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이 시대의 선악과
2020-05-10
월드뷰 05 MA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
글/ 전혜성(행복한다음세대연구소 대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9명의 재판관 중 2명 ‘합헌’, 3명 ‘단순위헌’, 4명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회는 올해 말인 12월 31일까지 법 개정을 앞두고 있다. 1953년 제정된 이래 66년간 이어져 온 낙태죄 논란에서 태아의 독자적인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두고 한국의 여성단체연합은 여성 인권에 대한 수많은 여성의 노력과 연대가 이루어낸 성과라며 ‘낙태죄 폐지를 이끈 모든 여성들’을 ‘올해의 여성상’에 선정하기도 했다.
그동안 낙태에 대해서 생명윤리적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태아의 생명권에 절대적 가치를 두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해왔다. 오늘 우리는 낙태를 성윤리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요즘 성윤리라는 단어는 쓰임을 다한 박물관의 전시품 같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10대 청소년들이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이라며 섹스할 권리를 요구하고,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중학생들이 피임을 위한 콘돔 사용법을 배우는 현실에서 ‘성’은 어느덧 일상적인 것, 즐기는 것으로 소비되기 바쁘다.
68혁명과 성윤리
1968년 “금지된 모든 것을 금지하라!”라는 슬로건과 함께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은 전통적 가치체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윤리 파괴운동이 만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서구문명의 근간인 기독교적 권위와 규범으로부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수많은 혁명가,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와 엘리트들의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작업이 68혁명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먹혀들기 시작했다.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각종 미디어를 타고 억눌렸던 본능을 발견한 새로운 성적 계몽주의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며 성의 해방을 만끽하도록 부추겼다. 성은 도덕과 윤리의 궤도를 이탈하여 소비와 오락, 취향의 궤도로 옮겨갔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음란이 합법이 되는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타락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성도덕의 해체는 가정의 해체로, 사회의 해체로 이어진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남녀의 혼인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가족 관계는 사회를 이루는 근간이 되어왔다. 십계명에서 3개의 계명이 결혼과 가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부와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한 것이고, 인류 문명이 이 창조 질서 위에서 번성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문명의 발전 속에서 자라난 현대인들이 부부와 가정을 통한 번성을 거부한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시 73:6).”
낙태를 부추기는 세상, 프로초이스(pro-choice)
고대로부터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임신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실상 낙태는 광범위하게 행해져 왔다. 엘리트 계층의 선택적 생식을 제시했던 플라톤과 인구 조절을 위한 산아 제한을 얘기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계급투쟁을 통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을 남성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자 출산 대신 생산현장으로 내몰았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혁명을 이끌었던 라이히(Wilhelm Reich)와 성과학의 아버지 킨제이(Alfred Charles Kinsey)를 거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물꼬를 터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낙태는 이 모든 혁명가들이 쟁취하고자 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에서 해방되어야 여성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본질상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보편적 성윤리를 조롱하고, 낙태를 자기 권리로 삼으며, 전통적인 결혼 제도와 모성, 가족을 거부하고 직장으로 탈출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 성해방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성과 동등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기 위해서는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야만 한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피임과 낙태를 자기결정권으로 행사하고자 했다.
1969년 미국 댈러스에서 노마 맥코비(Norma McCorvey)라는 여성이 강간으로 인한 임신에 대해서 낙태수술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맥코비는 텍사스 주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197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맥코비에 대한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동시에 여성은 임신 후 6개월까지 임신중절을 선택할 헌법상의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한 이 유명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로 낙태를 금지, 제한하는 미국의 각 주와 연방의 법률들은 폐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판례로부터 낙태 가능 시점은 점점 늘어나 2019년 기준 워싱턴 DC를 비롯한 7개주에서 낙태에 대한 임신 기간 규정은 아예 삭제되었으며, 마침내 뉴욕 주에서는 출생 직전까지의 낙태를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낙태는 거대한 카르텔을 가지고 움직이는 비즈니스다. 미국 전역의 낙태와 피임 산업의 배후에 있는 ‘가족계획협회(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America)’와 우리나라의 ‘인구보건복지협회(Planned Population Federation of Korea)’를 비롯한 세계 180여 개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국제가족계획연맹(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이 있다. 이 단체는 피임과 불임시술, 낙태를 주로 기아에 허덕이는 빈곤국에 전파함으로써 ‘잘못된 사람들의 출산을 완벽하게 방지’하고 올바른 유형의 시민들에게만 출산을 허용하고자 했던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의 우생학적 소신의 결실이다. 여기에 유엔과 록펠러 재단, 빌 게이츠(Bill Gates)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등 세계적인 조력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불필요한 인구 과잉이야말로 지구 위기를 초래하는 골칫덩어리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질의 ‘생식보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한 사명을 위해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포장해왔다.
