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정신과 유산
2019-03-083‧1운동의 정신과 유산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2 |
최재건/ 연세대 교수
3‧1운동과 기독교
3‧1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도층과 일반 백성이 함께 일으킨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 자유, 독립, 평등, 평화를 부르짖고 백성이 주인 되는 근대국가를 지향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3‧1정신으로 승화되어 민족혼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3‧1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세가 강했던 천도교의 역할도 컸다. 불교도 참여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할이 가장 컸다. 함석헌은 3‧1운동의 주역이 누구냐고 논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라고 단정하고 “기독교 신앙 없이는 3‧1운동이 없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연세대학교의 민경배 명예교수도 기독교회가 핵심 역할을 했고 교회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기독교회는 당시 역사가 3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민족대표 서명자 33인 중 기독교인이 16인이었고 비 서명자 48인 중에도 과반수인 24인이나 되었다.
천도교의 당시 교세가 근 300만이나 되었던 것에 비하면 기독교는 수적으로 매우 약세였다. 3‧1운동 무렵의 전국 인구는 2,000만 정도였고, 기독교 진영은 개신교인 219,220명, 가톨릭과 정교회 교인 99,488명을 합하여 총 318,708명으로 인구 대비 1~1.5% 정도였다. 교회당은 신구교를 합하여 3,252개였다. 그런데도 전국적으로 교회와 연계된 학교가 832개나 되었다. 이들이 3‧1운동 때 활동 자원이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도 한몫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지방 행정구역을 완전히 개편하여 한국인의 조직을 없애버렸다. 민족 전통과 향토의식을 단절시켰다. 교회는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모일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교회는 조직적인 면에서도 전국적이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회의 병원, 학교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가장 잘 연결된 조직과 기구를 형성하여 최고의 연락망을 갖게 되었다.
교회는 일제에 대한 가장 강한 저항세력이었다. 제일의 지식인 그룹이기도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을사조약 반대의 전통을 이어 구국 기도운동, 청년회 활동, 계몽운동, 나아가서 무장투쟁까지도 교인들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는 안창호, 윤치호, 이회영, 전덕기를 비롯한 8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활동하였다. 황해도에서는 1908년경에 김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일면 일교의 학교 설립 운동도 전개했다. 소위 105인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기독교 세력을 탄압했으나 황애덕이 주도하는 ‘송죽회’라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를 비롯하여 배민수를 중심으로 무력 항일운동을 꾀한 ‘조선국민회,’ 박용만의 ‘대 조선국민군단,’ ‘한영서원’ 같은 비밀결사 같은 항일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했다.
교회는 3‧1운동의 도화선이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자 샤록스 선교사는 이 소식을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에게 전했고,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 건의서를 보냈다. 중국에서도 김규식, 선우혁, 여운형, 서병호 등이 이에 공감하고 활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도 기독교인들이 주역이었다. 재일 한국 YMCA 총무 백관수를 비롯하여 송계백, 서춘, 김도연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6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윤창석 목사 주재 아래 도쿄 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3‧1운동의 준비도 기독교인들이 은밀히 하고 있었다. 1919년 초 였다. 이승훈은 기독교 인사들과 3차에 걸쳐 회의를 하고 천도교 측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거사 일은 고종 황제 인산일인 3월 3일과 주일인 2일을 피하여 3월 1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그날 오후 2시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민족대표들은 독립 선언을 한 후에 자진해서 경찰 당국에 신고하였고 곧 연행되었다. 처음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 중심의 독립선언식 후에 시위행진을 했다. 천도교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이미 교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다.
3‧1운동의 확산도 교회가 제일 큰 역할을 하였다. 주로 경의선, 경원선을 따라 교회가 있는 곳과 교인들이 거주하는 곳이 중심이었다.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가 다른 단체들보다 높았다.
