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규 교수의 ‘책집’ 탐방
2019-10-05송인규 교수의 ‘책집’ 탐방
월드뷰 10 OCTO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SNS나 손안의 게임 등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고, 검색마저 유튜브로 할 정도로 정보습득을 동영상으로 하고 있는 시대적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빨리 전개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 인해서 책 읽기 등을 등한시하는 추세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데, 다음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책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 책을 사랑하는 송인규 전 합동신학대학원 교수님의 책집을 방문했습니다.
남석현: 오늘은 특별한 집에 찾아왔습니다. 책방은 익숙한데, “책집”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어떻게 책집을 만들게 되셨나요?
송인규: 1996년도에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책 박스만 200 개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도 모시고 있었고 아이들도 둘이 있어서 총 6 명의 식구였는데, 책 박스까지 200 개나 되니 도저히 책과 살림을 한 집에 둘 수 없더라고요. 얼마 후 식구들의 거처와 책 보관하는 장소를 분리하기 위해 부랴부랴 책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왜 그렇게 책집까지 마련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느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맞물린 사연이 있습니다. 우선, 신앙적 지식 획득의 수단으로서 책을 입수·보관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많은 고민과 회의가 있었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봐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독교 서적에 의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영어책을 주로 읽었는데, 거기에 궁금한 것들에 대한 안내나 설명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의 성장, 영적 성숙, 신앙지식을 위해 책을 읽고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엔 약간의 수집벽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웃음).
둘째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서 많은 주제·사안·이슈들을 정리해야 했는데, 이 또한 책자를 포함한 각종 문서 자료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선교 단체인 IVF(한국기독학생회)에서 10년간 일하다 보니, 다양한 질문과 물음에 직면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의문을 가진 이들이 제게 질문도 많이 하고 설교나 강의를 부탁하는 수가 늘어나다 보니, 이제 단순히 저만의 관심 분야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제와 이슈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책뿐 아니라 아티클, 팸플릿, 또 기타 문헌과 자료 등을 모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책집이 요구되었던 것은, 한편으로 지식 욕구의 충족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학생들이나 교우들을 돕기 위한 리서치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남석현: 그렇군요. 그럼 이곳에 몇 권 정도의 책이 있을까요?
송인규: 잘 모르겠네요. 책에 관한 정보를 데이터화하지 않아서요.(웃음) 정확한 권수는 모르겠지만, 대충 3만 권은 넘을 것 같습니다. 여기 책집에 3/4 정도가 있고, 집에 나머지 1/4 정도가 있습니다.
남석현: 이 책을 다 읽으셨나요?
송인규: 책집 방문객으로부터 늘 받는 질문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책이 몇 권입니까? 2) 책은 다 읽으셨는지요? 3) 이 책들을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됩니까? 입니다.(웃음) 방금 하신 질문은 둘째에 해당이 되네요.
제가 이 많은 책을 무슨 수로 다 읽겠습니까? “책을 읽는다.”는 말을 세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 보면, 좀 더 실상을 설명하기가 용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수준은 저자의 이름, 책의 제목과 목차 등을 기억함으로써 그 책이 대강 무슨 분야의 책이라고 분류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둘째 수준은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든지 아니면 어떤 부분을 자세히 파고든 경험 때문에 친근성을 느끼는 경우입니다. 셋째 수준은 학생들을 가르치든지 서평을 쓰든지 연구 자료로 활용하든지 해서 책의 얼개와 흐름, 그리고 구성 내용까지 꽤 상세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책의 분야에 따라 제가 전공한 철학 신학이나 분석 철학의 경우, 그리고 20년 동안 가르친 개혁파 조직 신학의 경우에는 셋째 수준의 책 읽기에 해당되는 책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책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둘째 수준이나 첫째 수준에 머무를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야의 책들은 첫째 수준의 읽기에조차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웃음)
남석현: 어떤 분야별로 분류를 하시는지요?
