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국가 소유는 성경적인가?

토지의 국가 소유는 성경적인가?

2020-02-04 0 By worldview

월드뷰 02 FEBRUAR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최근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정부 정책 결정의 핵심인사로 부각 되자, 추미애가 과거에 토지제도에 대하여 행한 발언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추미애는 자신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국유화를 언급한 적이 없으므로, 자신이 공산주의 토지정책을 추구한다는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변호했다. 추미애가 자구적으로 국유화라는 말을 한 일은 없다.

그러나 추미애가 한 발언들을 잘 살펴보면, 추미애가 지향하는 토지정책이 적어도, 토지의 국가 소유를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추미애는 지난해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토지세를 높여 지주들이 땅을 팔도록 유도하고, 이를 국가가 사들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며, “헨리 조지가 살아 있었다면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이 타당하다고 말했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추미애가 한 이 말만으로도 추미애의 의도는 충분히 드러난다.

물론 추미애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행했던 것처럼, 국가가 모든 국민의 토지를 강제로 박탈하여 국유화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추미애가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추미애가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토지에 대한 세금을 높이는 것이다. 어느 수준까지? 재정압박을 견디지 못해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데, 잠에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머리맡에다가 전기 열 난로를 가져다 놓고 점차 온도를 높여서 머리가 뜨거워지게 만들고, 난로 열에 데어 죽지 않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하는 것과도 같다. 국가가 토지세를 계속 올리되, 그것도 살인적인 수준으로 올리는데, 토지의 사유를 견뎌낼 수 있는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방법에만 차이가 있을 뿐,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게 된다면


토지가 점차 국가의 소유로 전환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 번 국가가 사들인 토지는 국민 개인에게 되파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토지매매가 거듭될수록 국가 소유의 토지는 점차 증가하게 되며, 마침내는 국가가 국토 대부분의 소유권을 장악한 초거대지주가 될 것이다.

추미애를 비롯한 국가의 토지 소유를 말하는 이들의 특징은, 국가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할 때 뒤따르는 심대한 폐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를 절대적인 선으로 잠정적으로 전제하고, 국가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면 토지와 관련된 모든 정의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지상주의이며, 역사적으로 등장한 국가의 악마적 실체를 간과한 것이다.

국가는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권력기관보다도 강력하고, 전방위적인 절대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민주주의국가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국가가 고대 제국주의 국가들만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매우 순진한 국가관이다. 고대의 제국들은 교통 통신수단의 취약성과 무기의 원시성 때문에, 넓은 지역을 지배해도 평상시에는 치안 유지와 징세 정도 이상의 힘을 행사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통신수단의 발달로 실시간 정보교환이 가능하고, 첨단교통수단의 발달로 몇 시간 내 파병이 가능하고, 강력한 첨단 군사력으로 단시간 내의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현대국가의 힘은 과거 그 어느 제국의 힘보다도 강력하다. 국가 단위의 사회 안에 국가를 견제할 실질적인 세력은 사실상 없다. 국가에 토지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이 주어질 경우, 국가의 독점적 권력은 가일층 강화될 것이다. 더욱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고전적 원리를 고려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토지 소유권이 국민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국민 개인이 토지 소유권을 남용하면,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남용하면,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실제로 토지 소유의 현실은 국가의 모든 토지를 왕이 소유하고, 국민 개인에게 임대하였던 왕정 시대와 같은 상황으로 회귀하는 셈이 된다.

정치경제 발전사를 역행하는 이와 같은 토지 소유권의 국가회귀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난 국가가 중국과 북한이다. 중국의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시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국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정치경제의 역사적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추미애는 토지지대세를 주장했던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헨리 조지가 살아 있다면, 토지 사용권은 “인민”이 갖고 소유권은 국가가 가지는 중국의 방식을 지지했을 수도 있다고,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자신의 속내의 일단을 드러냈다. 우리는 추미애의 발언으로부터, 그녀가 추구하는 토지제도의 종착점은 중국처럼 국가가 토지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

헨리 조지는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고, 헨리 조지 자신은 철저하게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토지정책을 수립하고자 했으나, 헨리 조지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방법론을 따라가다 보면, 토지의 국가 소유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실제로 헨리 조지를 따르는 자 중에는 헨리 조지의 생각에,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의 토지 소유를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대천덕은 토지 단일세를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가 토지 소유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기이한 신정주의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교회가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를 선택한다면, 즉 자신이 속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토지 소유권을 확보해 토지의 권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모종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토지와 경제 정의>, 99쪽) 그뿐 아니라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에, 토지 가치세의 원리를 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순진한 주장도 편다(164쪽). 대천덕은 심지어 옐친에 의해 주도된 러시아의 민주화가 조지스트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죄하다시피 하고(169쪽), 오히려 체첸 반군을 잔인하게 공격한 KGB 출신의 푸틴 대통령을 토지 조세에 긍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옹호한다(170쪽).

Henry George(1839-1897).


