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기술된 6·25전쟁

교과서에 기술된 6·25전쟁

2020-06-02 1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2020년 6월 25일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일으킨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근 초·중·고 교과서에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는지, 이 전쟁이 갓 시작된 대한민국을 어떤 위기로 몰아넣었는지 등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교과서로 인해서 다음 세대의 주역인 젊은이들이 6·25전쟁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6월호 커버스토리는 그동안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많이 해 온 영산대 정경희 교수를 모시고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편향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정경희 교수는 <미국을 만든 사상들>, <토머스 제퍼슨>,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공저)>, <1948: 대한민국 건국이야기(공저)> 등을 저술했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에 국정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21대 총선에서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양일국 박사가 맡았습니다. 양일국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자유총연맹 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김주성 전 교원대 총장 등이 주관하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대안교과서 제작에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정경희 교수, 양일국 박사. (사진: 이청원)


양일국 : 교수님,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교수님은 교과서의 편향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많이 해 오셨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경희 : 저는 본래 ‘미국사’를 연구했습니다. 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했고, 석사·박사 학위 논문도 미국 역사에 관해 썼습니다. ‘미국사’를 30년 넘게 연구한 셈이지요. 그러다가 2012년에 저희 대학 은사께서 저에게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니까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사 교과서 분석 프로젝트를 2년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한국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이 마치 우리 민족의 정통한 국가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겁니다. 1948년에 남한과 북한에 하나씩,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성을 지닌 국가라고 믿고 있었는데 교과서를 열어보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정통성을 지닌 정부인 것처럼 쓰여 있었습니다. 또 교과서 서술 방식을 보니까 북한의 역사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 <현대조선력사>,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들을 살펴보니 우리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방식이 북한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습니다.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제시대’라고 배웠는데 요즘 교과서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아보려고 이기백 교수가 쓰신 <한국사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보았는데,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통사> 책에 보니,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일제강점기’, 그 이후를 ‘미제강점기’라고 표현하고 있더군요. 북한은 해방군인 소련군이 들어와서 자기네들은 해방이 되었지만 남한은 미제가 강점(强占)하고 있으니까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6·25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남한을 미제강점기로 인식하고 있는 세력들이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양일국 : 지금 대한민국의 상태를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프레이밍하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정경희 : ‘일제강점기’라는 용어 자체도 국제법 등을 근거로 정당한 용어인지 엄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인데, 그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 용어가 ‘미제강점기’를 전제로 하고 있고, 북한에서 사용한 용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 교과서를 쓴 사람들이 북한의 역사교과서를 보고, 용어까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일국 : 지난 박근혜 정부 때 이렇게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어서 이를 바로잡고자 국정화 시도를 했었지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가 교과서를 왜곡한다고 반발했었습니다. 당시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국정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참여하셨는데, 어느 부분을 주로 기술하셨는지요?

정경희 :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양 근대사 부분을 주로 기술했습니다. 제가 원래는 18세기 이후의 서양 근대사, 특히 서양 사상사를 전공했기 때문이지요.


양일국 : 그럼 이제 오늘의 주제인 6·25전쟁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  나눠보지요. 이번에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이라는 책의 공저자로 참여하셨습니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에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서술이 안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과 소련에 가서 지원을 요청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 교과서에는 어떻게 소개되어 있는지,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경희 : 우리 학생들 가운데, 6·25전쟁을 누가 있으켰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전범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좌파 역사학자의 학술서적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을 했다든가, 전쟁 통에 도망을 갔다든가 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런 겁니다. 북한의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이 함께 1949년 3월에 기차를 타고 소련 모스크바 역에서 내립니다.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으러 간 것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당시 동유럽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일성과 박헌영이 집요하게 찾아가 설득한 데다, 1949년 10월에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국제 정세가 바뀌자 스탈린은 비로소 남침을 허락합니다. 단, 남침했을 경우 북한군만으로 승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김일성에게 먼저 마오쩌둥을 찾아가 지원군에 대한 확답을 받으라는 조건을 내겁니다. 김일성은 시키는 대로 마오쩌둥을 찾아가 지원을 약속 받고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중공군의 개입을 1950년 10월로 알고 있지만 사료를 보면 팔로군 출신의 중공군이 이미 6·25전쟁 초반부터 전쟁에 참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을 일으킨 주범 김일성이 대한민국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빠져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전히 많은 국민이 ‘6.25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거나 혼용해 쓰고 있으나, 왜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고 ‘6.25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하는 정경희 교수. (사진 이청원)