송인규: “분야”의 범위가 다양해 답변이 쉽지 않습니다. 만일 “분야”를 광범위하게 잡아 신학, 철학, 심리학, 과학, 문학 (그 외에도 많음) 등으로 나눈다면, 아마도 신학과 철학 분야의 책이 가장 많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식으로 책을 분류하지 않습니다. (물론 심리학 관련 서적과 일부 신학 책들은 그렇게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나눈 “분야”는 범위가 중간이든지 좁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신학”,“악의 문제”,“그리스도의 부활”,“성경 조화학(Bible Harmony)”,“유대교”,“상상력” 등은 중간 범위에 해당될 것인데, 책의 수효는 주제에 따라 30∼120권 정도가 될 듯합니다. 그러나 아주 좁은 범위의 주제들 ─ “용모”,“최면”,“제사”,“행복”,“영적 전쟁”,“트랜스젠더”, “구 프린스턴 신학과 진화론” 등 ─ 도 있어, 여기에는 3∼15권 사이의 책종이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책 분류는 일반 도서관의 분류와는 차이가 많고 상당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석현: 요즘 e-book으로 책을 읽는 독자가 많습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송인규: 저는 이남 출신이라 이북은 싫어합니다.(웃음) e-book의 제일 큰 장점은 물리적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소통의 수단이 전자기기이기 때문에, 종이로 된 책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도 e-book의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제나 분야에는 인쇄된 책이 필요합니다. 깊은 이해, 반추, 비판적 사고가 많이 요구되는 책들, 가령 인문학 분야에서 철학이나 신학 쪽의 전문서 같은 경우에는 인쇄된 형태로 내용을 접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면 e-book을 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마존에서 킨들 에디션(kindle edition)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책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e-book으로 읽지요. 제가 인쇄된 형태의 책을 선호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고 봅니다. 어떻든 저는 e-book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석현: 약간 추상적이지만, 교수님께 있어서 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두 번째로는 독서란 무엇인지요?
송인규: 먼저 저에게 책은 일차적으로 “소유물”입니다. 책이 소유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저와 분리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제 책을 가져가면 그 책은 제 수중에서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책은 “지식 획득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책을 통해 지식으로 획득된 것은 저의 일부가 됩니다. 소유물과 지식 획득의 수단에는 이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고서(古書)를 팔아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책을 구입했다면, 그 책은 소유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고 그로써 생각과 식견이 넓어진다면, 그 책은 저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책은 저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제 머리와 인격 속에 내장이 되어 죽기 전에는 결코 저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소유물인 책은 저와 분리가 되지만, 지식 공급원으로서의 책은 제 안에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인 독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의 답은 “독서는 숨 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숨쉬기가 의식적 행동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레 이루어지듯이, 저에게 있어서 독서란 그렇게 자연스럽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남석현: 교수님의 독서 방법론은 무엇인지요? 독서 노하우를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송인규: 저 역시 독서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책을 읽어 오면서, 저 스스로의 독서 습관, 패턴, 방법들을 경험적으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티머 애들러(Mortimer Jerome Adler, 1902-2001)가 쓴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멘토, 2012)>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저의 경험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또 명료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책 읽기에 있어서 이보다 뛰어난 책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의 내용을 선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책 읽는 방법을 4가지 수준으로 분류합니다. 첫째 수준은 기초적인 읽기입니다. 이런 읽기는 초등학생도 하는 단계입니다. 말 그대로 기초적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지요. 그 다음인 두 번째 수준은 체계적으로 훑어보기입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저자 소개, 추천사, 목차들을 통해 책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비록 낮은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 또한 필수적 과정입니다. 다음은 세 번째 수준으로서 분석적 읽기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를 일곱 장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저자의 진술·주장점·논지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비평을 가하는 식의 읽기가 진행이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수준은 종합적 읽기로서 거의 학위 논문 작성에 해당하는 수준이므로 책 읽기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제3 수준까지만 읽을 수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남석현: 교수님께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전문가이신데,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독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송인규: 일단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의미의 정확성과 실제적인 필요를 위해 (일반적인)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은 기술적 차원(descriptive dimension)의 내용물로서, 주로 문화 인류학자가 관심을 갖는 사안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기독교 세계관”은 훈령적 차원(prescriptive dimension)의 가르침으로서, 이렇게 믿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지요.
