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주의 혁명
2024-08-20월드뷰 AUGUST 2024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VIEW 8
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넥슨 등 게임 IT업계에 근무했고, 현재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보수주의 연구·활동 단체 트루스포럼을 설립하여 이끌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회복과 북한의 해방, 왜곡된 복음의 회복을 사명으로 품고 있다.
들어가며
대한민국 건국은 미국의 독립혁명에 견줄만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보수주의 혁명이다. 3·1 운동으로 태동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혁명을 통해 첫 번째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인 박정희혁명을 통해 굳건한 안보와 찬란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주의 혁명은 아직 미완의 과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날 이승만 대통령이 북녘의 동포들에게 다짐했던 해방의 약속이 실현되고, 김 씨 왕조의 폭압 아래 억눌린 북한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우리와 하나 되는 날,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주의 혁명은 마침내 완수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접근은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보수주의와 보수주의 혁명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세계 속에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보수주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보수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장, 그리고 그 완성을 가볍게 조망해 보고자 한다.
보수주의의 이해
보수주의란, 인간 이성을 맹신하고 폭주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성적 고찰에서 출발하고 다듬어진 사상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뿌리는 인류 사회에 보편적 가치기준을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긍정하는 토대 위에 형성되어 왔다.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시초로 평가되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은 프랑스혁명을 지지한 프라이스(Richard Price) 목사의 설교에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버크의 편지는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이 유한한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심오하고 광대한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견지에서 프랑스혁명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영국에서 시작된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미국의 건국과 성장을 통해 발전해 왔다. 보수주의의 기반인 성경적 세계관은 미국의 독립혁명과 레이건혁명을 비롯한 오늘날 보수주의 운동의 견고한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입국론을 제시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수주의 혁명은 가능한가
혁명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혁명처럼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면서도 참혹한 학살을 야기하기도 하는 것이 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이라고 하면 무책임한 극단주의자가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혁명이란 일반적으로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인데, 그렇다고 혁명이 반드시 발전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기존 질서를 완전히 개혁하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야기한 일련의 사건들의 경우다. 과연 그것은 어떤 상황일까? 보수주의 혁명은 가능한 것일까?
보수주의를 그저 점진적 개혁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크게 왜곡하는 면이 있다. 에드먼드 버크도 혁명적 방법으로만 제거될 수 있는 사회악이 존재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종교개혁과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을 지지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가 혁명을 지지하는 경우는 어떤 상황일까?
보수주의자의 혁명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있는 자유, 거짓을 떠난 진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본질적 가치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데, 이 가치가 훼손됨이 명백할 경우 목숨을 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의 혁명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보수주의자인 버크가 종교개혁을 긍정한 것은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교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왜곡되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천부 인권을 천명하며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보수주의 혁명의 좋은 사례다. 그런 점에서 이신론 또는 무신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 급진좌파 자코뱅이 주도한 프랑스혁명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보수주의란 시대와 상황에 상관없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이념이다.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소용돌이치는 정치·역사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천부 인권을 어떻게 보호하고 실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싸워 온 몸부림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수주의 혁명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혁명
1) 3·1 운동
보수주의 혁명은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있는 자유, 진리라는 보편적 가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3·1 운동은 대한민국 최초의 보수주의 혁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처리과정에서 한국의 적극적인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이루려 했다.
3·1 운동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보편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진실을 세계에 호소하며 한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한반도에서 자행된 일제의 폭압과 거짓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대항한 혁명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3·1 운동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바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초의 보수주의 혁명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의 불씨를 남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3·1 운동의 보수주의적 성격은 ‘기미독립선언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기미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며 시작한다. ‘自主民(자주민)’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다. 조선의 백성, 대한제국의 신민, 그리고 일제의 2등 신민이었던 사람들이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2) 이승만의 건국혁명
