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과 기독교 여성
2019-03-083·1독립운동과 기독교 여성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
윤은순/ 서울신학대학교 연구교수
해마다 돌아오는 3・1절이지만 올해는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바로 1919년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3・1절은 새 학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루쯤 쉬는 날 정도로 취급되어 버린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100년 전의 절실함과 애끊는 외침을 생각하면 결코 허투루 보낼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맞서 전 민족이 합심하여 외친 ‘대한독립만세’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교훈과 감동을 준다. 3・1독립만세운동은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당시 서슬 퍼런 일제의 통치방식에 변화를 주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세계 약소민족국가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준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사적으로 큰 울림을 주는 동시에 그 안에 기독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었을 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이 운동을 기리고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소홀한 점은 충분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많은 독립운동사가 그러하듯 3·1운동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비하여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를 떠올릴 때 김구, 안중근, 윤봉길을 비롯하여 대부분 남성들을 생각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유관순 누나’ 외에 뚜렷이 떠오르는 인물을 찾지 못한다. 여성들의 활약이 없거나 미미해서가 아니라, 그 역할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남녀를 나누어 편을 가르자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우리의 선배들을 찾아 합당한 대우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여 거족적으로 일어났다고 평가될 만큼 3·1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의 활동은 전체 여성들의 참여를 선도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우리 여성 독립운동의 역사
3·1운동은 유교적 여성관을 극복하고 국민 의식을 가진 여성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시간 규방 안에 있던 여성들이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고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학교 설립이 시작되고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자신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여성들이 늘어갔다. 1910년대 강압적인 일제 통치 아래서 민족 운동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들은 독립선언서 전달과 인쇄, 태극기 제작 등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남성들의 보조자로 머물지 않고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기도 하였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3·1운동 이후 지속적인 민족 운동을 이어갔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단체들이 국내외에 다수 조직되는 가운데 국내 여성계에서도 기독교 지식 여성층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항일 여성 단체가 조직되었다. 1919년 9월 1천만 여성을 하나의 세력으로 조직화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다. 김마리아, 황애시덕, 이정숙, 장선희, 김영순, 유인경, 이혜경, 신의경, 백신영 등이 그 주역이다. 또 평양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각각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고, 1919년 11월 이를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본부 총재에 손정도 목사의 어머니 오신도를 비롯하여 회장 최순덕‧ 안정석, 부회장 한영신, 재무부장 정월라‧조익선, 적십자부장 이성실‧김신희‧홍활란 등 교사와 교회의 전도부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강서, 증산, 진남포 등에 지회를 설치하고 항일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0년대 들어서 여성교육 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실력양성운동이 여성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차미리사에 의해 1920년 4월에 조직된 <조선여자교육협회>는 잡지 발행, 지방 순회강연, 야학 개설 및 기술교육 장려, 신생활운동 등을 통하여 대중적 부녀 사회교육의 열풍을 일으켰으며, 각 지방에 수많은 여성 교육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케 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 단체는 기독교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1920~1923년에 걸친 기독교 계열 중심의 여성운동의 확대는 자연히 기독교 여성운동을 결집 통합할 새로운 발전적 기구의 창설을 요구하게 되었다. 1923년 8월 18일 창립된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는 바로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1923년 6월에는 한국 여성교육운동의 선구자였던 손메례를 중심으로 <조선여자기독절제회>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금주, 금연, 공창 폐지, 소비 절약의 절제운동을 일으켰다. 식민지 조선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당장의 생활에 불필요한 것부터 없애 실천 가능한 일을 도모한 것이 절제운동이다. 이것은 특히 가정생활을 책임지는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어 1930년대까지 기독교의 대표적인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연합하여 <근우회>를 결성하고 여성운동의 총본영으로서 활동하였다. 선전, 계몽, 토론, 강연 등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의식 고취와 문맹 퇴치운동, 구호사업, 계몽 운동, 기관지 발행 등이 진행되었다.
1930년대 이후 여성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항일무장 투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 일대 등으로 이동한 여성들이 직접 유격 투쟁에 참가하여 군사 활동을 비롯한 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동북 만주 지역의 여성 무장 투쟁사는 전체 항일 의열 사의 15%를 차지했다.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여성운동은 조국 독립운동에서부터 여성 해방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시기 내내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자랑스러운 기독교 여성 독립운동가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들 중 3명이 여성이다. 유관순(1월), 김마리아(2월), 김순애(5월, 김규식과 부부 독립운동가로 공동 선정)이다. 이분들 모두 자신의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기독교 신앙을 현실 속에 투영하여 실천한 여성들이다.
김마리아(1892~1944)는 일본 유학 중 1918년 <동경유학생독립단>에 가담하여 황애시덕 등과 함께 2·8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조국 독립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독립선언서> 10 여 장을 옷 속에 숨겨 차경신 등과 함께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3·1운동 사전 준비운동에 진력하며 대구, 광주, 서울, 황해도 일대의 여성계 궐기를 준비하던 중, 일제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겪었다. 석방 후 기존의 애국 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 힘을 쏟던 중 다시 검거되었고,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황애시덕, 박인덕 등과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 정체를 폭로하였다.
유관순(1902~1920)은 천안의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수학 중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 토론회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열망을 키웠다. 서울의 3·1운동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약 한 달 후에 만세운동을 일으킨다. 물론 18세의 소녀 혼자 한 일은 아니고, 병천 일대 지역 유지들과 함께 일으킨 운동이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실천한 의기의 인물이라 할 것이다. 또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3·1운동 일 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 홀로 만세를 불렀고, 결국 고문으로 사망한다.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일찍이 만주로 망명한 김순애(1889~1976)는 김규식과 결혼한 후 1919년 7월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한적십자회>와 부속 간호학교를 설립하였다. 독립자금 모금과 일본 정부 대신 및 친일 한국인 처단을 목적으로 <대의용단>을 조직하였고, 1934년 상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43년 중경 각계 각파 부인들과 <한국애국부인회재건대회>를 개최하고, 국내외 부녀는 총 단결하여 전 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해 분투하자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분들 외에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몇 분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성의 어윤희(1881~1961)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이 북부교회 목사에게 전달되었으나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 보따리 장사를 가장하고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리는 행동으로 남성보다 대담함을 보였다. 이후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은 호수돈여학교의 신관빈, 전도부인 심명철 등이 합류하여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관순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였다. 출감 후에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자금과 포탄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년에는 고아원을 설립하고 헌신적으로 운영하여 영원한 고아들의 어머니로 남아 있다.
최매지(1896~1983)는 진남포 삼숭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던 중 체포되어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일본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부녀 계몽운동과 위생사업, 유치원 설립과 운영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해방 후 안동에서도 유치원을 운영하는 동시에 제헌국회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정치활동을 병행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戰災부인상조회>, <기독교여자절제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맺음말
앞서 한국 여성 독립운동사를 살피고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여성 인물을 돌아볼 때, 기독교 여성의 발자취를 눈부시게 찾을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바쳤다. 일찍 순국하신 분들은 해방 전 자신의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해방 후까지 활동한 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주독립의 나라 건설에 노력하였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의 구제와 구호에 힘을 쏟았다.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환경도 있었지만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이룩하였다. 이들이 온몸으로 보여준 행동이 모두 3·1정신의 구현이라 할 것이다. 정의와 인도와 평등과 평화의 정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그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기독인으로서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애쓴 선현들의 기도와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피고,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그것이 기독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고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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