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transform), 과연 성경적인가

변혁(transform), 과연 성경적인가

2024-08-21 0 By 월드뷰

월드뷰 AUGUST 2024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VIEW 3

김현진 (PD)

대학에서 재즈피아노를 전공하여 연주자와 튜터로 일하다 디자인 분야로 영역을 옮겨 편집디자이너로서 100여 권의 서적과 정기 간행물, C.I. 등을 작업했다. 현재 사단법인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NPK)의 사무국장, NPK의 기관방송 VON뉴스의 PD로 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 찬양 한 곡을 소개하며 글을 시작하려 한다.

너희 포로된 형제를 놓아라 다친 자 마음 상한 자
그 흘린 눈물을 네가 닦으며 해방을 선포하라
너는 크게 자유를 외쳐라 이 땅에 주의 나팔 불어
그 거룩한 나라의 소식을 만백성에게 알리어라

한국의 대표적인 CCM 가수 송정미 씨가 부른 곡, “너는 크게 자유를 외쳐라”를 만든 사람은 기독노래운동 ‘뜨인돌’ 소속 김영선 씨라고 알려져 있다. ‘뜨인 돌’이라는 단어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며 나온 단어로, 우상을 깨뜨린 “손대지 아니한 돌(개역한글 ‘뜨인 돌’)”을 의미한다(단 2:34-35). 기독노래운동이라 불리는 모임 뜨인돌이 깨뜨리고자 한 우상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시작으로 한국 기독교 문화의 경향성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노래운동과 사회문제


2008년 청어람아카데미 봄 강좌에서는 “나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 자유의 시, 저항의 노래”를 주제로 세미콘서트가 열렸다. 1991년 기독노래운동 뜨인돌을 만들며 뜨인돌의 대표간사로 일했던 황병구 씨는 이 콘서트에서 “나에게 맞는 노래가 필요했다. 내 처지에 맞고 내 정체성에 맞는 노래 말이다. … 진보교단에서 만든 노래가 있긴 했지만 조금은 자학적인 노래였다. … 주로 뜨인돌은 생각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목적을 가진 노래를 만들었다.” “[문화] 뜨인돌과 코드셋이 부르는 정직한 찬양”, 2008. 4. 10., 뉴스엔조이
라며 뜨인돌의 음악을 설명했다. “생각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목적을 가진 노래”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뜨인돌의 노래는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영기 CCM 칼럼니스트는 뜨인돌이 1999년 발매한 음반, <들풀처럼>을 소개하며 “이들의 활동은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고 누군가에게는 운동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 이 앨범을 통해 기독교 노래운동이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었다.” “뜨인돌 – 들풀처럼 (1999) 크리스천 뮤직 100대 명반”, 2021. 8. 15., 더 미션 라고 평했다. 뜨인돌의 노래 중 가장 진취적이면서도 대표적인 곡은 “겨레의 십자가”라는 곡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찢겨진 산하 위로 겨레의 눈물 굽이치고
패역한 이 땅에 상한 영혼 쓰러져갈 때
형제여 우리는 잠들어 있었는가
예수의 이름이 멸시받고 짓밟혀도
형제여 일어나라 일어서라 내 형제여
겨레의 역사 위에 이제 복음의 기를 들자
(중략)
겨레의 십자가 지게 하소서
우리 여기 있나이다 우리를 보내소서
우리 싸움 야훼의 싸움 마치는 그 날까지


곡의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 내 ‘노래운동’은 민중가요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양희은 씨의 곡으로 아는 “아침이슬”의 원곡자 김민기 씨는 김지하 선생의 희곡 “금관의 예수” 도입부에 나온 시를 토대로 작곡한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김민기 씨는 소위 민주화운동의 바람이 불던 당시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해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김민기 씨가 만든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극은 노동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음악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김민기 씨의 가장 유명한 곡 “아침이슬”은 <민중복음성가>와 같은 곡집에 실려 진보적인 교회에서 불리기도 했다. 이런 노래운동이 진보주의를 넘어 복음주의에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이 과정에서 1990년 가을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노래운동모임이 뜨인돌이다. 계보를 따지자면 복음주의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뿌리를 진보주의라고 볼 때 그들이 노래한, 겨레를 패역하게 만든 이들은 그들에게 소위 ‘자본주의’ 세력 아닐까? 앞서 언급했던 “너는 크게 자유를 외쳐라”의 김영선 씨가 작사한 “꿈은 어디에”의 가사는 이렇다.


