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2019-09-23이름
월드뷰 09 SEPT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5 |
글/ 황선우(세종대 트루스포럼 대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 김춘수, <꽃>
김춘수는 꽃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꽃에 의미를 심어주었다. 그저 땅에 심겨 있었던 꽃은 이름이 불림으로써 우리에게 의미로 심어졌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름’은 큰 의미를 준다.
성경의 인물들은 거듭나면서 이름이 바뀐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울은 바울로….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라면서 이름을 잃는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생’으로, 직장에 들어가면서 ‘대리’, ‘과장’으로, 자녀가 생기면서는 ‘엄마’, ‘아빠’로 이름이 바뀐다.
나는 지금까지는 이름을 꽤 잘 지키며 살아왔다. 청소년기 통틀어서 별명이 있었던 적도 없고, 중학생 때는 이미 키가 180이 넘어서 ‘학생’이라 불리는 일도 딱히 없었다.
중학생 때 지원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지원이라는 이름보다 ‘찔지(찌질한 지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애였다. 유일하게 이 친구의 이름을 불러줬던 애가 나였다. 나는 별명으로 불려본 적이 없어서 별명을 부르지 않은 것뿐이었다.
20살이 되던 해에 참석한 중학교 동창회 자리에서 친구 지원이는 나에게 “전에 고마웠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황스럽게 “뭘?”이라 물었고, 친구 지원이는 내가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친구였다고 말하며 그것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동창회에서 친구 지원이를 만난 며칠 뒤, 나는 주민등록증을 태어나서 처음 발급받았다. 내 이름이 순수 한글로 찍혀나온, 아주 당황스러운 주민등록증이었다.
내 이름 ‘선우’는 원래, 철학관에서 희귀한 한자로 지은 이름이다. 이름의 뜻은, 점치는 것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희귀함을 갖추고 있다. 모든 게 너무 희귀하다 보니 주민등록증에도 찍혀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개명 기회였다.
바로 어머니께 전화해 “개명하고 싶다”라고 말씀드렸다. 성경 인물들이 거듭나면서 이름을 바꾸듯이, 나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이 되었으니 이름을 바꾸자고 말했다. 유교, 샤머니즘적인 의미 다 집어치우고, 새로운 의미의 순수 한글 이름으로 거듭나자고 말했다. 그래서 이름 뜻을 바꿨다. 어머니가 지어준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는 20살 때 개명했다.
지원이가 나에게 ‘고마웠다’라고 말을 해준 것이 나의 개명까지 이끌었다. 이 때부터 나는 ‘이름’이라는 것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단번에 외울 수 있도록 정성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절대 함부로 손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면서 이름을 잃어버린다. ‘집사람’, ‘철수 엄마’, ‘영희 아빠’가 그 사람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그 사람들도 누군가의 누구이기 전에 그냥 누구일 텐데… 나는 언젠가 결혼하면, 배우자의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이라는 것이 사주팔자 운운하는 데만 사용되는 게 너무 안타깝다. 자신의 상황이나 관습에 따라 이름이 지워지는 게 너무 허탈하다. 오직 거듭남만이 이름을 바꿀 수 있는데….
<sunu8177@naver.com>
글 | 황선우
세종대 수학과에 재학 중이며, 세종대 트루스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