재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


문제는 이처럼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부터 국가나 교회 혹은 기타 공동체의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 성경적인 근거 특히, 레위기 25장 23절 이하에 제시된 희년법에 있는 토지 사상에 근거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희년법이 헨리 조지의 토지 지대세뿐만 아니라, 국가의 토지 소유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의 희년법은 국가의 토지 소유와는 무관한 법이며, 오히려 국가의 토지 소유에 대항하여, 개인의 토지 사유권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레위기의 토지법 개념은, 먼저 재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라는, 더욱 넓은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재화에 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개념은 청지기 정신(stewardship)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는 시편 24:1의 말씀이 명확히 보여주는 것처럼, 이 땅에 있는 모든 재화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재화들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어떤 소유권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절대적 소유권과 상대적 소유권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재화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만 귀속되는 절대적 소유권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대적 소유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재화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편의상 재화들 가운데 일부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법적인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이 행사하는 법적 소유권이 하나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소유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적 소유권 자체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소유권 안에 있다. 인간 사회 안에 있는 모든 재화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속하여 있는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속하여 있는 재화가 법적으로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빈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법적으로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 사회 안에 있는 토지도 마찬가지다. 모든 토지는 절대적으로, 영적이고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소유물은 법적으로는 인간에게 속해 있다. 다만 법적으로 개인에게 속해 있느냐, 아니면 국가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에 속해 있느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이스라엘의 토지제도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희년의 토지법의 더 넓은 지평은 이스라엘의 토지제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가 문제가 된 것은 가나안에 입성하고 나서부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던 족장 시대에는 토지의 소유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40년간 광야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는 토지의 법적 소유권이 중요한 사안으로 등장했다.

당시 이방 왕국에서는 모든 토지가 왕의 소유,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토지를 열두 지파에 나누어 주었고, 열두 지파 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정 단위로 모두 분배하여, 가정 단위로 개인적인 법적 소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국가의 소유가 된 토지는 없었으며, 토지는 법적으로 철저하게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주어졌다. 토지를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준 것은, 백성들의 최소한의 생계수단을 보장해 주려는 조치였다.

희년 제도 안에 있는 토지 관련 조항은 국가의 토지 소유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항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 법적 토지 소유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조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토지는 가정 단위로 분배되었고,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가정 단위로 개인적인 법적 소유권이 주어졌는데, 이 토지는 대를 이어 행사할 수 있도록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주어졌다. 토지를 팔지 못하도록 한 것은 법적으로 보면 개인의 토지 소유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왜냐하면, 토지를 팔면 한 가정의 최소한의 생계수단이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지를 아무리 가정 단위로 평등하게 분배했어도, 토지관리능력의 차이나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하여, 분배받은 토지로부터 항상 평등한 산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가 말하는, 해소할 수 없는 깊은 불평등(deep inequality)이 있었다. 그리하여 생계유지가 어려워진 가정은 토지를 팔아서라도 생계유지를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토지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토지를 사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 지주들이었고, 토지를 매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계유지가 어려운 가난한 자들이었다. 이 과정에 국가는 개입할 수 없었다. 국가는 토지를 매입하거나 사들이는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다. 토지를 사고파는 주체는 100%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이었다.

희년이 되었을 때 부자 지주들은 사들인 토지를 무조건 그 토지를 판매한 자들에게 되돌려 주도록 규정했는데, 이 조치는 부자 지주들의 토지 독점을 견제함과 동시에, 가난한 자들에게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회복시켜 주려는 조치였다. 혹자는 ‘이 조치는 교환적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정당하게 토지 대금을 지급하고 토지를 샀으면 법적으로 그 토지는 산 사람의 영구적인 소유물이 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는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수학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 특수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특수사정이란 이스라엘에서 토지를 파는 사람은 항상 생계유지가 어려운 가난한 사람이고, 토지를 사들이는 사람은 부자 지주라는 사회적 상황이다. 두 경우를 가정해 보자.

첫 번째 경우는 부자 지주가 희년을 10년 앞두고 토지를 정당한 값을 지급하고 샀으므로 그 토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하는 경우다. 부자 지주가 원래 가지고 있던 토지로부터 매년 10이라는 산물을 거두어들이고, 새로 산 토지로부터 매년 1이라는 산물을 거두어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부자 지주는 희년이 될 때까지 원래 가지고 있던 토지로부터 10X10=100, 새 토지로부터 1X10=10, 합 110의 산물을 거두어들인다. 이 부자 지주는 희년이 지난 후 10년간에도 동일한 산물 110을 거두어들여 총 220의 산물을 거두어들인다. 한편 토지를 판 가난한 사람은 토지를 판 돈으로 10년간은 생계유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물을 거두어들일 토지가 없으므로 산물은 0이다. 10년 후에 토지를 판 돈을 다 써서 생계비가 없으므로 산물은 0인 데다가 다가오는 10년은 다시 돈을 빌려야 하고, 그 결과 산물 10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산물은 0인 상태에서 빚을 졌으므로, 20년간의 산물 총액은 –10이 된다. 부자 지주와 가난한 사람의 누적된 산물 총량 차이는 230이다.

두 번째 경우는 부자 지주가 희년을 10년 앞두고 토지를 산 후에 희년이 되었을 때, 무조건 토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경우다. 부자 지주는 10년간은 산물 110을 거두어들였다. 희년이 되어 매입한 토지를 돌려주었으므로, 향후 10년간 산물 10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따라서 부자 지주의 산물 총액은 210이 된다. 반면에 토지를 되돌려 받은 가난한 사람은 토지를 판 후 희년이 되기까지 10년간은 산물이 0이었다. 그러나 토지를 되돌려 받은 후에는 빚을 지지 않아도 되었고, 토지를 경작하여 매년 산물 1씩 10년간 산물 10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면 이 가난한 사람의 산물 총액은 10이 된다. 그러면 부자 지주와 가난한 사람의 산물 총량의 차이는 200이 된다.

산물 총량의 차이 230과 200을 비교할 때 어느 편이 조금 더 정의로운가? 당연히 후자다. 부자 지주는 부자의 위치를 잃지 않으면서 토지의 독점적 소유에 약간의 견제를 받았고, 가난한 사람은 기초적인 생계유지를 하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처럼 희년 제도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개인적인 토지 소유권을 철저하게 보장하되, 다만 부자의 토지 소유권을 어느 정도 견제하고, 가난한 자의 기본적인 토지 소유권을 철저하게 보장해 줌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의 빈부격차를 완화해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희년 제도는 토지의 국가 소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도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