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 사태, 사랑의 교회 사건
2019-01-03세속법과 교회법의 충돌
세속법은 왜 교회법에 관여해선 안 되는가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 사태, 사랑의 교회 사건
월드뷰 01 JANUARY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바벨론 포로기’라는 역사적 표제를 현재적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적용한 인물은 마틴 루터일 것이다. 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가 담긴 3대 논문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이 3대 논문 중 첫 논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만인사제성’ 원리를 담고, 세 번째 논문 <크리스천의 자유>에서는 그 어떤 것에도 예속 되지 않는 자유자로서 원리를 담았다면, 두 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권력에게 예속당한 성례전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다. 중세교회의 방만해진 일곱 성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정치권력으로서 교황중심 질서에 묶여 있는 성례의 상황을 고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상황에 적용했던 것이다.
마틴 루터의 이와 같은 은유와 적용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겪으면서 전통교회를 마치 교황 중심의 권력형 교회로 빗대는데 곧잘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과잉 민주화 시대가 도래하면서는 도리어 그 자체가 권력화 양상을 띠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그만 실제 바벨론에 해당하는 세속 정치권력 하에 고스란히 내어주고 포로 신분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 사태의 중심선상에 선 사건이 바로 ‘사랑의 교회’ 사태이다.
2012년경에는 담임목사인 오정현 목사의 논문표절 문제로 시작된 분쟁이 지금은 그의 위임자격 시비로 비화되어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로 진행되다, 1심과 2심을 거쳐 오정현 목사가 해당 “교단의 목사 자격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난 상태이다.
이와 같은 판결은 오정현 목사 개인 또는 사랑의 교회 개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에 미치는 중대 사안으로서 말 그대로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 상황이 아닐 수 없음을 전 개신교인은 직시해야 한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마틴 루터의 명저,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마틴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일곱 성사를 단지 두개로 줄이는 가치로서만 종사하는 논문이 아니라 성례(sacrament)의 실체와 본질을 잘 가르친 논문이다. 루터에게 있어 성례는 세 가지 요소로 성립한다. 첫째는 상징(the signs), 둘째는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the signified), 셋째는 ‘믿음’이다. 가톨릭은 성례 자체가 갖는 능력을 강조한 데 반해 루터는 그것을 믿음으로 대체시킨 것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 성례의 효력이 어떤 사람이나 여타의 제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에서는 여전히 맞닿아 있는 셈이다. 이것은 수많은 성례/성사 가운데 핵심 상징인 ‘세례’가 지닌 효력에서 그 논고가 집약되었는데, 종교개혁자들이 교황과 그의 권력에 극렬하게 저항했으면서도 ‘개혁’의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주지 않았던 이유와 의미가 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의 효력은 재세례파라는 극단적 개혁 세력이 출현했을 때, 세례를 새롭게 다시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도리어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효력의 원천은 다시 한 번 확증되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통용되는 성례나 신분이나 직임이나 사물이나 여타 환경의 효력을 다른 어떤 제도로써 다시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그 인준 행위 자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행위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효력임을 자인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직 믿음으로’라는 기치도 흔들리는 셈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효력을 인효(人效/ Ex Opere Operantis)라 부른다.
고 옥한흠 목사의 계승자로 불려 나온 오정현 목사의 위임 자격은 어느 시점에서 그 효력이 발생한 것일까. 교회가 부여한 자격의 시점에서 발생했을까, 아니면 교회로부터 위탁받은 학제의 과정에서 발생했을까, 아니면 세속 법정이 인준하는 자격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이 효력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 개신교는 다시금 중세 암흑시대로 회귀하는 것이요, 그야말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로서의 길목에 다다른 처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기치를 스스로 무너뜨림에 대한 결국인 셈이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그 효력에 관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롬 4: 10-12).”
한국 개신교는 이 사태에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바른지적입니다.교회는 자조적으로 바벨론 포로 시절로 걸어 가고 있습니다.그것은
인본주의가 교회에 들어와서 확산되기때문입니다.
오직 믿음과 전적인 의탁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가치관에 더큰 비중을 두고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기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합니다.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세속화되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반갑습니다.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