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70주년을 기념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70주년을 기념하며

2024-08-18 0 By 월드뷰

조평세 (1776연구소 대표)

영국 런던 킹스컬리지(KCL)에서 종교학(BA)과 전쟁학(MA)을, 고려대학교에서 북한학(Ph. D.)를 공부했다. 현재 1776연구소 대표와 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이사로 활동하며 영미 보수주의를 한국에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역서로 <레이건일레븐(2020)>, <예수는 사회주의자였을까(2021)>, <사회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2022)>,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2023)>,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2024)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70년 전인 1954년 7월 26일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정부 수립 2년 만에 발발한 6·25 전쟁이 7·27 협정으로 휴전 국면에 들어간 지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조인되었지만, 양국의 의회 비준과 한미동맹의 공식발효(10.17)는 약 100여 일을 앞둔, 한창 물밑 실무협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도착 다음 날인 27일 한미 간 최초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2주 동안 미 의회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 알링턴 국립묘지 및 링컨 기념관 참배, 한미 양국 공동성명 발표, 각종 만찬 연설과 기자회견, 뉴욕 영웅 퍼레이드, 조지워싱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수여, 유엔본부 방문, 트루먼 전 대통령과의 만남, 시카고·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및 하와이 방문 등의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미국인들의 뜨거운 환대와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유학 시절, 그리고 이후 독립운동 시절 미국에서 겪었던 고뇌와 외로움 속 힘겨운 투쟁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는 미국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인 이 방문의 의미를 되새기고 올바로 기념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한미동맹 바탕에 ‘신앙동맹’ 있었다

역사 속 모든 동맹이 그러했듯이 동맹을 맺는 것은 쉬울 수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국제정치사에서 방위조약의 수명이 평균 9년 반에 불과하다는 연구가 이를 잘 드러낸다. 1954년 정식 발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지난 70년 동안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지정학과 국제정치에 놀라운 혜안을 가졌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과 북한 정권의 끊임없는 위협 등이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70년 전보다 더 이전의 70여 년 동안 두 나라가 공유한 기독교적 사상과 정신적 바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884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뿌리내린 ‘복음과 신앙’이다.
작년 4월 27일, 윤석열 대통령도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 헌법의 기초가 되는 자유와 연대의 가치를 전해주었다.’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언급했다.
미국의 6·25 참전과 이후 한미동맹의 바탕에는 양국 기독교인들 간의 신앙동맹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빈으로 미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계단을 올라가 이승만을 맞은 사람이 있다. 바로 우남(雩南)이 독립운동 시절 다녔던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담임목사 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Frederick Brown Harris)다. 해리스 목사는 이미 한국 전쟁이 있기 전인 1950년 초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대한민국 태극 훈장을 받았다.
이승만연구원의 유지윤 연구원과 김명섭 교수의 2018년 논문 ‘프레데릭 B. 해리스의 한국 관련 활동: 이승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한미관계는 물론, 미국의 6·25 전쟁 참전 결정에도 해리스 목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무려 24년 동안 미 상원의 원목으로 재직했던 해리스 목사는 미국 대통령은 물론 영국 수상, 중화민국 최고지도자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등 세계 지도자급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며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 비준에 앞서 신속하게 미군을 파병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해리스 목사를 통해 이미 한국의 상황을 전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터지기 약 한 달 전,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급 서한을 보내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한국의 이승만을 국빈으로 초청할 것을 요청했다. 해리스 목사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이루어졌던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파병 결정은 이러한 해리스 목사의 사전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에도 해리스 목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1956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그러했듯이, 그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에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정신과 가치관이 건국 이전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두 나라의 동맹 또한 그러한 정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맺어졌다.

영화 “건국 전쟁”을 통해 1954년 이승만 美국빈 방문 뉴욕 카퍼레이드 영상이 70년 만에 공개되었다.