처음으로 피습당해 희생자를 먼저 낸 것도 교인들이었다. 기독교가 가장 성행하던 평북 선천에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강신혁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12명이 부상하고 60여 명이 피검되었으며, 4일에도 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교세가 가장 강했던 평양에서는 3월 1일 평양의 6개 교회가 연합하여 숭덕학교에서 연합집회를 가진 후, 시가행진을 하다가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앞장섰던 강규찬, 김선두 목사 등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그 해 총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3‧1운동 피해도 인구에 비례해 교회가 가장 컸다. 조선총독부의 전국적인 통계는 사망 750여 명, 부상 16,000여 명, 체포 46,948명, 공소 19,054명이었고,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독교회가 입은 피해 중 정주의 오산학교는 전소되었다. 기독교인 전체로는 체포 약 4만 명, 투옥 2,190명, 사살 6천여 명이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다른 통계에서는 9,458명 중 기독교인이 2,087명이었다. 어떤 통계에서는 1919년 말까지 주동자로 투옥된 19,054명 중에서 교인이 3,373명으로 17.7%였고, 여자 피검자 471명 중에서 교인이 308명으로 65.4%였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한국기독교회의 3.1운동 참여 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인 나라도 사랑한다는 신앙심의 발로였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인의 사회 참여정신이었다. 3‧1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이었으나 신앙운동으로 승화시켰다. 셋째는 에큐메니칼 정신이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유기체임을 자각하고 선교사들과 연대하여 세계 교회에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3‧1운동의 정신
3‧1운동은 만세운동과 3‧1독립선언서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선언서는 그 종류만 대략 33종이나 된다. 기독교인 주도한 선언서도 12종이다. 3‧1독립선언서는 독립선언서 자체만으로도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 선언서에는 근대 서구 사상의 개념과 일치하는 기독교 정신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었다.
3‧1운동의 정신은 첫째로 민족의 자주독립, 자유정신이다. 왕정 체제에서 벗어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 건설안이 제시되었다. 둘째로 온 백성이 중심이 된 민주 정신이다. 민주운동이었고 민중운동이었다. 민주 정신은 민중 정신이기도 하다. 셋째로 대동단결의 정신, 연합의 정신이다. 거의 온 민족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족적으로 종교, 계층, 성별, 지역 간의 장벽을 넘어 단결하였다. 넷째로 평등 정신이다. 모든 민중이 각자가 주체적으로 평등하게 참여하였다. 다섯째로 저항 정신이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정, 차별, 수탈에 저항이었다. 후에 무력적으로도 저항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여섯째로 비폭력 정신이다.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었다. 비폭력 정신은 군국주의 세력과 맞선 정의, 도의와 진리, 우애, 협력을 나타내는 평화의 정신이다. 시위 중 일어난 일부의 폭력은 일제의 무력 진압에 대응한 것이었다. 일곱째로 세계 평화 정신이다. 세계 역사의 역방향으로 나아가는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향해 자주독립된 국가와 민족 사이의 우애와 협력 평화와 공존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세계 평화 추구의 정신이었다.
3‧1정신의 유산
3‧1운동의 정신은 한국인의 유산이 되었다. 이미 1907년 신민회를 통해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김규식, 이승만 등의 기독교인들은 새 나라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건국하기로 하였다.
3‧1정신의 첫 유산은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그 헌장 7조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건국의 초기 과정이었다. 그 결실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근대국가를 이룩하는 요소인 영토, 국민, 정부, 주권의 4요소를 갖춘 자유 민주주의국가, 공화정부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이념에 따른 국토의 분단으로 과제를 남겼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한국 교회는 적극적 참여와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의 교세는 2,793개의 교회, 5,923명의 성직자, 459,721명의 신도가 있었다. 비록 기독교인이 전 인구의 2%도 안 되었지만 해방정국의 다양한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 중에 가장 강력한 엘리트 그룹과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기독교의 정신이 새 국가 건설의 이념에 일반적으로 적합하다고 인식된 점들이 있었다. 첫째 서구 여러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와 기독교가 성공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점, 둘째는 새 나라는 도덕성이 국가 건강의 척도가 됨으로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건전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독교가 가장 선호되었다는 점, 셋째는 기독교 자체가 민주 이념을 잘 포용하고 있으므로 참 자유, 민주, 정의, 인도와 평등 정신을 구현하는데 상통한다는 점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민 주권주의, 평화의 정체를 갖춘 기독교가 포용한 서구적 이념은 3‧1정신의 요소가 되었고 사실상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건국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또 한가지 이유는 일제 때 많은 인재를 양성한 것이었는데 정치계의 김구,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장덕수, 조병옥, 김도연을 비롯하여 교계나 학계의 한경직, 백락준, 한치진 등의 인물이 있었다. 국내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물을 양성하였고, 중국과 미국 같은 곳에서 주한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 유학생들을 길러낸 결과였다.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 작곡자도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이 정치 일선에 나선 것도 3‧1운동 정신의 유산이었으며 8‧15 해방도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믿음으로 건국에도 적극 참여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3‧1정신을 계승하여 임시정부와 일제하에 독립운동을 지속시켰고 한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도 앞장섰다. 3‧1독립운동이 한 세기를 맞이하지만, 국토가 분단된 상황은 앞으로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이 풀어가야 할 과제가 되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던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본질에 더욱 충일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나아가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를 번영토록 하고, 사회정의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를 이루며, 다른 한편으로 통일 한국을 이룩하는데 공헌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과 세계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한국 교회가 3‧1정신을 이어가고 그 유산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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