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신중한 정치적 선택

선거, 신중한 정치적 선택

2020-03-03 0 By worldview

월드뷰 03 MARCH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음선필(홍익대 법대 교수)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는 물론 학교, 단체, 아파트 등 다양한 생활 공동체에서 크고 작은 선거가 실시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공직 선거이다. 공직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 자금 및 비용, 조직 등이 동원된다. 지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자와 정당의 선거 비용으로 약 1,130억 원이 들었다. 또한, 정당에 대한 국가의 선거 보조금이 약 400억 원이었다. 올해 4월에 실시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그 이상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선거 관리를 위한 비용이 별도로 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고비용의 선거를 실시하고자 하는 것일까?


선거의 다양한 기능


선거란, 선거인이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대표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선거는 정치체제에 따라 상이한 기능을 갖는다. 독일의 유명한 선거학자인 노렌(D. Nohlen)에 의하면, 고유한 의미의 선거는 복수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선택 가능성󰡑과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선거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선거에서 허용되는 경쟁의 정도에 따라 선거는 󰡐경쟁적 선거󰡑와 󰡐비(非) 경쟁적 선거󰡑, 그 중간 형태로서 󰡐반(半) 경쟁적 선거󰡑로 구분된다. 경쟁적 선거는 선택 가능성과 선거의 자유가 법적인 권리와 제도로 보장되는 상태에서 실시되는 선거를 말한다. 비경쟁적 선거는 선거인에게 이러한 선택 가능성과 선거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선거를 가리키며, 반경쟁적 선거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일정한 제약이 존재하는 선거를 말한다.

경쟁적 선거가 민주주의 체제의 선거라면, 비경쟁적 선거는 전체주의 체제의 선거에, 반경쟁적 선거는 권위주의 체제의 선거에 해당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개념에 본질적으로 부합되는 경쟁적 선거는 선택의 가능성과 선거의 자유를 모두 확보함으로써 비경쟁적 선거나 반경쟁적 선거와는 다른 기능을 갖는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피선거인에게 정치적 신임을 부여하고, 통치 작용을 담당할 수 있는 대의기관을 구성하며, 또한 집행부나 입법부를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반면 비경쟁적 선거는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거나 통제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단지 통치권 행사의 도구로서 사회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한다. “100% 투표, 100% 찬성”을 선전하는 북한이 그 단적인 예다. 반경쟁적 선거는 선택의 가능성이 제약되어 있어 현존의 권력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주로 권위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선거 기능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의 반경쟁적 선거에서 드디어 경쟁적 선거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아직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이제 한국에서 선거는 피선거인에게 신임을 표현하는 ‘신임의 부여’ 기능, 통치 작용을 담당할 수 있는 ‘대의기관의 구성’ 기능 그리고 국민에 의한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통제’ 기능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회의원 선거는 정당제도, 국회 제도, 정부 형태 등과 맞물려서 통치 권력 구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차적으로 대의 기관인 국회를 구성함으로써 국회의 권한 행사에 대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국민 의사에 따라 국회를 구성하는 것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보통 이해하듯이, 국회를 구성하는 각 의원의 선출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는, 현대의 정당 국가적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단결된 정치 세력인 정당에게 일정한 의석수를 배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 체계가 국민 의사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민으로 하여금 후보자뿐만 아니라 별도로 정당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제되지 않고는 국민의 의사에 따른 대표자 선출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서 권력 분립 원리를 역동적으로 구현한다. 오늘날 권력 분립 원리에서는 대통령과 국회 간의 관계보다 대통령·집권당과 야당 간의 관계가 중시되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는 의원 선출을 통하여 집권당과 야당의 의석수를 결정함으로써, 대통령·집권당과 이를 통제하는 야당 간의 역학 관계를 그때그때 국민의 의사에 따라 설정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번갈아 실시되는 경우, 정치 세력의 판도가 더욱 역동적으로 형성된다.


정치적 통제로서 선거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갖는 여러 기능 중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정치적 통제 기능이다. 정치적 통제 기능은 민주적 정당화 기능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대의민주제에서 선거의 정당화 기능이 통치권 자체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라면, 선거의 통제 기능은 통치권의 행사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선거의 민주적 정당화 기능과 통제 기능이 서로 다른 기초와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화 기능은 인정되더라도 통제의 측면이 거의 무시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자칫 형식화되기 쉬운 국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실질화하기 위해서는 선거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 이상으로 국가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은 후보자‧정당의 역할 및 기능 수행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투표함으로써 정치적 통제를 할 수 있다. 입법과 국정 통제 활동을 비롯한 후보자(의원)의 의정 활동과 정당의 역할 수행을 평가하여 후보자의 당선 여부, 정당의 의석수 증감 여부, 집권 정당의 지위 확보 여부 등을 결정함으로써 앞으로 이루어질 정책 결정에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이른바 여소야대의 선거 결과는 대통령 및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통제(심판)라고 해석된다. 이와 같이 후보자나 정당이 수행했던 이전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투표하는 것을 회고적(回顧的) 투표(retrospective vote)라고 부른다.

