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재산 보장법, ‘희년’(Jubilee)
2018-09-21누가 가난한 자인가?
가난한 자의 ‘희망’을 파괴시키는 제도
가난한 자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
가난한 자에게 ‘평등’을 주는 제도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
월드뷰 09 SEPTEMBER 2018●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으로서 제 1의적 교시는 산상수훈일 것이다. 국가, 이념, 종교를 초월한 진리로 공인된 이 수훈의 시작이 가난한 자에 관한 테제로 그 가르침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복음서인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 이 대목을 세 번째 복음서인 누가복음에서는 단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만 되어 있어 상이하다. 어느 것이 참된 어록일까? 성경 전공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본문 공학적인 해명거리를 내놓겠지만 여기서 확진(確診)할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하나. 이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게, ‘누가 가난한 자인가?’라는 교착점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누가 가난한 자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에 선행한 본원적 주제인 것이다. 과연 누가 가난한 자란 말인가.
(1) 누가 가난한 자인가?
성서에서의 가난한 자란 역사적으로 땅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시작도 땅에 관한 약속이었고, 예언자들의 주된 예언 역시 땅에 관한 예언이었으며, 그러한 계약과 예언을 둘러싸고 전개된 이야기 역시 땅에 대하여 가난했던 이야기로 채워진 것은 성서의 주역인 이스라엘이 실제로 땅에 대해 가난하였던 까닭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 (땅이 없는) 가난한 자로서의 체험, 바벨론에서의 (땅이 없는) 가난한 자로서의 체험, 이 두 단계의 경험이 없었다면 성경도 없는 것이다. 이 경험들이 흩어져 있던 전통을 성경으로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가난한 자인가?’ 그것은 단연 이스라엘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경적 구제의 방법에 대한 어떤 혼동이 야기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 가난한 자에 관한 정의와 범주의 오류일 가능성이 짙다.
‘희년’에 관한 오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가난한 자의 ‘희망’을 파괴시키는 제도
미국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공회 사제로 일생을 마친 토레이(R. A. Torrey/ 대천덕)는 살아생전 빈부격차 없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모범적 실천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실천을 전개함에 있어 “땅은 하나님의 것”(레 25:23)이라는 성경 표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면서도, 이론으로는 독특하게도 19세기 인물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죽었다. 헨리 조지의 중심 사상은 생산의 3대 요소인 토지·노동·자본에 대한 엄정하고도 ‘균등한’ 평등으로 집약되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는 자본이 토지와 노동을 구매하여 생산을 일으키는 주체로 통용되기 마련이지만, 헨리 조지는 이를 거부하고 토지를 중심으로 자본과 노동을 대등한 주체로 재편시켜, 노동은 노동 스스로가 자기 임금을 부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이론의 꽃은 토지의 국유화이다. 토지 국유화만이 임금의 균등을 실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토레이는 바로 이 이론을 ‘희년’으로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상복지의 한 형식으로 둔갑된 채 실행되었는가 하면, 이제는 특정 정당이 추구하는 토지 공개념의 한 형식으로 실행될 움직임마저 포착되는 실정이다. ‘토지가치세(Land value taxation)’ 혹은 ‘지대(Economic Rent)’, 이런 용어들은 토지의 국유화 즉, 재산 몰수를 대신한 안전한 완충 제도로 선전되고 있지만 실상은 재산 몰수의 예비 단계의 표현들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술어나 정책을 마치 희년의 표상인 것처럼 신학적 인준을 아끼지 않는 기독교 정체성의 학자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진정한 평등 사다리가 소각되는 줄도 모르고 이를 따르는 기독교 젊은이들이 많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저런 개념들은 희년보다는 마르크시즘에 더 부응하는데, 그것은 이미 시연 단계에서 결과까지 다 끝마친 희망 파괴적 제도이기에 우려를 더한다.
희년은 그런 것이 아니다.
(3) 가난한자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
‘희년’이란 본래 토지의 소유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이는 본질상 토지의 사유화를 이르는 개념이지, 토지 국유화를 일컫는 개념이 아니다.
