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선택권을 박탈하는 교육행정
2020-04-05
월드뷰 04 APRIL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김행범(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사립 중·고등학교 교사들은 ‘에듀파인’이란 프로그램을 안다. 교육청이 관장하는 거대한 교육 관리 프로그램이다. 모든 교육 활동이 여기에 보고, 관리되며 이를 통해 평가된다. 한국 교육 행정의 단면이 그것이다. 어떻게 국가가 이토록 교육, 나아가 사립 교육까지 통제하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초·중등학교 예산이 공립·사립을 불문하고 거의 정부 예산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그것을 철저히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교육 전부를 관리하는 것이다.
작년 한국 교육의 최대 사안이었던 ‘한유총’(한국유치원총연합회) 사태의 본질은 국가가 사립 유치원을 제압하기 위해 대통령과 청와대, 국무총리와 각 부처, 경찰, 검찰, 국세청의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국가가 원하는 유아 교육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벌인 사태였다. 일부 사립 유치원의 비리를 이유로, (성격상 사립 유치원이 재량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원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자금이 일부 주어진다는 이유로) 사립유치원의 모든 재정을 정부가 관리하도록 강제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렇게 초·중·고 교육에 이어 유치원 교육까지 국가가 주도하게 되었고 이제 국·공립 대학교와 사립 대학교까지 공영화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획일적 제도로 생산되는 교육 품질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다.
모든 교육 통제의 종국적 수단은 ‘예산’(지원금과 보조금)이다. 정부는 이를 무기로 교육 기관을 유인하고 실질적으로 통제하는데 그 예산은 국가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인(私人)에게서 받아 낸 것에 불과하다. 개인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들일 돈을 국가에 압류당한 후, 국가가 지정하는 교육 내용 및 교육 과정을 수용하도록 강요받는 셈이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도 매우 제약되며, 그 학교들마저 예산 보조를 이유로 국가의 철저한 간섭을 받는다. 그나마 수령자가 예산 지출 내용에 재량을 갖는 지원금(grant)이 아니라 특정 용도로만 써야 하는 보조금(subsidy)으로 바뀌면 교육 통제는 더욱 심해진다.
국가 보조금으로 내 자녀 교육하는 것의 비도덕성
국가가 개인의 교육에 관여하는 근거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육이 ‘공공재’(public goods)라는 주장이다. 흔히 정치인들이 잘못 동원하는 논거이다. 그러나 교육이 공공재라는 것은 초보 경제 원론에도 맞지 않는다. 둘째, 교육이 공공성(publicness)을 지니므로 국가가 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성은 반드시 국·공립학교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타당성이 부족하다. 셋째, 비록 공공재는 아니지만, 공공부문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 곧 장점재(merit goods)라는 주장은 좀 더 나은 근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 교육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넷째, 특히 부모 행세를 하는 국가(parental state)라는 관념에 길들여진 군중 민주주의에서, 교육은 학부모 대신 나라가 감당해야 한다는 복지주의에 대한 의존이다. 이것이 한국 현실에서 가장 그럴듯한 변명이다.
그 뿌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네 가지 자유 중 세 번째 자유, 곧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인데, 이는 현 정부의 교육 포퓰리즘과 맞물려 있다. 모두가 원하는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가 실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가치인 ‘자유’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다는 점은 무척 혼란을 준다. 본래 자유란 ‘국가의 개입 없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남의 돈을 받아 간 후 보조금이란 방식으로 내게 주며 교육에 간섭하는 것이 진정 자유인가? 국가 권력을 통해 타인의 돈을 내게로 돌리는 것이 ‘자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강탈이지 권리가 아니다.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도, 자치단체도 아닌 학부모에게 있다. 남에게 내 아이를 돌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 비용을 남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내 아이는 내가 직접, 혹은 내 비용으로 키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성경의 8번째 계명이 가르치는 남의 재산권을 존중하라는 정신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남에게 그 비용을 요구하는 짓을 “교육을 받을 권리”라 강변하는 논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쯤 되면 꼭 나타나는 질문이 있다. ‘국가가 최소한의 교육’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그러나 어떤 교육 프로그램이든 항상 그것이 최소한의 조치라고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바로 그게 함정의 출발이다. 과거 몇몇 한정된 교육 사업의 지원이 결국은 교육 전체를 국가가 보장해 주는 조치로까지 교육 복지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교과서 대금 지원에서 시작하여 무료 교과서로, 등록금 감면에서 등록금 면제로, 점심 식비 지원에서 무상 급식으로, 등록금 지원에서 반값 혹은 무료 등록금으로…. 교육에 “궁핍으로부터의 자유”가 개입되면 필연적으로 국가는 이를 위해 더 많은 “남의 돈”을 더 많이 징수해야 한다. 그 결과는? 그것이 국가가 특정한 인간상을 설계하고 이를 성취하는 도구로 교육 내용과 교육 과정을 통제하는, 곧 국가주의 및 사회주의 교육이다. 무료 급식, 부분적 혹은 전면적 무상 교육의 정치 공약에 의존하여 내 자녀를 교육하겠다는 야릇한 욕망을 품었을 우리 모두가 실은 오늘날 교육 붕괴의 공범이 아닐까?