요즘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 물어보면
멍한 눈초리로 오히려 내게 묻지 요즘 잘나가는 게 뭐냐고
내가 바라는 세상은 이렇게 똑같이 가는 게 아닌데
유행 따라 사람 따라 흘러가는 우리들의 꿈은 어디에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고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자 우리의 기도 제목이다. 경건으로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야고보의 권면을 기억해야 한다(약 1:27). 굉장히 빠른 속도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대한민국 발전 과정에 있어 어두운 면이 없지 않다. 경제적 혹은 제도적 근대화, 즉 산업화를 이룰 때 박카스(자양강장제)로 버티면서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처럼 근로자들이 기계와 같이 일하던 때가 있었던 것 사실이다. 부조리하게 여겨질 수 있는 산업화의 여러 상황 중에 정신적 근대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민주화의 바람이 일었고, 민주화운동 아주 초창기에는 동기가 순수했던 사람들의 참여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1970~1980년대의 정치권은 매우 권위적이었다. 특히 문화계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1970년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에 인트로 공연을 맡았던 조영남 선생은 당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풍자하려 “신고산타령”을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개사해 불렀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전원일기”의 배춧값 폭락 에피소드는 방영이 허가되지 않았다. 이만기 교수는 씨름선수로 활동할 당시 경기가 두 시간 정도 지연됐었는데, 그 이유가 “청와대에서 대통령께서 보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머리도 마음대로 기르지 못했고, 옷도 내가 원하는 대로 줄여 입지 못하던 시대는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압’하던 때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산업화의 의미가 중요했고 대한민국에 있어서 굉장한 자부심이자 건국 다음으로 중요한 근대화의 과정이었지만, 개인적인 차원, 특히 예술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너무 험한 시절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적인 모순을 문제제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도를 지나쳐 사회 구조, 즉 국가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수준으로 격양된 것은 위험하다. 이런 경향성은 한 키워드를 생각나게 한다.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자 극단 학전(學田)의 대표 김민기 씨. 공교롭게도 김현진 작가의 본고가 송고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지만 지난 7월 21일 작고하였다.


기독교에서의 ‘변혁’


우리는 여기서 한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변혁’이다. 변혁이라는 단어의 품이 굉장히 넓어 보인다.
앞서 말했던 뜨인돌의 황병구 씨는 재단법인 한빛누리에서 본부장으로 일했다. “기독운동체와 교회공동체를 섬겨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나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한빛누리의 사명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변혁사업과 변혁자들을 육성·지원·연결하는 것이라 소개한다. 한빛누리에 가입되어 있는 단체는 약 60여 개로, 그중에는 대표적인 진보기독매체 ‘복음과 상황’, 고형원 전도사의 ‘부흥한국’,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법률가 모임으로 시작된 ‘기독법률가회’, 방북한 한상렬 목사를 이 시대의 예수라 했던 ‘예수살기’를 비롯해 ‘청어람ARMC’, ‘과학과신학의대화’, ‘기후위기기독인연대’ 등 소위 진보로 분류될 수 있는 기독교 단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변혁자 지원 기금인 ‘악동기금’은 악동뮤지션 이찬혁·이수현 남매가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 우승 상금을 기탁하면서 마련된 기금이다. 악동뮤지션의 아버지 이성근 선교사가 2023년 세운 선교사 지원 단체 미니스트리 ‘더함께’도 한빛누리의 후원을 받는 곳 중 하나다.한빛누리는 정림건축 고(故) 김정철 회장이 설립한 재단법인으로, 현재는 김정철 회장의 아들이자 정림건축의 CPL(Chief Philosophy Leader), 그리고 나들목교회 담임목사인 김형국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다.
정림건축의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은 1997년 지은 할렐루야교회이다. 공교롭게도 할렐루야교회 원로, 김상복 목사께서 강조했던 것이 ‘변혁’이다. 김상복 목사는 ‘변혁한국(Transform Korea Connection)’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상복 목사께서 강조하셨던 변혁이라는 주제에 정림건축, 한빛누리의 역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영역으로서의 변혁이라는 단어는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 그리고 문화계까지 아우르니 꽤 품이 넓어 보인다.
‘변혁’이라는 단어를 내세운 대표적인 신학자 리처드 니부어(Helmut Richard Niebuhr)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IVP)>에서 그리스도(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다섯 가지 유형을 말했다. 니부어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와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라는 양극단의 유형 사이에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그리고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는 유형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니부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유형은 … 복음의 기능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보다 기존 사회를 전환(transform) 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전환은 도덕적 성격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 급진적 혁명을 의미한다(<그리스도와 문화(IVP)>, 68쪽).

