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스쿨과 대한민국의 기원과 발전
2020-04-04
월드뷰 04 APRIL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서론
본 글은 대한민국 발전에 미친 기독교 미션 스쿨의 기여를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미션 스쿨이란 선교사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학교를 말한다.
대한민국은 ‘대한’이라는 민족 공동체와 ‘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민족 공동체로서의 ‘대한’은 혈통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스러운 집단이다. 하지만 정치 공동체로서의 ‘민국’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 교육 없이 민주 공화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민주주의는 기독교 문명과 함께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따라서 국민이 주인이며,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평등 의식, 각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 의식,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주인 의식 그리고 이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런 과정에서 미션 스쿨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서 현재 미션 스쿨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진단하고, 미션 스쿨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도 살펴보려 한다. 미션 스쿨은 대한민국의 교육제도 안에 있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의 교육을 개혁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션 스쿨은 자신들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I. 개항기의 미션 스쿨과 민주주의의 출발
고종은 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고, 친정 체재를 시작하면서 개항을 생각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1882년에는 미국과 조·미 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양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고종이 얻고자 하는 것은 서구 문명의 도입이었고, 이를 위해서 서구의 교육이 필요했다. 육영공원을 만들어서 서구식 교육을 하려 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서양식 교육을 담당한 것이 바로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이었다.
물론 미션 스쿨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 전도였다. 하지만 조선이 원하는 것은 서구 문명을 통해서 근대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션 스쿨은 자신들의 목적은 뒤로 한 채, 조선이 원하는 서구 문명을 전하는 데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바로 영어 교육이었다. 당시 세계는 중국 중심에서 서양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고, 이것을 위해서는 영어 교육이 가장 중요했다. 한문이 중국 문화를 배우는 도구라면 영어는 서구 문화를 배우는 도구였다.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미션 스쿨을 찾아왔다. 이것은 해방 후 본격적으로 국제 교류가 시작되기 전까지 미션 스쿨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둘째, 한글 교육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국민이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언어를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성경과 찬송가 교육을 위하여 한글을 다듬고, 발전시킨 데에는 미션 스쿨의 영향이 컸다. 먼저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한글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했고, 이로 인해 한글 문법이 발전하였다. 미션 스쿨은 영어뿐만 아니라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렇게 미션 스쿨에서 한글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후에 뛰어난 한글학자가 되었다. 주시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셋째, 평등사상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모든 사람을 다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처음부터 여성들과 서민층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이들을 새로운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여성 교육은 기독교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선교사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를 비슷한 비율로 세웠다.
넷째, 노동 교육이다. 전통적인 교육과 미션 스쿨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노동이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선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션 스쿨에서는 학생들에게 근로 의식을 심어 주었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주는 대신, 학교에서 여러 가지 노동을 하게 하였다. 특별히 윤치호는 직업 교육을 강조하였다. 숭실학교의 숭실(崇實)은 실질적인 것을 숭상한다는 근대적인 교육 이념이었다. 이런 것들이 근대적인 시민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다섯째, 민주 교육이었다. 배재학당을 만든 아펜젤러(Appenzeller)는 배재의 목적을 책임 있는 자유인을 만드는 것으로 정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학들이 시민 사회 형성을 위해 갖고 있는 교육 목표였다. 이 목표를 배재학당에서 실질적으로 이룬 사람은 서재필과 윤치호였다. 이들은 갑오경장 이후 귀국하여 자신들이 서구에서 배운 근대 시민 교육을 배재학당에서 실시하였다. 근대 시민 교육을 통하여 민주 교육이 이루어졌고, 독립협회가 탄생하였으며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II. 일제 강점기의 미션 스쿨과 민주 의식의 함양
개항기의 미션 스쿨이 서구 문명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면 일제 강점기의 미션 스쿨은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사실 일제 강점기 미션 스쿨은 일제와 자주 마찰을 빚는 공간으로 일종의 치외법권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기독교보다 조선을 더욱 잘 개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기독교는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 교육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인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인데,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이승훈의 오산학교가 그 예이다. 이들은 조선이 독립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민족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나라가 위기에 있을 때, 이들은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실력을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미션 스쿨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일제 강점기 많은 미션 스쿨들은 바로 선교사들의 법적, 경제적인 관할 아래 있었다. 따라서 이 장소는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여기에서 독립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이런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다. 3.1 운동 때는 미션 스쿨뿐만 아니라 기독교 병원도 독립운동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셋째, 기독교 미션 스쿨은 세계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들과 세계 문화의 접촉을 금지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한국인들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선교사와 미션 스쿨을 통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에 평안도 출신들이 미국 유학을 가장 많이 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은 미국을 통해서 근대 민주교육을 받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넷째, 미션 스쿨은 일제의 교육과는 달리 근대적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하였다. 당시 일본 교육의 목적은 조선 민족을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이 가르치는 근대식 교육은 서구 문명의 본질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기술적인 측면이어서 농업이나 기술과 같은 분야는 가르쳤지만 근대 시민 교육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션 스쿨은 대부분 인문계였고, 서구 시민 사회 교육에 기초를 두었다.