선거의 정치적 통제는 대의 민주제의 성공적 운용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대의 민주제는 ‘국가 의사(정책) 결정권’과 ‘국가 기관 구성권’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에, 주권자로서 국민은 대표자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통제는 임기가 종료된 이후에 실시되는 선거를 통해서 이뤄진다. 정치적 신임의 주기적 갱신을 의미하는 임기제는 그 자체로 선거의 통제 기능을 요구한다.


불완전한 정치적 선택


그러나 선거의 정치적 통제는 선거 자체가 갖는 속성으로 인하여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선거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장기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뤄지는 정치적 선택이다. 매 순간 선택의 기회를 갖는 경제적 선택과는 달리, 시간적으로 미분화(未分化)를 나타내는 선거는 대표자들에게 임기를 보장해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정 기간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의 수행에 전념하게 한다. 그 결과, 대표자들로 하여금 통제의 영역 밖에 머물 수 있게 만들며, 선거인들로 하여금 대표자들의 공과(功過)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순간순간 시장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기업가와는 달리, 대표자들은 ‘자연적 독점’의 지위를 향유하게 된다. 그래서 대표자들은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등 생산적인 활동에 깨어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 반면에, 선거인들은 이에 대한 평가를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선거는 시간적으로 제약받는 권력 통제 수단이다.

둘째, 선거를 통하여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다. 선택의 대상이 되는 정책들은 일반적으로 정당 단위로 제시되는데 보통 정당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당에 의하여 제시된 정책 대안들이 여러 가지로 혼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선거인들은 제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각 정당의 정책은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 등의 전 분야에 걸쳐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권자가 마음에 드는 정책을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고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선거는 특정한 ‘정책 위임’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위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선거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이나 후보자일지라도 그 정책 중의 일부를 선호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 정당이나 후보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정당이나 후보자에 대한 통제가 제한된다.

셋째, 선거는 다수의 의사가 합쳐진 결정이므로 각 선거인이 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미치는 영향이 적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법률관계를 창설‧변경할 수 있는 사법상(私法上) 법률 행위와 달리, 선거는 각 선거인의 실제 의사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때문에 각 선거인은 선거를 통한 통제의 효용성(선거 효능감)을 체감하기가 어려워서 선거의 통제 기능을 별로 기대하지 않은 채 아예 기권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선거제도를 정하는 법률을 국회의원이 정하기 때문에 선거의 통제 기능이 저하될 수도 있다. 선거는 여러 요소로 구성된 절차로 진행된다. 예컨대 선거인을 지역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선거구의 획정, 후보자와 정당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선거운동, 투표 및 개표, 선거자금의 관리, 선거 쟁송 등의 절차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 요소들을 규율하는 법률을 국회의원들이 정하는 것은 마치 선수가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할 규칙을 정하는 셈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선거의 정치적 통제가 언제든지 어떠한 형태로든 불완전하게 될 수 있다.


현명한 국민이 좋은 선거 결과를 가져온다


위와 같은 이유로 선거는 낮은 수준으로 통제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통제 기능의 불완전성은 오히려 통제 기능의 확보를 위한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공정한 언론의 보도, 선거관리위원회와 검찰 등의 중립적이고도 엄정한 법 집행이 매우 중요하다. 그럴 때에야 선거가 정치 세력에 의하여 조작되지 않고 국민 주권의 원리를 실질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또한 선거에 임하는 국민의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관심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하여 총합(總合) 되는 다수의 의사는 선거일에 확정적으로 표시되기까지 자주 변동하며 또한 외적 요인에 의하여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의사가 때로는 오해나 편견에 의하여 결정될 수도 있고 선동에 의하여 조작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하여 정치적 통제를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후보자와 정당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고적 투표를 할 수 있는 국민의 사려 깊은 태도가 더없이 중요하다.

<eumsp@hanmail.net>


글 | 음선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헌법 전공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홍익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면서 기획처장 직책을 맡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자문위원, 국회 입법지원위원, 법제처 법제자문관의 역할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