이제 책(독서)과 세계관 형성 사이의 관계는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세 가지 패턴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세계관의 소재를 제공하는 책들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내용의 일반 서적 ─ 소설/문학, 과학, 심리학, 사회학, 역사, 예술, 경제, 군사, 정치, 교육, 철학, 종교 등 ─이 속합니다. 이런 책들은 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관의 사상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을 수도 없고 직접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책은 이 세상을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는 간접 경험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둘째는 일반적 세계관을 소개하는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세상 사람들(우리 자신을 포함)의 세계관이 어떠한지를 묘사하고 분석하며 검토할 수 있는 단서와 기회를 제공합니다. 아마도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 1933-2018)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IVP, 2006년)이나 스티브 윌킨스·마크 샌 포드의 <은밀한 세계관>(IVP, 2013년), 또는 폴 히버트(Paul G. Hiebert, 1932-2007)의 <21세기 선교와 세계관의 변화>(복 있는 사람, 2010년)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을 어떻게 고치고 조정하고 정립해야 할지 깨우침을 주고 각성을 일으키며 결심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큰 유익이 됩니다. 대표적인 책으로 알버트 월터스·마이클 고힌의 <창조·타락·구속>(IVP, 2007년)과 마이클 고힌·크레이그 바르톨로뮤의 <세계관은 이야기다>(IVP, 2011년)를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석현: 교수님 역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책과 글, 그리고 칼럼을 쓰셨는데, 그렇다면 교수님이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은 책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이어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하는 입문자가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자 한다면, 어떤 단계를 밟아가며 책을 읽으면 좋을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송인규: 기독교 세계관이 한때는 난해하고 사변적이라고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서양 크리스천의 책을 번역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기독교 세계관에 접근하고 싶다고 할 때, 번역판보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저술이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소개할 수 있는 책은, 신국원 교수의 <니고데모의 안경>(IVP, 2005년)입니다. 여기에는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모티브가 알기 쉽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양승훈 교수의 <기독교적 세계관>(CUP, 2004년)이 있습니다. 이 책은 창조-타락-구속 모티브를 설명한 다음에, 이것을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 노동, 학문, 과학, 기술 등에 적용합니다. 제가 쓴 책으로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IVP, 2007년)이 있는데, 주로 골로새서 1장 15-20절에 기초해 저술되었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내용을 꾸민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네 번째에서야 비로소 번역판을 거론하고자 하는데,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IVP, 2007년)입니다. 만약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4권을 소개한 순서에 따라 읽도록 권면하고 싶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두 권의 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한국 교회에 확산되기 전에 올리버 바클리(Oliver R. Barclay, 1919-2013)가 쓴 책입니다. 그는 원래 동물학자였는데, 후에는 영국 IVF의 총무로 수고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기 쉽게 제시한 후, 그것에 기초해서 정치, 윤리, 문화, 교육, 과학, 돈, 사회 등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굉장히 쉬우면서도 설득력이 넘쳐서, 저로서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절판이 되었습니다. 물론 본격적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있어서는 역시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받은 책은 이렇게 두 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석현: 교수님은 IVF의 총무도 하시고,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에서 이사도 하시면서 기독교 지성 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 오셨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 지성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기독교 지성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감정이나 체험 중심의 한국 크리스천들이 지성 및 실천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개인적·공동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송인규: 먼저 “기독교 지성”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 보지요. “기독교 지성”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는 Christian mind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사고 활동”이나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구에서 엘리트적 우월주의나 과도한 지성주의를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지(知)·정(情)·의(意)의 존재인데, 그리스도인의 신앙 활동에 있어 지성적 역할 또한 중요하기(정서적 역할과 의지적 역할이 그런 것처럼)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Christian mind라는 어구를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기독교적 지성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활동을 지성적 역할의 각도에서 조망하는 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일단 기독교 지성을 이렇게 정의할 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특징은 기독교적 지성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 무교(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신앙의 본질을 지성적 역할과 연계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교에는 경전이 없어 지적 전통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데, 이런 무교적 특징이 기독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러한 편중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최소 세 가지 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활동과 관련하여 얼마나 지성적 역할 ─ “생각하다,” “알다,” “지식,” “깨닫다” 등의 작용 ─을 강조하고 있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이때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 목사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IVP, 2015년)이라는 중책자를 함께 읽히는 것도 훌륭한 교육적 전략이 될 것입니다.
