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춘천전투의 기적
2020-06-10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글/ 나종남(육군사관학교 교수, 육군 대령)
인류의 전쟁사에서 진정으로 기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전투는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전쟁에서는 예상을 뒤집는 결과가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적의 예를 들면,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전면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이 가까스로 섬멸적 패배를 모면하였던 ‘마른강의 기적(the miracle of the Marne)’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궁지에 몰린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연합군 병력이 구사일생으로 철수에 성공한 ‘던커크 철수작전(the miracle of Dunkirk)’ 등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6·25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 장병과 춘천 시민이 함께 이뤄낸 춘천전투의 승리는 애초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1. 배경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 협의하여 “전면공격으로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한다.”는 전략 하에 북한 주재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선제타격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1단계 작전은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1군단이 금천-구화리, 연천-철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압박하고, 조공부대인 북한군 제2군단이 화천-양구에서 서울 동측방과 수원 방향으로 우회하여 포위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원주-삼척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2단계와 제3단계 작전은 제1단계 작전에 이은 연속작전으로 전과확대에 중점을 두었다.
북한이 남침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면서 준비된 작전계획에 따라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국군은 빈약한 무기와 장비, 훈련 부족 등으로 인해 유사시 전력을 집중적으로 운용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25전쟁 직전 국군이 보유한 병력은 북한군에 비해 현격하게 열세였다. 특히 전방 방어지역에서의 국군 방어부대와 북한군의 38도선 전개부대만을 비교했을 때 그 격차는 더욱 컸다. 더욱이 전쟁 발발 당시 국군 38도선 경계부대의 전체 병력 중 약 1/3이 외출했기 때문에 실제 병력 비율은 훨씬 격차가 심했다. 또한 무기와 장비의 전력 격차는 병력의 격차보다 더욱 컸다. 한편 북한군의 무기와 장비는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신형장비로서 전투 예비량까지 확보된 상태였으나, 국군이 보유한 무기와 장비는 대부분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노후장비였으며, 그마저도 수리부품 부족으로 인해 병기장비의 15%가 작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이라는 제1단계 작전목표 하에 북한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협조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기습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투력으로 국군의 38도선 방어진지를 곳곳에서 돌파하였다.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국군은 옹진, 개성-문산, 동두천-포천, 춘천-홍천, 강릉 지역에서 결사적인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북한군보다 현격히 열세하였던 국군은 6월 26일 서부전선의 주저항선인 파주와 의정부 지역이 적에게 돌파당하고, 이어 6월 27일에는 창동방어선이, 그리고 6월 28일 새벽에는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저항선인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전 전선이 붕괴될 위기에서 중부의 제6사단과 동부의 제8사단이 하천선을 이용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국군은 전선 붕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춘천 지역의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조공부대인 제2군단의 공격을 3일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서울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는 북한군의 공격계획과 의도에 차질을 가져왔다. 춘천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적의 공격을 저지함에 따라 서부전선의 국군은 가까스로 한강방어선을 형성하여 6일간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고, 유엔군이 증원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춘천전투의 기적
춘천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춘천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기습 공격을 받고 3일간 춘천을 사수한 방어 전투였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국군 제6사단 정면의 북한군은 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고속기동부대를 수원 이남으로 우회시켜 국군의 퇴로 및 병력증원을 차단한다는 계획 하에 제2군단을 투입하였다. 화천-춘천 축선에는 북한군 제2사단이, 인제-홍천 축선에는 제12사단과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연대가 투입되었으며, 제5사단이 후속부대로 활용되었다. 이 지역에서 북한군 공격부대의 전투력은 국군보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 면에서 10배 우세하였다.
춘천의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 화천-춘천 방면과 양구-춘천 방면에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였다. 반면 춘천을 공격한 북한군 제2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투입해 공격하였다. 하지만 6월 25일에 주요 도로에 SU-76 자주포를 대거 투입하여 소양강을 조기에 도하하고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국군 제6사단의 대전차 부대원들이 적 선두의 자주포를 파괴하였고, 제16포병대대는 정확한 포격으로 소양강 북방 우두평야 일대를 무방비로 진격하던 적 보병부대를 무차별하게 타격하였다. 예상치 못한 아군의 반격에 직면한 북한군 제2사단은 부랴부랴 병력을 후방으로 철수한 뒤, 그날 야간에야 비로소 소양강 북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6월 26일에는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 주력을 배치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특히 적이 소양강교를 통해 주력 자주포 부대를 투입하려 하였는데, 이때 심일 중위는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부하들을 지휘하여 적 기갑부대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더불어 국군 제16포병대대는 소양강 북방에 도달한 적 병력을 섬멸적 타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적은 6월 26일에도 소양강 도하에 실패하였고, 6월 27일 오후에야 비로소 춘천 시가지에 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서울에 적이 침입하였으나, 춘천 정면에서는 국군 제6사단의 강력한 방어선이 여전히 적의 진출을 통제하고 있었다.