다섯째, 미션 스쿨은 신앙 교육을 통해서 일제의 내선일체나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 일본 교육의 목적은 천황 숭배를 중심으로 내선일체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기독교는 여기에 반대했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신앙 교육이었고, 일제의 교육 목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션 스쿨의 신사참배 반대는 결국 폐교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III. 해방 이후 미션 스쿨과 대한민국의 출발
1945년 해방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해방 이전의 전제정치가 해방 이후에는 공화 정치로 바뀌었다.
하지만 공화 정치라고 해도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체재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국과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 공화국 사이의 싸움이다. 사실 3.1운동에서 한반도는 한마음으로 민주 공화국을 택했다. 그래서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등장한 공산주의는 이 땅에 인민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해방 공간은 서로 다른 두 나라를 세우려는 건국 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미션 스쿨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 학교는 미국과 더불어, 3.1정신과 함께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였다. 사실 민주 공화국도 인민 공화국도 교육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가르치고, 개인의 인권과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것이 바로 미션 스쿨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 미션 스쿨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건설에 기여했는지 살펴본다.
1. 미션 스쿨의 재편 및 신설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정치를 교육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공산주의는 원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사상을 주입해 왔다. 여기에 비해서 민주 세력은 단순한 반공정신만 있었지 이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민주 세력은 공산 세력보다 열세였는데 교회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매우 중요한 교육 장소였다.
해방 후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사역했던 엘마 길보른(Elmer Kilborun)은 한반도에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싸운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세력은 있어도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단체는 없는데, 바로 교회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미션 스쿨은 해방 후 어떻게 재편되었는가?
첫째, 일제 말에 문을 닫았던 많은 미션 스쿨들이 다시금 문을 열었다. 일제 말에 많은 미션 스쿨은 폐교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되었다. 일제 말 폐교된 학교는 쉽게 그 재산을 되찾아서 복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선교부가 한국인에게 인계한 경우이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에게 인계하였지만 어떤 경우는 비기독교인들이 인수한 지역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선교부와의 타협을 통해서 미션 스쿨로 되돌아갔다. 배재, 이화, 경신, 정신 등이 그런 경우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편되는 과정을 아직 자세하게 연구하지는 못했다. 부산의 일신여학교의 경우처럼 그 지역의 유지에게 인수되어 미션 스쿨에서 벗어난 경우도 많았다.
둘째, 월남 피란민의 경우 이북에 있던 미션 스쿨들을 이남에 재설립하였다. 해방 이전 북한에 있던 숭실, 숭의, 보성, 신성, 호수돈 등과 같은 수많은 학교가 남한에 다시금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이 기존 선교부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월남민들의 노력으로 세웠는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션 스쿨이 아닌 경우에도 이북 학교의 전통을 세워서 다시 설립한 경우도 있다. 대성과 오산 등이 그런 경우이다. 어떤 경우는 과거의 학교와는 관계없이 월남 피란민이 중심이 되어서 세운 학교도 있는데 대광이 대표적이다.
셋째, 해방 이후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미션 스쿨을 세운 경우도 있다. 대학의 경우 경희대, 건국대, 한양대, 중앙대 등이 있다. 이런 학교의 설립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적인 민족주의자들로서 미 군정의 도움으로 적산을 불하 받아서 새롭게 대학을 만들었다. 이들 학교는 시간이 가면서 기독교적인 성격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출발은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넷째, 한국인들이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학교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의 서울여대, 대전의 목원대, 대구의 계명대학 등이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를 배경으로 새롭게 세워졌다. 군소 교단이 외국 선교사와 관련해서 새롭게 학교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관동대학(팀 선교회), 전주대학(원래 영생대학, 오순절 계통), 부산의 동서대학(그리스도의 교회) 등이 그런 경우이다.