둘째, 감정과 체험의 유용성 및 한계를 깨우쳐야 합니다. 대다수의 한국 그리스도인은 감정주의나 체험주의로 치닫곤 하는데 그들은 항시 “감정”과 “체험”에서 신앙의 본질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코 극단적 경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소수이지만 반(反)감정주의나 반(反)체험주의라는 반대 극단으로 기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그릇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두 가지 극단을 피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면, 감정과 체험이 어떤 면에서 유익한지, 그러나 동시에 이 두 가지가 어떤 면에서 덧없고 위험한지 깨우치는 일이 필요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행습에 있어 지·정·의의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찬양”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찬양 행위가 합당하려면 지성-정서/감정-의지의 세 측면이 골고루 통합되어야 합니다. 찬양 시에 우리는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야 합니다[지성적 측면]. 찬양을 통해 우리의 기쁨과 눈물과 안타까움을 표현해야 합니다[정서적 측면]. 찬양을 하면서 그 가사 내용을 살아 내고자 결단하고 실천으로 옮기려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의지적 측면]. 이것은 비단 찬양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 우리의 성경 공부, 우리의 예배, 우리의 형제 사랑 … 이런 것 모두가 지·정·의의 면모를 함께 나타내야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이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점차적으로라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심성 문제에 변화가 있기를 꾀해야 합니다.
남석현: 그리스도인이 지성적 면에서도 성숙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책 읽기는 빼 놓을 수 없는 방편이고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책을 어느 정도나(구체적으로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송인규: 기독교인들이 한 달에 얼마나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하자면, 최소한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자신의 적성과 취향입니다. 즉 만약 자신이 책을 읽기 좋아하고 그럴 능력이 된다면 자신의 형편에 닿는 대로 충분한 권수의 책을 읽으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최소한의 책[한 달에 1∼2 권정도]은 읽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 다음에는 자신이 공동체 내에서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따라 책을 읽는 양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령 기독교 대학의 교수나 교회의 목사 같은 경우에는 상당한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처럼 리더십의 역량을 발휘하는 정도와 읽어야 할 책의 권수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존재합니다. 지도자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책 읽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변화되고 또 그렇게 찾아온 변화는 큰 영향력을 미치는 법이거든요. 이렇게 두 가지 사항에 따라 책 읽기의 양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몇 권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남석현: 요즘은 미디어가 매우 강력한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책을 많이 안 읽습니다. 책이 주는 유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송인규: 우리의 사고 패턴은 문서 위주의 사고(literary thinking)와 이미지 중심의 사고(image thinking)로 대별해 볼 수 있습니다. 문서 위주의 사고는 반복과 되새김이 가능하고, 집중적이고 심층적인 탐구 활동에 적합하며, 시작과 끝의 연속적 과정을 담아내는 데 유리합니다. 반면 이미지 중심의 사고는 순간과 찰나의 포착에 강하고, 직관적이고 통찰력 넘치는 판단을 촉발하는가 하면, 돌발적이고 단편적인 발상에 익숙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 패턴의 사고는 둘 다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자 할 때 이미지 중심의 사고를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신앙의 도상에 오른 이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문서 위주의 사고가 요구됩니다. 복음과 하나님 말씀을 심도 있게 가르치고 깨우쳐야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 중심의 사고가 문서 위주의 사고를 대치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미지 중심의 사고를 배척하지 말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문서 위주의 사고 또한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책을 읽히는 것이야말로 문서 위주의 사고 발전에 근간이 되겠지요.
남석현: 목회자를 포함해 어떤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 외에 다른 책 읽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인규: 일부 지도자들이 성경 외에 다른 신앙서적 읽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두 가지 이유가 생각이 납니다. 첫째, 성경은 읽지도 않으면서 다른 책을 읽는다고 하는 사례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여러 책을 읽으면서 목회자에게 도전적 질문을 하거나 교만한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책 읽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두 번째 항목부터 다루겠습니다. 이 경우는 잘못이 분명히 책 읽는 이에게 있습니다. 남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다고 해서 목회자에게 대해서든 누구에 대해서든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남을 섬기는 겸손한 태도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항목은 다소 문제가 복잡합니다. 우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보다 책(그것이 신앙 서적이라 해도)을 중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익하고 훌륭한 기독교 서적도 성경과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항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근본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경건 훈련에서 일시적으로 성경 대신 영성에 관한 글들을 읽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일시적”이어야 하고,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원칙 ─ 항시 성경을 최고의 책으로 읽고 묵상하는 일 ─이 지켜진다면, 책 읽는 일 또한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은혜의 수단을 이야기합니다. 말씀, 성례가 이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런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 기도, 고난 중의 섭리 같은 것들도 은혜의 수단이라고 간주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저는 책 읽기 또한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안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영적인 성장과 리더십의 함양이 크게 신장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남석현: 감사합니다. 오늘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내용을 통해 책 읽기에 관한 교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enios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