니부어는 이 유형에 대표되는 인물을 바울로 보고 고린도전서 15장 51절의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 다 변화되리니.”라는 말씀을 예로 든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서문을 쓴 제임스 M. 구스타프슨(James M. Gustafson) 예일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는 “니부어가 다섯 번째 유형(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을 다른 네 가지보다 덜 비판적으로, 그리고 더 우호적으로 다룬다.”며 니부어가 그것을 가장 적합하게 여긴 셈이라고 말한다. 물론 니부어는 그의 유형론적 방법(Typological Method)의 목적이 단지 여러 유형이 있음을 제시하고 사심 없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 했다. 실제로 니부어는 책의 마지막 장을 “미처 결론을 내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끝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확실히 변혁론에 우호적인 것으로 보이는 니부어의 문화론은 바울이 설명한 부활, 더 정확히는 몸의 부활을 현실 문화의 변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가 변혁론에서의 복음의 기능이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은, 부활과 새 예루살렘의 도래와 같은 종말적인 입장은 배제된 듯하다. (실제로 리처드 니부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분류된다.)
니부어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칼뱅(John Calvin), 웨슬리(John Wesley)와 더불어 문화 변혁의 대표적인 신학자를 영국 성공회 영성가인 프레드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 1805~1872)로 인식한다. 모리스는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개별의 대리자(교황, 성경,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회 등)가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상을 가진 그리스도 왕국론자였다. 진실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결돼 있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은 사회주의자들과 합류하게 했지만,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이기심이 보이자 모리스는 회의를 느꼈다고 니부어는 설명한다. 니부어는 모리스의 경우를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각각 별개의 인간 조직들을 하나의 새로운 보편 사회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조직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보편적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낮아짐과 높아짐의 과정을 거쳐 변혁되는 것을 의미한다(앞의 책, 355쪽).

니부어는 모리스가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자 등과 교류하지 않았다면 영향력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듯, 기독교와 (세속)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 변혁적인 입장을 가장 긍정적으로 여겼던 니부어도 변혁에 사회주의적 경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밝힌다. 변혁‘하는’ 것과 변혁‘되는’ 것은 다르다. 지금 기독교계가 스스로를 변혁을 ‘하는’ 주체로 인지한다면 꽤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변혁하는 주체는 곧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와 같을 것이다.