한편 많은 현대인들은 낙태에 관해서 매우 공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낙태는 수용 가능한 것이 된다. 태아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 즉 엄마, 아빠, 형제,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더 나은 삶,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수가 행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선택이 윤리적으로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 희생을 가장 작고 힘없는 태아에게 강요해왔고, 이 선택을 너무 쉽게 해왔다.
낙태와 싸우는 사람들, 프로라이프(pro-life)
태아를 온전한 인간으로 인식해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최근에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태아의 성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태아는 18일부터 심장이 뛰고 40일째 눈의 형태가 나타나며, 6주 때는 고통을 느낀다. 7주차에는 머리와 눈, 손 모양을 확인할 수 있으며, 8주에는 위액을 분비하고 손가락에 지문이 생긴다. 12주가 되면 잠을 자고 깨며 움직이고, 15주에는 소리에 반응을 하고 24주에는 발길질을 한다. 태아의 성장과정을 초음파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발의한 22주 낙태죄 폐지 법안은 심장이 뛰고 소리에 반응하고 운동하는 태아를 죽여도 될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임신 4-5주를 기준으로 낙태를 금지하는 ‘Heartbeat Bill’ 법안이 의결되고 있다. 2013년 노스다코타주, 2018년 아이오와주, 2019년 미시시피주, 켄터키주, 오하이오주, 테네시주, 조지아주에서 같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엄마에게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태아가 독립된 생명체라는 것은 태아의 염색체와 엄마의 염색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으로도 증명됐다. 또한 인간의 수정란은 인간의 고유한 염색체를 완벽하게 지니고 있다. 비록 작고 불분명한 형체이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완벽한 인간인 것이다. 식물의 씨앗을 보라! 그것은 좁쌀처럼, 깨알처럼 혹은 그보다도 훨씬 미약한 작은 솜털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충분한 양분이 부어질 때 자라서 그 씨앗 안에 이미 숨겨진 각각의 유전 형질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낙태에 대해서 끈질기게 싸워왔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성경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시 139:13).”로 가르치며 창세전에 우리를 계획하신 섭리를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존엄과 권리는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피부색, 인종, 성별, 출신, 사회적 지위, 부와 학식, 종교 같은 특징으로 누군가를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게 판단하지 않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한다. 또한 우리는 생명의 주권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태아는 태초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태아의 존재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태아는 모체인 엄마가 그렇듯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유일무이한 존재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우리는 성윤리가 실종된 시대에서 낙태를 성윤리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려했다. 2017년 의료계의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3천 건의 낙태가 이루어지며, 그중에서도 청소년 낙태가 심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인간을 성애화하는 조기성교육의 폐해이다. 성은 그것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필연적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쾌락을 위해 남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선용함으로 절제 있게, 책임감 있게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가 엄연한 독립된 생명체임을 부정하며, 자기 신체의 일부 혹은 더 나아가 세포 덩어리로 보아 그것을 마음대로 제거할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에 대한 선택권을 인간의 손에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실상 인권이 아니라 신권을 갖겠다는 셈이다.
태초에 하와에게 그러했듯이 오늘 여성들에게 뱀은 낙태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이 시대의 선악과를 들이민다. “네 몸이니 네가 선택해!” 이 거짓에 진리로 맞서길 바란다.
<happyngi@naver.com>
글 | 전혜성
서울대에서 불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총신대에서 선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결혼 후 15년간 평신도 청소년사역에 헌신 후 국제아프리카내지선교회(AIM) 이사 및 간사로 섬겼다. 다음세대의 올바른 성윤리를 세우기 위해 ‘행복한다음세대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