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장벽(The Soft Barrier)
2018-09-23하나임(oenment)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무효화된 박탈
부드러운 장벽(The Soft Barrier)
월드뷰 09 SEPTEMBER 2018●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lrdview 4 |
이웅배 (국민대학교 교수)
폭염이 전혀 꼼짝도 않던 8월 중순에 서울 평창동 소재 갤러리 수애뇨339에서 개인전 ‘부드러운 장벽’을 열었다. 8월 14일부터 보름 동안 전시장 한복판에 가로질러 설치된 이 작품은 크기가 가로 755cm, 세로 196cm, 높이 280cm로 금속배관을 배관 클램프로 연결한 장벽의 골조에 아크릴 물감으로 철망 모양이 그려진 연질 PVC 비닐이 결합된 작품이다. 완성된 작품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견고한 철망의 장벽처럼 보이지만 다가설수록 부드러운 비닐임을 알게 되어 관객이 이내 손쉽게 이 장막을 걷어내고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한다. 전시에 대해 소상히 하고 싶은 얘기를 준비하던 중 이상윤 선생님의 평문 “무효화된 박탈로서의 《부드러운 장벽(The Soft Barrier)》”을 받아보고 이 글을 대신 싣는 것이 훨씬 좋겠다 싶어 글을 써주신 미술사가 이상윤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나의 글을 대신한다.
금속 배관으로 묵직한 볼륨과 양감을 보여주는 연작 <공동체>를 20여 년 넘게 작업하여 온 이웅배는 이번 전시에서는 전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였다. 전시 《부드러운 장벽》에 등장한 휴전선 철책선을 연상시키는 설치(installation)는 중견작가의 안주(安住) 대신 익숙함으로부터의 의도적인 탈피를 택한 도전의 결과물이다. 한편 그가 제시한 새로움이 생경할 수 있겠으나, 사실 들여다보면 배관 작업보다도 먼저 시도되었던 초기작에 대한 향수를 발견하게 된다. 이웅배의 1990년대 연작 <고난의 산>은 휴전선 철책선을 연상시키는 철조망을 감아올린 것으로, 이 시기에 작가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시각에 함몰된 것이 아닌 또 다른 시각에서 분단 현실의 고통과 단절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황해도 연안 출신의 실향민 부친을 둔 작가에게 분단의 현실이란 피부에 새겨진 상처이자 실제적인 고통이었다. 때문에 휴전선으로 가시화된 남북 간의 ‘장벽’은 단지 냉전 게임의 장치로 치부되는 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실제적인 압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분단 현실에 관한 초기의 표현들이 작가 스스로는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는지, 아니면 최근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남북 관계가 다시 그를 이 주제로 불러들인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20여 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서 그때의 낡은 일기장을 다시 펼쳐 들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단절되어버린 열다섯의 아버지, 그리고 고향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길었던 망향의 세월을 그리움과 통한으로 보냈던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본 아들에로 이어진 분단의 고통은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에서 타자화 되었고, 반면 작가 자신에게는 어떠한 설명이나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1996년 첫 개인전에서 그가 분단 현실을 십자가나, 기독교적 고난의 의미 등에 연결시켰던 이유에서도 발견된다.
이웅배가 장벽으로 눈을 돌리게 된 또 다른 이유라면, 달라진 남북 관계에서 이전에 감히 조망될 수 없었던 전망을 제시하고픈 어떠한 동기를 얻었거나, 또는 그때는 역부족이었던 표현의 폭이 20년의 굴곡 속에서 확장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부드러운 장벽>은 이제는 그 문제를 맞닥뜨릴 수 있게 된 작가의 의지뿐 아니라, 겨루어 봄직한 조형적인 내성을 얻었다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여전히 아버지의 고향, 곧 한반도를 가르는 그 장소에 서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 같은 억압과 단절을 행사하기에는 이미 쇠퇴 국면으로 접어든 분단의 현실을 이제는 ‘부드러운 장벽’으로 나타낼 수 있을 만큼의 시적인 여유도 전달된다.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부드러운 장벽>은 실제 휴전선 철책선과 같이 금속 지지대가 세워졌으나, 지지대와 지지대 사이는 철조망 실재의 제시가 아닌 그것의 재현으로 이루어졌다. 투명하여 가벼운 듯 보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2mm 두께의 연질 PVC 막 위에는 교차된 검은 선으로 철조망이 재현되었다. 그러나 이 ‘재현된 장벽’은 장벽을 상기시키는 기능과 동시에 그것의 원래 기능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시사해 준다. 휴전선 철책선이 세워짐으로써 단절된 한반도가 원래 ‘하나임(onement)’을 사무치도록 느끼게 되는 것처럼, 단절을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벽은 또한 그 대상이 원래는 ‘하나임’이었음을 반증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임(onement)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작품 제목이자, 그의 조어이다. 하나를 이루고 있는 상태뿐 아니라, 속죄제와 같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 다의적 단어이다.
‘하나임’을 반증하는 동시에 분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장벽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성의 박탈’을 시각화한다. 단순히 분리와 단절의 의미보다는 하나였던 것을 분리되도록 강제하고 소통을 금지하는 ‘박탈(privation)’의 고통이야말로 장벽의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권력일 것이다.
그런데 이웅배의 <부드러운 장벽>은 장벽 그 자체뿐 아니라 박탈이라는 장벽의 기능을 상기시키면서도, 이 박탈의 권력을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제거하였다. 철조망을 재현한 지지대 사이사이로 관객들이 장벽을 젖히며 자유롭게 드나들게 함으로써, 박탈을 강제하였던 장벽의 권력은 한순간에 무효화된다. 어쩌면 그것은 장벽을 무력으로 공격하는 행위보다 더 전략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부드러운 장벽>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웅배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아래 위치하게 된다. 바로 공동체성에서 파생된 ‘하나임’의 의미이다. 여러 가지 금속 재료들을 탐구하였고, 오랫동안 배관 연작을 지속하여 온 이웅배의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방식 면에서는 관객의 물리적인 접근을 수용하는 촉각성을 띠며, 주제 면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번 전시의 <부드러운 장벽> 역시 결코 일회적이거나, 탈 맥락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부드러운 장벽>은 손에 잡힐 듯 실제적이고 촉각적 방식으로 박탈의 권력을 무효화할 수 있는 장벽이 아닌 장벽, 곧 공동체성의 회복을 향하는 서정적이면서도 경험적인 작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