양일국 : 심지어 젊은 학생들은 6·25전쟁을 남한에서 먼저 침공해서 남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도 제대로 안 가르친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6∙25사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6∙25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남조선인민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지요. 수정주의적 견해를 제시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고 ‘6.25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정경희 : 예전에 사용하던 ‘6·25사변’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상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이고 북한은 국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의 이천이백만 동포를 ‘북한 국민’이라고 부르지 않고, ‘북한 주민’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북한 주민은 헌법상 우리 국민인 것입니다. 헌법상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이기에 6·25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사변’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좌파 쪽에서는 이 용어를 집요하게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변’이 아니라 ‘전쟁’으로, 그것도 ‘한국전쟁’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6·25사변’을 ‘6·25전쟁’으로 바꾼 것은, 헌법과는 달리, 이미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좌파들은 나아가 ‘6·25전쟁’을 ‘한국전쟁’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좌파 학자들이 쓴 책은 하나같이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6·25전쟁’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6월 25일에 남침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과 국내의 좌파 학자들은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쟁 전부터 남한과 북한의 충돌은 자주 있었고, 어느 날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이므로 이것은 내전(內戰)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남침을 인정하게 되면 전쟁의 책임이 100% 북한에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충돌하다가 어느 날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하면 전쟁의 책임이 양쪽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50%만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죠. 이게 저들이 남침을 부정하는 까닭입니다.

양일국 : ‘남침 유도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북한은 전쟁을 할 의도가 없었는데 미국과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인데요. 북한을 추종하는 분들은 ‘무오류설’이라고 해서 북한 김씨 왕조는 절대 잘못하거나 실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침을 유도했다고 해서 남침을 하고 승리하지도 못하고 졌다면, 가장 중대한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요?

정경희 : 저들 말대로 우리가 남침을 유도했다면 서울이 어떻게 사흘 만에 점령됐겠습니까?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었어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장교클럽 개관식 파티가 있었습니다. 파티 후에도 2차를 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겁니다. 사병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침 6월이 모내기철이라 사병들을 모내기 도우라고 집으로 대거 휴가를 보내놓았습니다. 이런 것만 봐도 남한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침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일국 박사. (사진: 이청원)


양일국 : 2018년에 반미단체 관계자들이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한반도가 북한 주도로 통일될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 분들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바르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보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경희 :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했다는 것이 바로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낙동강 전선에서 밀려서 더 이상은 갈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오면서 우리는 이미 국토의 90%를 뺏긴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특단의 작전을 시도했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곳인데 물이 빠지면 상륙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타고 가서 수만 명의 군인들이 인천에 상륙을 해야 하는데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으로 매우 짧았습니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성공 확률이 1/500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천으로 상륙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밀고 나갔고, 실제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단숨에 바꿔놓은 겁니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맥아더 장군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사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6∙25전쟁을 매우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에 대한 폭격을 주장하고, 유엔군을 더 파병해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맥아더 장군에게 거리를 두기도 했습니다.

양일국 : 6∙25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 장군이 한강 전선을 시찰하다가 소년병 하나가 참호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통역병을 통해 소년병에게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당연히 소년병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소년병은 자신에게 총과 탄약을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내가 반드시 너를 도우러 돌아올 것”이라 약속했고 이것이 6·25의 판세를 뒤집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정말 영화 같은 일입니다.

정경희 : 맥아더 장군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도 유엔군을 파병하는 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양일국 : 건국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기와 같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소련, 중국, 북한의 공산세력은 대한민국을 무력 침공한 것인데, 이를 막아낸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한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 다리를 끊고 혼자 도망갔다는 등,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했다는 등 온갖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통일의 기회임을 포착하고 38선 돌파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시지요.

정경희 : 사실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갔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렇다면 9∙11 테러 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국가 원수의 역할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을 버리고 피난 갔다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이 전쟁 중에 중국 땅으로 도망친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국군이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김일성은 국군이 평양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평양을 버리고 평안북도 강계로 도망을 갔고, 나중에는 아예 중국 땅 퉁화(通化)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에 비해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한때 전세가 악화되자 미군에서 제주도로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가지 않았습니다.

정경희 교수. (사진: 이청원)


양일국 : 오늘날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막론하고 과도하게 중국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6∙25전쟁 당시 중국 공산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반도 전체가 자유진영이 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은 6∙25전쟁과 한반도 분단의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 교과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어 있는지 궁급합니다.

정경희 :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라는 지구상 최초의 공산국가가 생겨났습니다. 1919년에 소련의 레닌이 Communist International, 줄여서 Commintern(코민테른)이라는 국제공산당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공산주의자들도 소련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모셔왔으며, 심지어 그 가운데 일부는 소련을 자기 조국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고 이어서 소련이 붕괴됐습니다. 이후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국내 좌파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일부 수용해서 경제가 좀 발전하는 듯싶으니까 이제는 중국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받드는 겁니다.

