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2019-10-21 0 By worldview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월드뷰 10 OCTO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글/ 권수진(SICA 교사)

 

책 (A Book)

Edgar Guest, 권수진 역.

 

“지금” – 책이 내게 말한다
“나를 열어서 보라
훌륭한 재보와 지혜의 보옥을
내 글은 금과 은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원한다면 나를 취하라
첫 장을 열어서 그대의 몫을 가지라

 

덮지 말고 읽어 내려가라
내 보물창고에서 마음껏 가져가라
탐하라, 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움켜잡는 것마다 나는 기꺼이 내줄 것이다
내 재보의 문은 결코 잠겨있지 않다
오라 – 여기 내 보석이 있으니, 그대 것으로 만들라!

 

나는 벽로선반의 책일 뿐이나
그대 인생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나를 읽어만 준다면
그렇게 한다면 나는 네 여정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섞인 두 술이 더욱 훌륭한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그대 마음과 내가 가진 진실을 섞으라

 

나는 너를 훌륭한 논객으로 만들 것이다
네 펜에서 은이 흘러나오게 할 것이다
네가 찾는 진리 가까이로 이끌 것이다
네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내가 붙들 것이다–
이곳 선반 위는 너만을 위한 독방이다
내가 네 마음에 거할 수 있도록 하라!”

(출처: Edgar Guest, Collected Verse of Edgar Guest, 1934.)

 

인문고전은 문명이 시작한 이래 문화의 흥망사와 함께 축적되어온 지식의 보고이자, 지금도 인류가 함께 쌓아 올려가고 있는 ‘신을 이해하기 위한’ 발돋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 문명의 형성에 강력한 사상적 영향을 주었으며, 그 분야는 매우 방대해서 철학, 신학, 과학, 수학, 사회학, 역사 등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문고전이 역사의 위대한 사상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상들은 현대문명이 오늘날의 자리에 오기까지 큰 이바지를 했다. 세계관을 다루는 근본적인 질문들—신은 존재하는가, 옳고 그름은 누가 정하는가, 인간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가-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논할 때, 인문고전은 빠질 수 없는 지침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에게 인문고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독교인으로서 인문고전 독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인문고전에는 신과 인간, 존재와 인식, 삶과 죽음, 선과 악, 운명과 자유의지,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근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더군다나 종교와 신, 그중에서도 유독 기독교에 회의적인 현대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4000여 년에 걸쳐 인류가 쌓아온 인문고전 자산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인문고전 독서는 읽는 사람을 보다 깊은 대화의 장으로 초대하는데, 다양하고 새로운 생각의 흐름에 노출되었을 때 얻게 되는 이점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문고전 독서는 현대 사조의 지배적인 흐름에서 읽는 이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모두—스스로 의식하고 있건 없건—자신이 속한 문화의 지배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이때, 인문고전 독서는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환경을 보여준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경험을 마치 신선한 바닷가의 바람을 맞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인문고전 독서는 진정한 의미로 자유를 선사한다. 생각의 자유다.

둘째, 유구한 역사 속에서 현자들이 남겨두었던 전통과 지혜를 배울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이러한 책들을 읽을 것을 장려하는 표면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세기의 천재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한 배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좋은 배움의 방법이었다. 어느 누가 성인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마다할까? 역사가 증명하는 최고의 선생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책을 펼쳐서 읽는 것이다.

셋째,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별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이다.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형평성 좋은 표현도, 실제로 그것을 가능케 할 올바른 지식과 무수히 많은 경험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독서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그 실패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혼란의 시기에 진리를 지켰던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서, 때로는 그 길을 벗어나 인간의 방법들을 실천했던 실패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울 수 있다. 인문고전은 바로 신에게로 돌아가는 기록이면서 동시에—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이 말했듯이— 사냥감을 유인하는 사냥꾼(신)이 춤을 추고 뒷걸음질 치며 우리를 유인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체스터턴.

성서를 제외한, 존재하는 모든 고전은 문학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반은총’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간의 힘으로 쓰인 모든 인문고전을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답이 있다. 기독교적 역사관은 일직선상의 시작과 끝이 있는 영원의 단편이며, 유한한 시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다. 즉, 역사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인문고전에는 분기별로 정보의 제한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이며, 행동으로 드러난 생각은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신의 자비가 없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보여주며, 동시에 성육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이었고, 증명된 신의 사랑과 설득이 얼마나 강대한지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존재하는 인문 고전들 중 신의 진리에 근접했던 이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로 세상에 빠르게 침투해 들어가 사람들을 회복시킨 기독교 문화가 얼마나 영향력 있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인문고전 독서에는 해당 작품을 올바른 관점으로 보게 해줄 성경이라는 기준과, 죄인으로 태어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겸손함—특정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불경한 책을 남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와 똑같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책이 쓰인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길러줄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인문고전은 크게 보았을 때, 신의 말씀이 육체가 되었던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로 나뉜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였던 고대를 통해서는 인간의 망각과 죄의 참혹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예수님이 오신 후 서구 문명의 기초를 놓았던 기독교 문화를 통해서는 신의 도성이 어떠한 형태인지를 드러낸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극명하게 둘로 갈리기 시작하는데, 문명화된 나라의 시민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글을 쓰는 사람과,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 글을 쓰거나, 아니면 극렬히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글이다. 어느 쪽이나 개개인이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지가 그 열매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인문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훌륭한 지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필연적으로 훌륭한 기독교인—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문고전을 공부했던 학자들이 누누이 경고했듯이 고전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의 최대 적은 ‘무지’도 ‘능력 없음’도 아닌 ‘오만함’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다. 더군다나 책읽기는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문고전은 소리 내어 읽거나 토론하기에 적합한 책들이 많다. 함께 책을 읽고, 소리 내어 낭독하고, 다 읽은 후에는 토론할—칼이 칼을 날카롭게 하는 그런 동반자가 곁에 있을 때 그 배움의 깊이는 훨씬 배가될 것이다.

에드가 게스트(Edgar Guest, 1881-1959)는 책을 우리 여정의 동반자라고 묘사했다. 책 한 권을 읽을 때,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먼 역사를 거슬러 최고의 선생을―공자를, 플라톤을, 모세를, 호메로스를―초청하여 우리 앞에 모시고 배우게 된다. 배움은 결코 홀로 하는 작업이 아니다. 홀로 배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전통적으로 읽고, 가르치고, 나누며 이 오랜 지혜를 다음 세대로 그다음 세대로 이어왔었다. 인문고전은 살아있는 책이다. 읽는다면, 반드시 살아서 외치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읽을 때 최고의 선생이 더러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더러는 붓을 쥐고, 더러는 칼을 잡고 우리를 가르칠 것이다. 더러는 호통을 치고, 더러는 일러주고, 더러는 격려할 것이다. 우리의 입에서 날카로운 사유의 말이 쏟아지고, 펜에서 은금이 흘러나오고, 우리의 발걸음이 마침내 진리의 문턱에 다 다를 때까지 일이다.

<s.kwon.sica@gmail.com>

 

글 | 권수진

칼빈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후 현재 고전교육 기관 KLAS(Korea Liberal Arts School)에서 서양고전, 동양고전, 논리학, 기독교세계관 등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