다섯째, 성경 구락부 운동을 통한 새로운 기독교 교육 운동이다. 성경 구락부는 원래 미취학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은 킨슬러(Francis Kinsler) 선교사를 중심으로 해방 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중에 상당히 많은 학교가 정규 중등학교로 개편되어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 사립학교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2. 미션 스쿨과 대한민국의 발전
해방 당시 국가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서 교육, 복지, 문화와 같은 영역에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였다. 필자는 기독교가 거의 유사 정부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본다. 특별히 교육 영역에서의 활동이 매우 뛰어났는데 당시 국가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학교를 기독교인들이 담당하였고, 이들은 대한민국을 위한 교육을 하였다. 사립학교가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공교육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해방 이후 기독교 사립학교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겠다.
첫째, 미션 스쿨들은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념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 가운데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공립학교가 좌익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공립학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독서 클럽을 통해서 좌익 사상을 전파하였지만 해방 이후 설립된 기독교 학교들은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 교육을 했다. 특히 해방 후 다시 돌아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반공주의자였고, 또한 북한에서 월남한 교육자들, 아울러서 새롭게 학교를 시작한 많은 사람들은 이념적인 측면에서 반공주의자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반공 교육이 이루어졌고, 아울러서 민주주의 체제를 교육할 수 있었다.
둘째, 미션 스쿨들은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많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해방 후 민주 국가 건설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당시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킨슬러 선교사들 비롯한 많은 분들이 성경 구락부를 만들어서 교회에서 중등 교육을 시작했고, 이것이 발전하여 고등 공민학교가 되었다. 이후 많은 학교가 정규 중고등학교가 되었다.
셋째, 미션 스쿨은 해방 후 대학 교육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지도적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해방 직후 한국의 고등 교육 기관이란 경성제국대학과 공립 전문학교를 모아 놓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동국대, 성균관대 정도였다. 여기에 임정 계통의 국민대, 대종교의 단국대 등이 새로 세워졌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생긴 것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한 대학들이다. 여기에는 한양대, 중앙대, 건국대, 경희대가 있다. 이들은 기독교 정치가들을 통해서 미 군정으로부터 부지를 불하 받았고, 미 군정과 이승만은 이들을 통해서 민주 세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넷째, 해방 후 기독교인들은 교육 분야에서 특별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미 군정은 한국 교육을 미국식으로 개편하기로 하고, 여러 교육 전문가를 미국으로 보내서 연수시켰다. 미 군정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오천석과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제도를 배워 오게 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재편하도록 했다. 해방 이후의 교육은 과거 일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해 나갔다.
다섯째, 해방 후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각 분야에 진출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공을 주장한 계층은 기독교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의주 사건과 1946년 3.1절 행사를 전후해서 많이 월남하였고, 결국 남한에 와서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울대 국대안 반대 투쟁 시에 좌익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또 다른 일부 세력은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강력한 반공 그룹을 형성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한국 교회의 중진이 되었다.
IV. 대한민국의 발전과 미션 스쿨의 위기와 대책
1. 미션 스쿨의 위기를 가져온 요인들
필자는 해방 후 기간이 바로 미션 스쿨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60년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미션 스쿨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역할이 커지면서 기독교의 역할은 위축되었다. 미션 스쿨의 위기를 가져온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무교육의 증진이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으로 초등학교 의무 교육 시대에서 중등학교 의무 교육 시대로 발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교육적 역할은 확대되었고, 교회의 유사 정부적 역할은 축소되었다. 사립학교는 이제 재정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국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둘째, 평준화 교육이다. 한국의 고등학교가 과열된 입시로 인하여 입시 학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정부는 추첨제를 도입하였고, 그리하여 고등학교를 자신이 선택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추첨으로 배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종교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종교 교육은 종교의 자유에 배치되는 위법적인 것으로 전락하였고 사립학교의 종교 교육은 매우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셋째, 배타적 민족주의의 등장이다. 미션 스쿨은 상당히 많은 경우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과거 역사 교과서는 이런 기독교의 교육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시작된 이래 기독교는 외세로 간주되고, 반민족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션 스쿨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왜곡, 축소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넷째, 종북 좌익 세력의 등장이다. 좌익 세력은 점점 성장하여 한국 기독교와 사립학교를 그들이 세우려는 사회의 주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사립학교를 비리의 중심이라고 보았고, 과거를 뒤져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일제 말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일제의 강요로 신사참배에 순응하였다. 이것은 당시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기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연세대, 이화여대, 고려대와 같은 대표적인 사학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2. 미션 스쿨의 위기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대책
현재 미션 스쿨의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사회가 나가는 과정에서 미션 스쿨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이다. 여기에서 그 근본적인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자유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자유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개인의 권리가 공공의 이름으로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근본 원리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교육에 있어서 국가 교육 못지않게 사적인 교육도 보호를 받고,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 권리의 확립은 사립 교육의 보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교육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션 스쿨의 참여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립학교의 전통이 없는 유럽은 한국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미국과 같이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서로 상보하는 제도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교육의 다양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정부는 공립학교만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다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서 사립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바우처 제도를 실시해서 도움을 주고 있다. 세금을 내는 국민은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세금은 특정 정부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고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서 종교 교육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철회되어야 한다.