이승만은 국회개원식에서 “이 국회는 3·1 운동 때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진행한 국민대회를 계승한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첫 번째 보수주의 혁명인 3·1 운동이 대한민국 건국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혁명이 보수주의 혁명이라는 것은 그의 기독교입국론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제헌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했음을 선포하며 시작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독립정신’은 도대체 무엇일까? 전문의 작성자가 이승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제헌헌법 전문에 언급된 ‘독립정신’은 그가 한성감옥 투옥 중에 집필한 ‘독립정신’과 분리할 수 없다. 이는 곧 기독교를 바탕으로 영국과 미국 같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적 유산을 바탕으로 제헌의회는 기도로 시작했다. 3·1 운동 직후,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거행된 제1차 한인대회 결의문은 “우리의 희망은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임을 언급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상의 내용들을 돌아보면 이승만의 건국혁명이 유대-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 혁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을 국가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강요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종교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통해 형성해 가는 것이지 국가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입국론은 중세 가톨릭이 지향했던 기독교 신정국가 건설과는 구별된다. 또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보수주의 혁명은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제시한 보편적 가치들은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류 사회의 보편적 가치기준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박정희의 산업혁명
서강대학교 강정인 교수는 에드먼드 버크를 인용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사실상 ‘보수주의의 적’으로 평가했다. 좌파적 시각에서 보수주의를 분석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보수주의를 퇴보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정말 타당한 것일까? 보수주의가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있는 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고,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긍정하는 태도임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과연 박정희를 보수주의의 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5·16은 형식적으로 쿠데타이며 군사 정변이다. 하지만 당시 불안했던 국내외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5·16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련의 결단을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4·19 직후 대한민국의 성장률은 급락했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1천만 노동인구의 절반이 직업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물가는 전년 대비 40% 가까이 올랐고 1961년 3월에는 농업 위기로 인한 식량난으로 27,456가구가 정부의 도움 없이는 당장 굶어 죽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혼란의 극치를 보였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는 횃불 데모가 횡행했다. 대한민국의 소요 사태를 조장하기 위한 북한의 직접적인 개입도 있었다. 미국의 윌슨센터는 4·19 이후 북한이 진보정당과 단체들을 직접 지원했다는 증언이 담긴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유신에 대한 평가도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언뜻 보면 유신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건이다. 그러나 닉슨독트린을 비롯해서 국가존립 자체를 위협하던 유신 전후의 국제정세와 북한의 도발을 고려하고, 경제개발의 국가적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유신은 오히려 실질적 민주주의를 수호한 조치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북한의 도발은 어느 때보다 거셌다. 베트남 전쟁에 지친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베트남 철군을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주한미군의 절반인 2만 명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중공의 유엔 가입을 허용했다. 그 여파로 대만은 유엔에서 쫓겨났다. 이런 흐름 속에서 베트남은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에도 불구하고 1975년에 결국 망했다.
당시 긴박했던 국제정세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가 심각하게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겉으로는 미중 데탕트(détente)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 안에서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만 명이 학살당했다. 캄보디아에서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 폴 포츠가 집권하고,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면서 300만 명을 학살했다. 이것이 유신 전후의 국제정세다. 무장공비 도발을 꾸준히 감행했던 북한의 난동은 이러한 국제적 환경의 연장선에 위에 있었던 것이다. 닉슨독트린의 원래 계획대로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했다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한국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강의 기적’은 유신을 통해 가능했다. 유신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종속이론에 바탕을 둔 내포적 공업화를 주창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원점에서 재고할 것을 선언했다. 만일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면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에 단행한 유신은 경제발전의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항제철에서 쇳물이 처음 나온 것은 1973년 6월이었다. 대한민국의 철강산업과 자동차, 조선산업은 모두 그 이후에 이뤄진 기적이었다.
안보는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다. 대한민국의 본질적 가치와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혁명은 에드먼드 버크가 긍정한 종교개혁,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면 된다.’는 자조 정신을 강조하고 실적과 결과를 중시하며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한 점에서도 책임 있는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그가 진행한 경제개발은 책임 있는 자유의 원칙이 두드러진다. 새마을운동은 동일한 자원을 마을마다 지원하고 이에 대한 성과를 평가하여 우수마을에 더 큰 혜택과 지원을 제공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적용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수마을을 지원했기 때문에 야당 지역구에서 우수마을이 많은 경우도 있었다. 이에 여당 의원들 항의하기도 했지만, 박정희는 공정한 기준에 따른 신상필벌 원칙을 철저하게 유지했다. 이는 자유와 책임의 기본 원칙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부패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정력을 오로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6·25 전쟁에 관한 남침유도설을 주장해 좌파 진영이 자주 언급하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의 지적이다. 박정희의 산업혁명은 공산주의라는 거짓의 폭압으로부터 국민의 생존과 존엄, 안위를 지켜내고, 책임 있는 자유의 원칙을 시장에 충실히 적용해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수정마르크스주의인 사민주의가 품고 있는 달콤한 거짓에 대항해 자조 정신의 진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보수주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주의 혁명의 완성, 북한 해방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3·1 운동에서 태동한 대한민국 보수주의 혁명은 이승만 혁명과 박정희 혁명으로 열매를 맺었지만, 아직 그 사명을 다 완수하지는 못했다. 국회개원식 축사에서 이승만은 이북동포들이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합석하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 또 휴전협정으로 북한의 해방과 통일이 막히자 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에게, 여러분을 해방하는 우리 민족의 사명은 성취되고야 말 것임을 약속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원래 모습은 ‘한반도 전체’를 상정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를 향한 건국정신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4조를 통해 제헌헌법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도 궁극적으로는 평화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의 극심한 도발과 격동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민의 생존과 발전을 지켜내고, 마침내는 자유의 파도가 되어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자유의 파도가 북한을 덮는 날, 3·1 운동으로 시작되고 이승만·박정희혁명으로 열매를 맺은 대한민국 보수주의 혁명은 마침내 올곧이 완수될 것이다. 또한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원형을 완성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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