 대통령도 그의 고별연설에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페인의 사상을 “비애국적, 파괴적”이라고 비판했다. 1809년 6월 페인의 장례식에는 불과 6명만 찾아왔다고 한다.

교회를 ‘이성의 신전’으로 둔갑시킨 프랑스혁명.


충돌하는 두 ‘자유’


사실 1776년의 미국 혁명이나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둘 다 군주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미국인들은 영국의 왕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프랑스인들도 자국의 군주와 귀족 그리고 권력과 결탁한 교회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다.

하지만 이 두 ‘자유’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1776년의 자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1789년의 자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대적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건국은 정부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켜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전하는 사건이었던 반면, 프랑스 혁명은 교회를 불태우거나 ‘이성의 신전’으로 탈바꿈해 인간 이성을 숭배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적 사건이었다. 구글에 ‘기독교 청산’(de-Christianization)을 검색하면 프랑스 혁명이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이유다.

이 두 자유의 결과 또한 극명히 갈린다. 미국의 독립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이자 가장 온전한 국가 기초문서인 미국 헌법을 탄생시켰고, 이를 통해 100년 내에 자국의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반면 프랑스혁명은 이후 수 년 동안 이어진 군중의 광기와 공포정치(Reign of Terror)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살육했고 나폴레옹이라는 또 다른 폭정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초래했다.

미국이 노예를 해방시킬 즈음, 유럽에서는 머지않아 인류의 절반을 노예화하고 1억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게 될 마르크스주의가 탄생한다. 지금도 여전히 네오막시즘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처럼 기독교와 교회를 말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페인은 그의 펜으로 두 혁명 모두의 불을 타오르게 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교회가 살아 숨 쉬었던 미국에서의 <상식>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며 사람을 살리는 자유를 낳았고, 교회가 생명력을 잃었던 유럽에서는 사람을 중심에 두었음에도 사람을 죽이는 자유를 낳았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창조질서(창 1:27)’에 입각한 1776년의 정신과 ‘하나님이 없다(시 14:1)’ 하는 1789년의 정신이 격돌하고 있다.

<pyungse.cho@gmail.com>


참고문헌

John McManners(1969),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Church, Greenwood Press.
Robert Middlekauff(1982), The Glorious Cause: The American Revolution, 1763-1789, Oxford University Press.
유벌 레빈(2016), <에드먼드 버크와 토마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보수와 진보의 탄생>, 에코리브르.


글 | 조평세

영국 킹스컬리지런던(KCL)에서 종교학과 전쟁학을 공부하고 고려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트루스포럼 연구위원으로 미국에 거주하며 보수주의 블로그 <사미즈닷코리아>(SamizdatKorea.org)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