‘혁명’으로서의 변혁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변혁은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경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속에서도 변혁은 사회주의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2016년 1월 창당되어 정치 스펙트럼으로 볼 때 극좌로 분류되는 사회변혁노동자당의 강령은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 공격에 맞서 전 세계 노동자민중은 투쟁해 왔다.”라고 선언한다.
한겨레는 창간 30돌을 맞아 학술 담론으로 본 30년이라는 특집 기사를 내며 “군부독재에 막혔던 사회변혁 담론 봇물 터져”라는 제목을 달았다. “군부독재에 막혔던 사회변혁 담론 ‘봇물’ 터져 –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 | 학술·담론으로 본 30년”, 2019. 10. 19., 한겨레
기사는 1989년은 지성사 관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국민들의 역사 인식을 송두리째 흔든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 학문과 사상 영역에서 숨통이 트이는 시대가 됐음을 알게 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사회변혁의 중요한 학술과 담론으로 보고 있다.
노동자연대는 자신들의 기관지 <레프트21> 86호(2012년 7월)에 “조직 노동자 계급이 더는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불안정, 비정규 노동자층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리가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활동가들 속에서 흔히 제기된다.”라며 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즉 ‘프레카리아트’를 주목해야 한다는 논지의 기사를 실었다. “‘프레카리아트’와 사회변혁의 주체”, 2012. 7. 21., 레프트21
변혁의 주체가 일반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 노동자로 전환됐다는 선언을 통해 현재 ‘비정규 노동자’라는 단어가 노동운동의 주된 슬로건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범 운동권은 <법철학>, <역사철학강의>의 헤겔과 <자본론>의 마르크스에 심취했던 이유에 대해 “변혁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답한다. 이처럼 좌익진영에서 쓰는 변혁은 혁명이라는 단어와 별반 구분이 필요 없다. 니부어가 변혁은 급진적인 혁명이라 했던 것은 교회 안팎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할렐루야 교회 전경. 2012년 당시 ‘건축비 800억’으로 언론에 보도되어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의 한반도 문제 인식


필자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통찰은 사상적인 맥락에서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월드뷰> 2023년 10월호). 문화가 어떤 지적 산유물이라면 그 문화의 출처인 지성, 즉 사상의 맥락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문화를 ‘어떠한 정신의 산물’이라 가정할 때, 문화를 논하면서 지리적인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을 강의하면서 사상에 의거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지리적 조건으로 분석했다. 예를 들어 고지대 주민들의 특성은 법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아 극적으로 환대하기도, 극적으로 약탈하기도 하며 칭기즈칸과 같이 평화롭게 살다가 느닷없이 무서운 기세로 문명국을 덮치기도 하는 특성이 있고, 골짜기의 평지는 농업이 생업이기 때문에 토지 소유와 관련된 법률이 등장하기 마련이라 국가 성립의 조건을 갖춘다는 식으로 민족정신과 역사의 발전과정을 분석했다. 헤겔은 이러한 분석의 이유를 아래와 같이 말한다.

자연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정신은 저마다 특수한 형태를 띠고 공존한다.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 자연이란 것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의 그러한 구분은 우선 민족정신을 낳은 특수한 가능성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민족정신의 지리적 기초이다(<역사철학강의(동서문화사)> 86쪽).

지리적인 특성상 외세와 더불어 가장 험악한 공산주의 세력을 맞닥뜨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변혁’이라는 단어가 급진성을 내포하고 ‘혁명’과 대치되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작년 5월 제4회 통일선교공로상 수상자로 앞서 언급했던 김상복 목사가 선정됐다. “제4회 통일선교 공로상에 김상복 목사”, 2023. 5. 11., 국민일보
북한 선교활동과 구호활동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인정받은 공로 중에는 평양에 있는 봉수교회 건축에 동기 부여한 것과 재건축을 지원한 것이 포함됐다. 기자 출신이자 북한 사역자인 김성욱 지저스웨이브 대표는 봉수교회가 외화벌이 창구로 쓰인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평양 봉수교회는 김정일 정권이 남한의 선교헌금을 빨아들이는 외화벌이 및 대외선전용으로 만든 ‘가짜교회’이다. … 공산주의 혁명 투사임을 다짐하는 북한의 가짜 목사들은 사찰의 가짜 승려들과 함께 종교의 허황됨을 주제로 매년 논문 한 편을 써야 한다. 비극적 희극은 기독교적으로 최악의 이단 사이비 집단과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바치는 남한의 기독교인들이다(<북한을 선점하라>, 73, 75쪽).

변혁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재단법인 한빛누리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정림건축은 평양과학기술대학도 지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에 대해서 김성욱 대표는 이렇게 지적한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은 기독교계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평양과기대는 2001년 곽 목사(곽선희 소망교회 원로목사)의 방북으로 대학설립원칙협의가 이뤄진 후 장장 7년여 만인 2009년 하반기 개교했다.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해 재단과 북한 교육성이 맺은 계약서에 따르면 … 북한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독교계 지원 취지와 무관하게 평양과기대는 결과적으로 김정일 정권 유지 강화 수단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앞의 책, 81쪽).