하지만 좌파들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20세기에 공산주의를 70년 정도 했는데, 이 현실 공산주의 나라들이 망한 겁니다. 망하는 걸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당연히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사실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망하고 나자 좌파들은 공산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는 북한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북한은 2009년에 헌법을 개정해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회주의’로 다 바꾸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만든 한국사 교과서에도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써놓았습니다. 정치인 가운데는 ‘파리가 만 리를 갈 때 말 궁둥이에 딱 붙어서 가지, 혼자 날아가진 못한다.’면서 중국을 말, 우리나라는 말 궁둥이에 붙어 가는 파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친중 세력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1992년 이전에는 중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중공(中共)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공은 중국공산당의 약자입니다.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른 나라는 타이완입니다. 그러니 6∙25전쟁에 대해 서술할 때는 중공군의 개입이라고 써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는 중국군의 참전이라고 쓴 책도 있습니다. 중국군이 우리를 도와 ‘참전’했고 거꾸로 미군이 ‘개입’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거지요

양일국 : 소련이나 중국은 공산당이라는 소수의 귀족만을 위한 낙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분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공항 매점에서 유명 생수를 하나 사서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마중 나온 공산당 관계자가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생수는 믿을 수 없으니 버려라, 자신의 집에 가면 공산당 간부들에게 지급되는 진짜 생수가 있으니 그걸 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소수 공산당 간부들을 위한 식자재와 생필품을 별도의 공장 라인에서 만든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공산당 간부에게 제공하는 담배를 재배하는 밭은 따로 관리하고 해로운 농약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허가받지 않은 농약을 사용하다 걸리면 스파이법으로 처벌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중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런 중국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경희 : 최근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서문에 보니 조지 오웰이 1943년에 탈고를 하고 책을 출판하려고 했는데, 2년간 출판을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2년간 12개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했는데, 출판을 거절당한 이유가 책의 내용이 소련의 스탈린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지식인들의 좌편향이 최근에 생겨난 게 아니고, 소련이 생겨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양일국 :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북위 37도선 이남까지 밀렸습니다. 이때 많은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하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때 이미 한반도에서 체제 선택은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지요?

정경희 : 요즘 교과서에 실린 6∙25전쟁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너무 간단하게 실려 있어서 왜 6∙25전쟁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도 알기 힘듭니다. 2018년에 문재인 정부 교육과정이 나왔는데, 남침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남침에 대해 알리기 싫었던 거죠. 언론과 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남침이라는 구절을 넣었지만, 여전히 교과서에 실린 6∙25전쟁 관련 내용은 빈약합니다. 전쟁 중 피난민들이 남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보면 처절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옵니다. 제가 이번에 6∙25 책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유엔군이 국군과 함께 북진해서 올라갈 때 북한의 지형에 대해서 잘 몰라요. 8군단과 10군단이 동과 서로 나눠서 북진하는데, 낭림산맥이 사이에 있어 양쪽 군대가 북진을 하면 할수록 틈새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중공군이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하면서, 우리 측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거죠.

김일성은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바로 그날에 마오쩌둥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군대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써서 중공군을 불러들였지요. 이 편지가 6∙25전쟁이 사전에 준비된 전쟁이라는, 즉 남침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최대 300만 명으로 잡는 학자도 있습니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그 처절한 장진호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유엔군은 천신만고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영하 37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 개마고원 고토리라는 마을에 임시 텐트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눈 덮인 허허벌판에 수천 명의 피란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미군만 따라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북한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든 겁니다. 주변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개마고원 지대라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은 지역인데도 말입니다. 고토리에서 똑바로 내려가면 흥남입니다. 고토리에서부터 모여든 피난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그 숫자가 불어납니다. 퇴각하는 유엔군을 따라서 피난민도 남쪽으로 계속 내려온 셈이죠. 마침내 유엔군은 흥남에 모인 민간인 피난민도 군인과 마찬가지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2주에 걸쳐 100척이 넘는 배로 10만 명 가까운 민간인을 철수시켰습니다.

서쪽에서도 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옵니다. 평양에서는 남한으로 내려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 맞은 대동강 철교를 이틀 사이에 건넜다고 합니다. 사실 그 다리는 너무도 처참하게 부서져서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간 북한 공산정권에서 살며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집과 땅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에서 ‘원조 탈북자를 아시나요?’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 정도가 6∙25전쟁 중에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북한군과 어울려 중앙청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양일국 : 일전에 관객 수 천만 명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철수 장면이 생생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마치 미군은 북한 주민을 돕고자 할 의사가 없는데, 한국군 통역장교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피난민을 승선시킨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요?

