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영화 보기
2019-08-23기독교 세계관으로 영화 보기
월드뷰 08 AUGUST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0 |
글/ 이영진(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교수)
왜 영화인가?
영화를 뜻하는 말 무비(movie)는,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시네마(cinema)는 ‘운동/활동’을 뜻하는 그리스어 키네마(κίνημα)에서 온 말이다. 영화가 동양으로 전해진 뒤, 중국에서 영화는 전기(電)로 만든 그림자(影)라는 뜻의 ‘뎬잉’(電影) 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일본에서 영화는 서구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는 이름으로 ‘에이가’(えいが)라는 말과 함께 쓰이다가, 최종적으로는 ‘에이가’라고만 쓰이게 되었다. 에이가는 ‘영화’(映畵)의 일본어 독음이다. 그러니까 ‘그림이 빛에 비치다’라는 뜻인 ‘영화’는 일본에서 유래한 셈이다. 서구는 영화를 어떤 ‘움직임’으로 보는데, 동양권에서는 빛과 연계된 어떤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영화를 다소 기술적 의미로는 영상(映像)이라 부르는데, 원용적 의미에서 영상은 이미지라는 말을 번역한 용어다. 이미지라는 단어가 국내에서는 IT/컴퓨터 분야에서 단지 그림 포맷을(비디오와는 구별된) 지시하는 용어로 전용되어 쓰이다 보니 의미의 폭이 줄어들고 말았지만, 이미지라는 말은 원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라는 창세기 기록에 사용한 형상의 뜻과 같다. 여기서 이미지(형상)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렘은 모양으로 번역한 데무트(닮음)를 담고 있는 전체를 뜻한다. 그러니까 어떤(닮음을 뜻하는) 모양이 그 이미지에 내재한 상태를 표지한다는 점에서 ‘영상’은 ‘이미지’에 대한 탁월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비치다/반사하다’는 뜻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휘의 이행에 나타난 모든 의미의 궤적은 이 ‘영화’라는 ‘가짜’를 보고서 사람들이 울거나 웃거나 화내거나 기뻐하는 원인을 표지한다. 가짜지만 그 빛(또는 그림자)의 반사를 보고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영화에 쏟아붓는다. 이 반사된 가짜를 가리켜 미메시스(μίμησις) 즉 ‘모방’이라 부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문화’라고 일컫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화가 지닌 권능을 통해서 때로는 이성을 교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악한 지식으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권능도 행사하는 것이다.
왜 영화인가?
영화는 위와 같은 연유로 모든 문화의 총아인 까닭이다.
어떤 영화가 있나?
필자는 청년 시절 교회 안팎의 신앙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동료 청년들이 영화 관람하는 일을 강력하게 금지하곤 하였다. 영상이 뇌리에 잔상으로 남아 영적으로 해롭다는 이유에서였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뭔가를 알고서 그렇게 반대한 것 같지만, 실은 당시의 기독교 정서가, 문화 자체를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악의 세계로 간주하는 정서로 팽배했고, 또 기독교 콘텐츠라고 해봐야 문화 고발 일색이었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다 꼭 보고 싶은 명작 영화라도 보게 되는 날이면 꺼림칙한 마음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고서는 다시 그렇게 ‘깨끗해진’ 영성을 토대로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하고, 영화나 보고 다니는 청년들을 정죄하며 질타를 가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영화를 소재로 글을 쓰기도 하고 강의도 한다. 그것도 세속적인 영화들에 관하여 말이다.
우리가 영화로부터 떠나기는 사실 어렵지 않다. 영화관을 안 가면 되는 일이다. TV를 치워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영화로부터는 떠날 수 있지만, 영상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삶이 온통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문화라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우리가 디디고 선 모든 세계는 영상 곧 빛의 세계인 셈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마치 1600여 년 전 어거스틴에 의해 설계된 도면처럼 두 개의 도성이 완전히 분리되어 가로막힌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상은 빛이 두 개의 도성 모두를 비추고 있음을 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는 있고 저기에는 없는 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면서도(Ubiquitas) 단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이(Nusquam) 여겨지는 것 뿐이다(롬 1:20). 이것이 빛인 로고스의 본성이기도 하다.