북한 해커 양성 대학으로 알려진 미림대학(김일성정치군사대학) 출신 장세율 겨레얼통일연대 대표는 “평양과기대의 최고 인재들 중 일부는 군부 조직에 동원돼 대남공작원, 특히 사이버 전사로 활동하게 된다. 평양과기대의 설립부터 운영까지 한국과 해외 교민사회, 종교계의 후원금으로 이뤄져 우리가 북한 사이버 전사를 키워주는 꼴이다.”라고 지적했다. “우리 돈으로 만든 평양과기대, 사이버전사로 갚다니…”, 2015. 11. 26., 데일리안
평양 출신인 한빛누리 초대 이사장 김정철 회장은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와 북한 지원사역을 했으며, 2004년 민족화해 사업과 교육, 선교를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 https://www.thebrightfoundation.org/설립자-소개
민족의 화해라는 건전한 차원에서 정림건축이 평양과기대 건립을 도운 것이겠지만, 결국 남북의 문제는 화해가 아닌 한반도 유일 합법 국가의 헌법체제에 반하는 사이비 우상체제의 종결로 끝나야 할 문제다.
변혁자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입장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림건축의 실질적인 리더(CPL, 철학적 리더)이자 나들목교회의 담임인 김형국 목사는 ‘안팎의 변혁’의 일환으로 ‘세상의 소수자 사랑하기’를 주장하고 있다. 나들목교회는 공예배 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독특한 순서를 갖는데, 설교를 들은 후 결단한 내용을 주보 삽지에 적어 내는 것이다. 김형국 목사의 2016년 10월 16일 “성 소수자로/와 함께 살아가기” 설교를 듣고 이렇게 적어 낸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 아직도 너무나 어려운 것들이 많고, 저는 여전히 성 소수자입니다. 저의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인 제 성적 지향을 직시하고 수용해 줄 공동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령, 젠더, 인종 같은 다른 문제들에서 소수자 됨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늘 약한 자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쉽게 내뱉는 발언이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끊임없이 제 죄성을 인지하고 극복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https://nadulmok.org/?page_id=6997&wr_id=3667

폭력적인 발언은 죄이지만 동성애는 죄가 아닌 사회로의 변혁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양심이 있는 신앙인으로서 동의할 수 없다. 이런 기독교의 변혁사상을 비주류라 치부할 것인가?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이미 한국 기독교의 주류다.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벌써 비주류가 됐다. ‘변혁’이라는 단어가 과연 성경적인 단어인가?


나가며 – 진정한 변혁(transform)은 개혁(reform)


캐나다 성서공회 회장이자 토론토 틴데일 대학교의 연구교수인 루펜 다스(Rupen Das)는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사회를 변혁시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의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라고 말한다. “세상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일 –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선교에서 ‘변혁’을 정의하기”, 2022. 9., Lausanne Movement

변혁이라는 멋진 단어 뒤에 성경에 반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다면 멀리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다. 지적 혹은 철학적 사유의 기본은 단어에 대한 엄밀함이다.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가 성경적 지성에 동의할 수 없다면 거절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문화를 다룰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의미가 숨겨져 있을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변화(transform) 되었다. 그리고 날마다 변화(성화) 되어야 한다. 그 변화된 우리의 선한 행실로써 올바른 가치와 문화를 사수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혁일 것이다. 사이비 우상체제 북한정권의 독주를 멈추게 하는 것,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고 구원에 초대하는 것, 세력으로서의 동성애를 막아내고 동성애자들을 예수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끄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변혁일 것이다.
결국 진정한 변혁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개혁(reform)이다. 신학이나 교의로서의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으신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찬양의 가사대로 말이다.


날마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리라
And everyday we‘re changing into Your image, more and more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Yes, by the cross we‘ve truly been transformed

  •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Thank You for the Cross)”

johnnyarvin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