셋째, 미션 스쿨이 한국 사회에서 한 역할을 인정받기 위해서 역사 연구와 교육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한국의 근대 교육은 국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애국지사들이 주도했다. 공립교육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수단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의의는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육사에서 기독교 학교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홍보해야 한다. 지금 역사학계는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미션 스쿨은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넷째, 이런 미션 스쿨의 역사를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 교재 서술과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 교육부는 학교마다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자율 교육을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정리한 교재를 개발하고, 이것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들을 연수시켜서 미션 스쿨이 한국 사회에 기여한 바를 가르쳐야 한다.
3. 현 단계에서 미션 스쿨이 대정부와의 관계에서 추진해야 할 과제들
이런 근본적인 문제 외에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특별히 현재 학교 교육은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되는 선거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강제적인 종교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지원/후 추첨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현재 종교 교육 문제는 잘못된 평준화 제도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 평준화 정책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사립학교법이 인정하는 종교 교육권을 무시하고 제정되었다. 평준화 정책의 추첨 제도로 인해서 학생들은 원하지 않는 종교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종립 학교는 학교 본래의 설립 이념을 구현하는 데 많은 저항을 받아 학교의 존립 목적이 훼손되었다.
학생의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며, 종립 학교의 설립 이념은 법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따라서 먼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종립 학교를 배제한 후에 학교를 배정받게 하여 강제로 종교 교육을 받지 않도록 해 주고, 종립 학교도 학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학생들에게만 종교 교육을 함으로써 종교를 강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교육 관계법에 종립 학교의 종교 활동 및 종교 교육권을 명시해야 한다. 현재 교육 기본법에는 국·공립학교는 종교 교육을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립학교의 종교 교육에 관해서는 분명한 규정이 없다. 따라서 사립학교 중에서 종립 학교는 자신의 종교를 교육하고, 포교하는 것을 설립 이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종립 학교의 경우에는 “종교 활동과 종교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과학부의 교과 과정에도 종립학교의 경우 학교의 자율에 따라 예배 시간과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지침을 삽입해야 한다.
셋째, 종교 과목의 교육 과정은 개정해야 하며, 복수 과목은 불필요하다. 현행 종교 과목은 종립 학교의 설립 목적인 해당 종교의 종교 교육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기독교 미션 스쿨의 본래의 목적은 종교에 대한 교양 교육보다는 복음을 전해서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과목의 교육 과정을 종교 일반 30%, 해당 종교 70%를 가르치도록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현재의 복수 과목 제도는 강제적인 학교 배정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제도이므로 위의 첫 번째 항목에서 언급한 선지원/후 추첨 제도가 시행되면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종립 학교의 성격을 이해하고 입학하였으므로 종교 교육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지고, 복수 과목을 개설할 필요가 없어진다.
넷째로 종교로 인한 전학은 허용되어야 한다. 비록 학생이 입학 시에는 특정 종교의 종교 교육을 수용하였지만, 개종이나 기타 사유로 인해서 종교 교육을 원하지 않는 경우 다른 학교로의 전학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의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아야 하고, 종립 학교는 원치 않는 학생에게 종교 교육을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맺는말
미션 스쿨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역할을 감당해 왔다. 개항 이후에는 근대문화의 선구자였고, 일제 강점기 일본의 신민 교육에 맞서 시민교육을 실시했으며, 해방 후 반공 교육을 통하여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기독교와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션 스쿨의 위상이 달라졌다. 정부는 막강한 예산을 가지고 있고, 진보적인 정부는 사립학교를 여러 가지로 규제하고, 공교육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립학교는 거의 고사 상태에 빠져있다. 미션 스쿨은 도덕적으로 재무장하여 사회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정부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서구 민주주의는 자유 시민들이 봉건사회를 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오늘의 발전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음은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미션 스쿨들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이 사립학교의 특성을 존중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으로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육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역사에 관한 새로운 연구와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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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 신학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