역사적 희년은 본래 토지를 소유한 적이 없던(혹은 토지를 강제로 국유화 당했던) 이스라엘의 대망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대 속에서 땅을 약속 받은 이야기, 약속 받은 땅을 점령하는 이야기, 점령한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 그렇지만 땅을 잘 관리하지 못해 땅을 도로 빼앗기고 가난한 자가 된 이야기가 성서의 주된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 환경에서 이집트 탈출기를 읽어낸 유대인은 소유와 박탈을 오가는 역사 반복 속에서 ‘인간은 왜 땅에서 가난한 것인가?’라는 보다 심원한 물음을 발견했고, 결국 인간의 죄가 땅의 가시와 엉겅퀴를 가져왔다는 신학적 통찰에 이른다. 그렇게 인식한 땅과 인간의 결탁 관계 속에서 포로생활의 종식을 본 것, 그것이 바로 희년이다. 다시 말해서 희년은 땅의 회복 시점을 자신들의 죄의 소멸 시기 곧 자유의 시점과 결속시켜 예언으로 봉인한 데서 출발한 제도라는 점에서 전적인 ‘자유’의 원리에 기인한다. 자신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자유를 죄의 소멸/땅의 회복과 결부지었기 때문이다.
토레이의 슬로건이었던 “땅은 내[하나님의] 것이라”(레 25:23)는 본문도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토지는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라”는 자유를 지향한다. 토레이의 슬로건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문자적 의미만을 오려서 전시해왔지, 그 다음 구절에 이런 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주지 않는다. “너희가 소유하는 땅 어디에서나 제 땅은 다시 되돌려 살 수 있어야 한다.”(24) 즉,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아야 하는 것은 토지는 다 내(하나님) 것임이니라”(23)고 하였을 때, “팔지 말아라”가 아닌 “영구히 팔지 말아라!”가 진정한 본말인 것이다. 문법적으로도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라”에 해당하는
‘로티마케르 리츠미툳’(לֹא תִמָּכֵר לִצְמִתֻת)에서
로(לא/ Not)가 부정하는 건,
마카르(מָכַר/ “팔아라―”)가 아닌
체미투트(צְמִיתֻת/ 영구적)이기에
“영구히(צְמִיתֻת) 팔지 말아라”는
“토지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히’ 준 것”이라는 뜻에 더 호응하는 것이다. 물론, 소유권은 당연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대천덕은 자신의 저서 <토지와 경제정의>에 이런 말을 남겼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삼상 8:11)는 말로 시작해 주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과 같은 토지 몰수가 이스라엘에서도 발생하리라고 예언했다. 여기서 ‘제도’(manner)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미쉬팟’(mishpat)을 번역한 말이다. 미쉬팟은 흔히 ‘심판’(judgment)으로 번역되는데, 권리나 관습을 뜻하기도 한다. 또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해 형성된 관습분 아니라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이방의 관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p. 32)
즉 희년 사상에 반하는 제도란 국가 내지는 기관의 제도라는 논지의 맥락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따르려는 ‘왕의 제도’란 ‘땅의 해방’(희년)의 대상이 되었던 가나안의 제도라는 점에서(관이 개입하고 주도하는), 토레이의 본문은 도리어 토지의 국유화에 해당하는 모든 개념이 오히려 그 땅을 억압하는 기제임을 반증한다.
일부 정치인의 희년에 관한 오인, 그 희년을 오도하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 이들의 토지에 관한 그릇된 사상에 기인하여 결국에는 가난한 자의 희망만 영원히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릇된 관념이 그를 영원히 가난한 자로 박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년의 본질이 아니다. 희년의 본성은 자유를 지향한다.
(4) 가난한 자에게 ‘평등’을 주는 제도
역설적이게도 희년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관념의 제도이다. 이 관념이 파괴된 것은 바로 산상수훈의 지점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마 5:3.
이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아니라, “복이 있는 자는 가난한 자이다”라는 문장이다. 이 ‘가난한 자’가 영원한 무상복지 대상자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마태는 ‘가난한 자’ 뒤에 ‘심령으로’라는 말을 붙였고, 누가는 산 위에서가 아닌 평지에서의 수훈이었기에 ‘가난한 자’만으로도 의미가 통하였던 것이다. 이들 양자의 총합은 ‘가난한 자’는 도움의 대상이라는 형식의 전형을 파괴한다.