3. 기적이라고 분석하는 이유
춘천 정면에서 예상치 못한 국군 제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 작전은 사실상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이유를 분석하면 먼저,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한 지휘관과 참모들의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거둔 승리였다. 국군 제6사단은 철저한 전투준비와 공세적인 방어, 지형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방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사단 자체 수색정찰대를 운용하여 적의 공격징후를 미리 탐지하였고,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을 자제하고, 보병 및 포병 진지를 사전에 구축하는 등의 실질적인 대비를 하였다. 그리고 주요 작전 지형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한 포병 화력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였고,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한 노력의 결과였다.
둘째, 심일 중위를 포함한 소부대 지휘자와 전투원의 용맹함이 가져온 결과였다. 특히 적의 주력 장갑차의 진격을 우두평야 북방 옥산포와 소양강에서 저지한 대전차포 소대의 전과가 매우 중요했다. 개전 첫날에 심일 중위가 지휘하는 7연대 대전차포 소대는 소양강 북방 옥산포 일대에서 적 선두의 SU-76 자주포 3대를 파괴하였고, 6월 26일에는 소양교에서 적 SU-76 자주포 3대를 파괴함으로써 적의 소양강 도하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적 자주포의 진격을 저지한 심일 중위에게는 대한민국 정부가 태극무공훈장을, 미국 육군은 은성 무공훈장(the Silver Star)을 수여하였다. 대전차포 소대가 분전한 결과, 안전이 확보된 국군 제16포병대대는 효율적 화력운용으로 우두평야와 소양강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저지 및 제압하는 데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군 제6사단 장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춘천 시민들의 헌신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춘천전투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전 초기 춘천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춘천 시민들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국군과 경찰의 방어 작전에 크기 기여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초부터 적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여러 곳에 참호와 교통호, 벙커 등 방어시설을 건설해야 했는데, 춘천 시민의 도움을 받아 적의 주요 예상 접근로에 참호와 벙커, 교통호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전 당일에 춘천 시민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일은 소양강 북방에 위치한 국군 제16포병대대의 탄약고에서 탄약 5,000여발을 소양강 남쪽으로 안전하게 운반한 일이다. 적에게 기습을 받아 전투 중인 국군 포병부대가 탄약고의 예비탄약을 후방으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만약 적에게 밀린 아군이 소양강 남쪽으로 후퇴할 경우 아군의 예비탄약은 고스란히 적에게 넘어갈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때 인근 잠사공장에서 근무하던 여직공들과 춘천농업학교 및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이 탄약이동 작업을 수행하던 국군 장병을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위험천만한 전쟁 상황에서도 용감한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적절한 도움 덕택으로 소양강 북방의 아군 탄약고에 적재되었던 예비탄약은 안전하게 소양강 남안으로 옮겨졌으며, 이로 인해서 국군 제7연대가 춘천을 향해 진격하던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아군에 대한 효과적 포병지원이 가능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 방면에서의 공격 차질로 인해 주어진 조공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적은 춘천과 홍천 방면으로의 진출이 애초의 계획보다 5일이나 지연되었다. 이로 인해 제2군단장과 제2사단장이 경질되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월 28일 새벽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함락됨에 따라 전선의 균형이 붕괴되었고, 또한 국군의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해 춘천 방어선도 포기하기로 함에 따라 국군 제6사단은 홍천 방면으로 철수하였으며, 이로써 약 3일에 걸쳐 진행된 춘천전투가 종결되었다.
4. 맺음말
국군 제6사단의 중동부지역 작전은 개전 초기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을 극복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 지연함으로써 수원 방면으로 우회하여 서울 지역에 투입된 국군의 퇴로와 증원 병력을 차단하려던 북한군 제2군단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또한 한강 이북에 집중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하여 한강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하였다. 춘천에서 국군 장병과 위대한 춘천 시민이 이뤄낸 기적에 가까운 승리로 인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냉전 초기에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섰던 자유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najongnam@gmail.com>
글 | 나종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역 육군 대령이다. 미국 Univ.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역사학과에서 전쟁사를 공부한 뒤, 2006년 이후 육사 군사사학과에서 전쟁사, 군사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