정경희 : 영화에서 통역장교로 나오는 분이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 박사인데, 실제 인물입니다. 물론 이분의 간청도 민간인 철수에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12월 초부터 10군단 사령부에서 일본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하고 주고받은 전문에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유엔군을 따라온 피난민들을 대한민국으로 보내야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흥남에서 철수시킨 인원은, 군인이 10만 5천 명 정도이고 피난민이 9만 명 정도입니다. 군인과 피난민 약 20만 명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15일 동안, 전문(電文)을 보내서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배를 모으고 심지어 화물선까지 모아 100척이 넘는 배로 피난민들을 대한민국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이 적극적으로 피난민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배에 피난민들을 태우는 과정에서는 중공군의 포격으로부터 이들을 엄호하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피난민을 한 명이라도 더 배에 태우기 위해 화물을 배에서 내렸고, 나중에는 560만 톤에 달하는 군사장비, 기름, 화약 등이 흥남부두에 남겨지게 됩니다. 마지막엔 해병대가 흥남부두에 남겨둔 군사장비가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폭파시키고 철수했습니다. 좌파들은 이걸 가지고 마치 미군이 흥남을 일부러 폭파시킨 것처럼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양일국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Leonard RaLue) 선장이 후에 수도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정경희 :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민간인을 태우고 흥남을 떠난 가장 마지막 배였습니다. 12월 22일 흥남항에 들어갔죠. 미군 장교가 라루 선장에게 배에 몇 명을 태울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선장은 12명을 더 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군 장교가 피난민이 무척 많으니 최대한 많이 태워달라고 부탁을 하고, 라루 선장은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피난민을 배에 태우는 데만 13시간 40분이 걸렸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웠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총 1만 4천 명을 태웠습니다. 12월 23일 흥남을 떠나 항해를 시작한 배에서 라루 선장은 걱정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기 때문에 갑판을 빼곡히 채운 피난민들이 밤새 얼어 죽을까 봐 걱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배는 24일에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부산항에 피난민들이 너무 많아 내리지 못하고, 이튿날인 12월 25일, 배는 다시 거제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제도에 전원 무사히 도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라루 선장의 일기에는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시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에서 아기 다섯 명이 태어난 것이죠. 이 아이들의 이름을 선원들이 김치 1, 김치 2… 이렇게 붙여줬다고 하죠.

이런 일을 겪은 라루 선장이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훗날 라루 선장은 자신이 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한 계기를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해 크리스마스 한국 해안의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제게 옵니다.”

라루 선장은 1954년에 고향인 미국 뉴저지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마리너스’라는 이름으로 50년 가까이 수사 생활을 하셨는데, 2001년에 이분이 계신 수도원이 재정이 나빠져 문을 닫을 상황에 처합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부흥시켜 줄 후원자를 찾았는데, 마침 우리나라 경상북도 왜관 수도원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왜관 수도원이 라루 선장이 계시던 이 수도원을 인수하겠다는 계약서를 쓴 지 이틀 후, 오랫동안 투병 중이던 라루 선장은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왜관 수도원은 1949년에 원산에서 북한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수도사들이 세우셨다고 합니다.


양일국 : 이제 6∙25전쟁이 휴전상태로 들어간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는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국제법과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택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포로를 북한에 돌려보내고 휴전을 하려던 미국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것인데요. 끝까지 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회유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었습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는 과정도 궁금합니다.

정경희 : 미국은 6∙25전쟁에 참전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전쟁이 확대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이후에는 이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게다가 미국 내의 사정도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1952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에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코리아라는 나라로 떠난 내 아들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는 질문이 쏟아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쟁을 멈추기 위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하게 되면 미군이 바다 건너로 철수할 것인데 반해, 소련과 중국은 한반도와 붙어 있기에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습니다. 휴전협정이 맺어져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른바 반공포로들을 일거에 석방시키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휴전을 원하던 미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한미간에 군사동맹을 체결해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맺은 조약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흔히 ‘새우와 고래가 맺은 조약’이라고 불립니다. 어느 쪽이 새우고 어느 쪽이 고래인지는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실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조약으로 “우리의 후손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확고한 대북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치발전과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양일국 :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6∙25전쟁이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6∙25전쟁 하면 피해자 숫자, 파괴된 시설, 동족상잔의 비극이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의 잔재를 털어 버리고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합심하는 계기도 됐다고 봅니다. 내부 결속의 측면에서 북한도 박헌영 일파를 숙청하고 김일성 독재가 완성되었습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정경희 :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전쟁 중에 우리나라가 3개월 정도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 본질을 알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인민재판과 수탈 등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 이후에는 반공체제를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지배를 겪으면서 비로소 국민의식이 생기고 결속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양일국 : 지도에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저력이 새삼 가슴 뭉클합니다. 올해로 벌써 6·25전쟁 70주년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6·25가 현 시국에 시사하는 바를 듣고자 합니다.

정경희 : 젊은이들에게는 6∙.25전쟁이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에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체제 대결이었습니다. 전쟁 이후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달리 눈부신 정치적, 경제성장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유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념의 낙동강 전선에 서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6∙25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밀리면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양일국 : 오늘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