빛을 비춰야만 만들어낼 수 있고, 빛을 비춰야만 비로소 볼 수 있도록 구조화된 영화도 마찬가지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 영화와 비(非)기독교 영화가 있는 게 아니라, 의미가 있는 영화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화가 있는 것이다.
도무지 의미가 없는 것을 우리가 비로소 악(惡)이라 부른다. 빛 자체는 선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창 1:3).
어떻게 영화를 볼 것인가?
(1) 영화를 보지 말고 읽을 것.
“편집은 섬세한 연결이 아니라 거친 충돌이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쇼트가 부딪쳐 새로운 관념을 창출하는 행위다. ―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1898 – 1948)
성서에서 지향하는 ‘본다’라는 의미는 엄밀한 의미에서 ‘듣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서에서 ‘듣는다’라는 의미는 엄밀한 의미에서 ‘읽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Religion of the Book)가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읽을 수 없는 경우는 두 가지의 경우에 발생한다. 읽을 수 없도록 질 낮게 만든 영화인 경우이거나, 관객이 읽을 수준이 안되는 경우이다. 영화의 본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의미가 부딪치도록 구성한 ‘편집’이기 때문에 독자의 소질을 갖춘 관객은 반드시 영상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관객이 아닌 독자로서의 소질을 갖추는 것이 영화를 보는 첫 번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2) 영화를 보고서 ‘창조’할 것
“의미가 어떠한 쇼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쇼트들이 병치에 의해 ‘의미’가 창조되는 것이다.” ㅡ 쿨레쇼프(Lev Vladimirovich Kuleshov, 1899-1970)
앞서 말 한대로 제대로 만든 영화라면 언제나 두 개 이상의 다른 의미(쇼트)가 충돌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이때 발생하는 모종의 충돌은 필름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독자(관객)가 지닌 어떤 고유한 의미와의 마찰을 통해서도 병행해 일으키는 작용이다. 왜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영화는 영상이며, 영상은 ‘반사하는 것’인 동시에 ‘비추는 것’인 까닭이다. 이것이 기독교 영화와 비(非)기독교 영화로의 구별이 없는 원리이다. 빛의 영상 속에서 모든 창조주의 산물이 지속성 있게 산출되기 때문이다.
(3) 영화를 보고서 ‘연결’해줄 것
“쇼트들을 정리하고 병렬시키는 방법적 선택을 통해, 전혀 다른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 서로 나뉜 공간들을 연결해줄 것” ㅡ 쿨레쇼프
연결하는 일은 일종의 해석 행위이다. 해석이란 어떤 영화 평론가나 학자들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 행위가 아니라 빛(또는 그림자)을 통해서 비친 삶의 활동과 움직임에 대하여 모종의 의미로 규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솔로몬에게 두 아이 엄마가 찾아와 살아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며 서로 충돌을 일으켰을 때, 그 나뉜 공간을 연결해준 것은 법학 행위가 아니라 해석의 행위였다. 생모의 심정을 이해했을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이해의 자리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제작자가 어떤 의미를 규정하고 생산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 이어주는 것은 이해하는 독자의 몫이다. 그 원래의 생모가 누구인지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그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자만이 참된 어머니인 이치이다. 이것이 또한 기독교 영화와 비기독교 영화 간의 구별이 없는 원리이다. 기독교 영화로 제작했지만 영화의 내용에 믿음과 ‘연결’해줄 만한 쇼트가 빠진 경우가 있고, 비록 비기독교 영화이지만 내용에 믿음과 연결해줄 쇼트가 충분히 있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pentalogia@daum.net>
글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며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영혼사용설명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