무엇보다 이 산상수훈의 말미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마르크시즘 내지 사회주의의 오병이어는 분배에 천착하지만 산상수훈이 소급하는 오병이어의 본질은 바로 자유에 입각된 일종의 제도를 표지하는 까닭이다. 그 제도가 어떤 것인지 여러 비유들이 포진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만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바로 20장에 담긴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이야기이다(마 20:1-16). 포도원 주인은 어찌하여 제3시, 6시, 9시, 11시 등 출근 시간이 각기 다른 품꾼에게 동일한 일당(한 데나리우스)을 지급한 것일까? 그는 사회주의였을까? 제3시의 출근자는 8시간 근무자였다. 그에 비해 제 11시에 출근한 자의 경우는 최소 1시간 밖에 근무하지 않은 셈이다.
해당 본문은 포도원의 주인을 집 주인이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집 주인’이라는 말은 ‘상속받은 집(οἶκος)’과 그 상속을 받은 주인(δεσπότης)이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이다. 한 마디로 소유 개념에 입각한 지주(地主)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지주가 나간 장터는 아고라(ἀγορά)라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아고라’는 인터넷 포털에서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과장되게 선전하고,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은 극렬하게 폄훼하는 공간으로 그릇되게 활용하나, 여기서는 ‘자유시장’을 뜻하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제3시가 되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노동자가 있었다. 제3시면 로마 시간법으로 오전 9시인데, 오전 9시부터 포도원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즉 앞서 자유시장에 일찍 나온 노동자들은 이미 그 지주가 포도원으로 다 들인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지주는 제 3시뿐 아니라 제 6시, 9시에도 그렇게 자유시장을 나가고 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는 마치 놀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러 나간 것처럼 과잉 번역해놓고 있지만, 추수 시즌인 포도원은 자고로 종말론적 환경이다. 작업 종료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손 조절을 위해, 주인은 분주하다. 그것이 제11시, 곧 오후 5시에도 지주가 자유시장에 나간 이유이다.
그는 거기서 발견한 노동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왜 여기서 온종일 나태하게(ἀργός) 서 있는 거냐?”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답한다. “우리를 고용하는(μισθόω)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지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도 포도원 안으로 들어가라.” 그 시각이 포도원 작업 종료 1시간 전이었다.
문제는 이 지주가 출근 시간이 각기 다른 품꾼에게 동일한 일당(한 데나리우스)을 지급할 때 발생했다. 오전에 온 자가 항의를 했는데, 이 항의의 소리에 이입된 감정은 다음 역본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공동번역)
이 항의에 대한 답은 이것이었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실제로 지주는 제 3시 이전에 들인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했다.
‘에크 데나리우 텐 헤메란(ἐκ δηναρίου τὴν ἡμέραν)’
=for a denarius for the day(한 날에 한 데나리우스)
이 지주는 공정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1시간 일한 자가 왜 같은 한 데나리우스를 받았는지, 그들이 어떤 노약자였는지, 아니면 어떤 (탁월한) 기술자였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 ‘한 날에 한 데나리우스’라는 ‘비율’은 모든 사람의 수고를 평준화하는 금전적 비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수고를 균등하게 하는 시간적 황금률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약한 사람이 한 끼에 반 공기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처럼 기술을 터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한 사람이 1시간만 일했다 해서, 한 끼니를 반 공기만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3-1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했던 산상수훈의 해설로서 두 포도원 이야기 중 전편에 해당하는 이 단화는 오병이어의 법칙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는 광야의 만나 법칙에서 유래하였다(cf. 출 16장)는 점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제1의 제도인 것이다.
희년이 ‘자유’에 관한 신념으로서 그 바탕을 채우고 있는 관념이라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이 광야의 법칙은 ‘평등’을 보장하는 기둥으로서 실존의 법식에 해당하는 셈이다. 자유는 평등을 떠받친다.
유익한 말씀 잘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비유로 천국을 예비하신듯 합니다
늦게 천국을 찾는사람도 천국의누림을 똑같이 나누게 하심이 아닐련지요
교수님의 토지공개념 의 이론에 공감합니다
깊은 관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