국가주의 교육의 폐해
자녀의 교육을 남의 돈으로 치르겠다는 당신의 근본 마음 때문에, 그걸 간파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겸손하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 당당히 요구할 권리라고 가르쳐준 루스벨트 때문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가가 나보다 자녀 교육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 때문에, 국가는 “보조금” 제도를 무기 삼아 개인의 교육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보조금 중심의 국가주의 교육은 한유총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심각한 폐해를 야기한다.
첫째, 국가의 지원금을 보조금으로 지정하게 되면 사립학교 관리자를 통제하고, 사립 유치원 회계를 통제하며, 교원의 징계에 관한 행정청의 통제가 가능해진다.
둘째, 보조금을 무기로 삼을 경우 재산권 및 자유의 간섭은 ‘법률’이 아닌 방식(즉 시행령과 부령)으로도 가능해진다. 대표적 예가 ‘사학기관 재무・회계 규칙’으로 헌법이 보장한 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이다.
셋째, 물론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이유로 사유 재산권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보상 없이 정부 재정이 일부 들어있다는 이유로 ‘에듀파인’을 강제하고 있다.
넷째, 법률도 아닌 시행령으로, 또 모법의 위임도 없이 교육부령만으로, 재산권을 침해하는 에듀파인 체제를 강요하고, 이를 위반할 시 처벌까지 규정하여 위임입법의 한계도 위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다섯째, 과거에 정부 재정 부족 상황에서 민간 자본이 사학 기관을 설립하도록 권장해 놓고는 일부 사립학교의 비리를 이유로 총체적 간섭을 부과하고 그 퇴장까지 제약하는 신뢰보호 원칙 위반도 나타난다.
여섯째, 사립유치원 예산의 일부만 지원하고는 전액 지원한 국·공립처럼 모든 재정을 통제하는 것은 비례성 원칙의 위반이다.
본래, 특정 용도를 지정해 지불하는 ‘보조금’과는 달리 ‘지원금’은 용도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수령자인 학부모나 학교로부터 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사태를 겪자 사립 유치원에 대해 정부는 아예 법을 바꾸어 지원금조차 반환하도록 하는 기이한 법 개정을 강행하였다. 기존의 지원금 제도는 이제 보조금화 되어 정부의 더 많은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교육은 사적 자치가 원칙이되 국가가 예산을 통해 관여할 경우에도 그것은 보조금 방식이 아니라 지원금 방식이어야 한다.
교육 선택권을 보장하는 교육 체제
1년 전 사립 유치원 사태에서 보듯이 일부 비리를 이유로 모든 사립 유치원에 결국 강력한 통제를 가하면 결국 사립 교육기관은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가 원하는 교육 내용과 교육과정에 충실한 학교만이 남게 될 것이다. 국가가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 과정으로 찍어내는 인간형이 창의와 인간 완성, 기독교 가치는 차치하고 경쟁력이라도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무너진 교육 제도 하에서 생산되는 인간형은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사회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국가가 또다시 보조금으로 생활까지 보장해 주어야 생존하는 인간이기 마련이다. ‘청년수당’ 등의 새로운 포퓰리즘 정책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를 반영한다. 결국, 국가주의 교육이 획일적으로 만든 인간은 졸업 후에도 국가를 떠나서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고, 실업자 구제 조치의 일환으로 국가·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에 들어가지 않으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남의 세금 곧 국가의 보조로 이루어진 교육의 종착지는 결국 그 생존마저 남의 세금으로 해결하는 세대, 곧 만인이 만인을 위해 세금을 내는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이 정부 들어 교육에서 점차 강화되어 가는 보조금(subsidy) 방식에 의한 교육은 지양되어야 하며 오히려 지원금(grant) 방식이 대원칙이 되어야 한다. (물론 장애 및 기타 특수 목적의 학교를 정부가 설치하고 운영에 관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요컨대, 지원금을 받은 학부모나 학생이 원하는 교육 내용 및 교육 과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함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교육은 사적 자치에 맡겨져야 한다.
이러한 대원칙 아래 바우처(voucher) 제도(사립학교 바우처·저소득층 바우처·교육비의 세액공제 및 소득공제), 차터(charter) 스쿨 제도(대안학교·공립학교의 선택 허용·교육 민영화 등), 마그넷(magnet) 스쿨 제도(학군에 관계없이 특정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에 갈 수 있는 제도) 및 이 정부에 의해 폐지 대상으로 몰린 자율형 사립고도 오히려 더 확장되어야 한다. 대폭 양보해 국·공립 교육기관의 열정도 뛰어나고, 그것을 주장하는 정치인에게도 교육에 대한 진정한 의지가 있다고 치자. 그럼에도 획일주의식 교육이 창의, 가치 다양성 및 좋은 인성을 육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이 이미 밝혀져 있다. 개인에게 교육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개인이 그 교육에서 어떤 성과를 얻을지는 그 자유가 주어진 다음에나 검토될 문제이다.
<haengbum@pusan.ac.kr>
글 | 김행범
서울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정치행정 현상을 경제학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및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사고를 주로 다룬다. 대학생들의 영적 성숙화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