70년 전 미국에서 오늘날의 미중 충돌 예언한 이승만

1954년 7월 26일 워싱턴에서 큰 환영을 받으며 비행기에서 내린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과 악수하고, 한국전을 지휘한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과 뜨거운 포옹을 나눈 뒤 비행장에 준비된 마이크 앞에서 미리 준비했던 원고를 치우고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즉흥연설을 했다. 50년 전 ‘나라 없는 인간’으로 미국에 처음 왔을 때와 가망 없어 보이는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이야기로 포문을 연 이승만은, 1950년 북한의 공산 침략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통탄했다.

“미국의 수많은 청년들이 한국을 도우러 와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이 ‘조금 겁을 먹는 바람에(a little cold feet)’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우리는 후퇴해야만 했다. 조금만 용기를 더 가졌더라면 우리 두 나라는 지금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8일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 이승만은 미국인들에게 더욱 큰 충격의 포고를 던진다. 33번의 기립박수 속에서 이어진 40여 분의 연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이 힘을 키워 침략 무력을 강화하기 전에 중국 대륙을 자유세계로 탈환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절반은 자유인, 절반은 노예로 나라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인용하며 “중국이 공산체제로 남아 있는 한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평화는 보장할 수 없고 절반이 공산주의인 세상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의 부상과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중공의 문제를 이미 내다보고 미국 국민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 기자회견에서는 의회연설을 보충하여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만약 중공군이 축출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구출될 수 없다. 중국이 공산화된 채 북한과 아시아 지역이 공산당 손아귀에 놓이면 대한민국은 둑립국가로, 민주국가로, 통일국가로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 미국이 지금 중공을 공격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단지 미국이 중국 대륙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중국 본토의 해방을 미국의 궁극적 목표로 삼으라는 것이고, 그 정책을 지금 함께 강화하여 실천하자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합동의회연설 당시 상원의장으로 바로 뒤에서 앉아 연설을 들었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은 훗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승만의 경고를 귀담아듣는 대신 중국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결국 닉슨이 스스로 우려했듯이 오늘날 중국은 자신을 살려준 미국과 국제사회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다. 닉슨은 사망하기 얼마 전인 1994년 그를 취재한 기자에게 “내가 [중국이라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낸 것 같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54년 이승만 美국빈 방문 뉴욕 카퍼레이드 당시 환호하는 시민과 화답하는 이승만 대통령


여전히 유효한 한미동맹의 기본 목표: 북한동포 해방과 중국 자유화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성명을 통해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할 대한민국의 기본 목표를 다음과 같이 재천명했다.

당분간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동포들을 구출해야 할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가서 미국이 대외정책의 기본 목표를 중국 동포 해방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양국 국회 비준을 통해 정식 발효되기 몇 개월 전에 미국에서 미국 국민의 기본 목표가 중공의 압제하에 놓인 중국 대륙과 인민들을 구출하는 것에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 목표의 달성을 도울 것이라고 미국인들에게 선언한다.

“언론인 여러분, 우리가 권고하는 정책은 중국을 구출하는 결단을 빨리 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국 정부와 위대한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에게 호소해 주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미국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국민들을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 불길을 진화하겠습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앞서 언급한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 한미 양국이 가진 공동의 사명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한국이 자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북한에서] 100만 중공군을 몰아내려 한다면 원자폭탄보다 무서운 수소폭탄이 순식간에 세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겁냅니다. 그렇습니다. 끔찍한 3차 세계대전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겐 수소폭탄보다 더 위력적인 무엇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손을 잡아 인도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만 저를 책망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 편에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물었던 링컨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공산세력에 굴복하는 것은 신앙의 종말을 뜻하기에 전쟁이나 죽음보다도 악한 것임을 재천명했다. 그것은 30여 년 후 ‘공산세력의 유화정책은 평화가 아니라 노예화’라고 선포하며 소련 공산권을 무너뜨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미리 엿보는 것과 같은 강한 신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후 3개월이 지난 11월 17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었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한미동맹은 아직 미완의 중대한 과업이 있음을 양국 국민 모두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놀라운 혜안과 안목으로 70년 전 한미 양국에 설정한 북한동포 해방과 중국 자유화이다.

pyungse.ch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