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구한 이승만의 농지개혁

대한민국을 구한 이승만의 농지개혁

2024-08-16 0 By 월드뷰

김승욱 (발행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조지아대학교(UGA)에서 경제사(Ph. D.)를 전공하고, 1989년 이후 31년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UNIDO 국제전문가로 말레이시아의 공업화 계획 수립에 참여했으며, 경제사학회와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통합가치포럼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9년에 9명의 교수들과 기독교학문연구회를 설립하여 12년간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 사단법인 기독교학술교육동역회로 발전시켰다. 현재는 월간 <월드뷰> 발행인, 굿소사이어티 산하 조사연구소 및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농지개혁의 중요성


대한민국이 시작될 당시에 농지개혁은 초미의 시대적 과제이자 사회개혁의 최고의 상징이었다. 경제사학자 권병탁 교수는 농지개혁의 한국사적 의의는 8·15 광복에 버금갈 만큼 큰 것이라고 했다. 농지개혁은 한국인들을 평등하게 했다. 양반제도의 물질적 기초가 되는 농지가 소작인에게 분배됨으로써 양반제도의 실제적 종지부를 찍었다. 일제 시대에 지주 계층으로 성장한 부농들의 농지가 모두 해체되었으므로 친일세력을 단죄한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농 자녀들이 보다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겨, 이렇게 축적된 인적자본은 1960년대 이후에 펼쳐진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대한민국이 농지개혁에 실패했다면, 중남미나 필리핀처럼 빈부격차가 크고 사회 통합이 안 되어 경제발전은 지체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농지개혁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던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여러 업적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경제적 업적은 농지개혁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폄훼하는 측에서는 농지개혁은 북한이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할 수 없이 했고,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으며, 이승만이 없었더라도 농지개혁은 했을 것이며,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철저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여러 잘못된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실패한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실시해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서술하는 반면, 성공적인 남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정적인 논조를 보인다.


북한의 토지개혁과 남한의 농지개혁, 어떻게 다른가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용어를 살펴보면 북한은 토지개혁이라고 불렀고, 남한에서는 농지개혁이라고 불렀다. 북한은 1946년 3월 5일에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여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농지(남한에서는 귀속농지라고 부름)와 ‘반동 지주’가 소유한 소작지 모두를 무상으로 몰수해서 무상으로 분배했는데, 불과 20일 만에 일시에 완결했다. 그래서 북한의 지주는 저항 한번 못하고 6·25 전쟁 때 토지 문서를 지니고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북한의 토지개혁은 그 분배지의 매매, 소작, 저당을 금지했으므로 실제로는 북한 농민은 경작권만 얻었을 뿐 사유재산권이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북한은 수확의 25%를 현물세로 거두었다. 북한에서는 토지를 분배 받은 소작농뿐만 아니라, 자영농도 세금을 내야 했으므로, 사실 북한은 전 농민을 소작인으로 만들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대지주가 된 것이었다. 이후에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된 농업협동화의 실현과 함께 종결되어, ‘무상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의 소유로 한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련은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전했다. 당시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에 남한 농민이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한의 토지개혁이 농민에게 별로 유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농민들이 인지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이 실시한(4월 12일 자)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9%가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인 소유 농지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68%가 앞으로 수립될 한국 정부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대지주의 땅을 경작자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는 데 72.9%가 찬성했다.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아닌 농지개혁이라고 불렀다. 1950년 4월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농지개혁법’에서는 산지 임야, 다년생 식물 재배지(과수원), 뽕밭, 염전, 500평 이내 채마밭, 위토(位土) 등을 제외하고 가격 산정이 가능한 농지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일본인이 소유했던 귀속농지는 대부분인 85%를 미 군정이 민간에 불하했고, 이승만 정부는 그 나머지와 3정보(町步) 이상을 보유한 한국인 지주의 농지만을 대상으로 했다.

북한 토지개혁 당시 농민들이 환호하는 모습
북한의 토지 개혁 선전물에 새겨진 ‘토지는 농민의 겄(것)’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는가?


이승만이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은 미 군정이 정권 이양 직전에 귀속농지를 매각하자, 이승만이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하는 것인데 미 군정이 했다’고 비판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리고 소위 수정주의적 현대사 연구자들은 농민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농지개혁을 단행했지만, 이승만은 지주 계층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입법 과정을 가능한 지연시켰다는 의회·정부 공모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근거로 ‘농지개혁법’이 정부 수립 후 11개월이 지나서야 입법화된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담당해야 할 농림부 장관에 지주 계급을 적대시한 혁신계의 조봉암을 임명했으며, 조봉암 장관은 실무책임자인 차관이나 농지국장 등에 후에 월북을 할 정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들이 정부안인 ‘농림부안’을 작성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다수당인 한민당도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지주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농림부안을 수정하려고 했을 뿐이다.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선의 길이라는 유진오의 설득에 호남 대지주이자 한민당 총수였던 김성수가 약간 망설이는 빛을 보이더니, “그것도 그렇겠다.”고 동의를 함으로써 이 말 한마디가 농지개혁의 문을 연 청신호가 되었다. 농지개혁을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국회를 주도했던 우익진영(한민당)이 반공국가를 건설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욕구에 따라 스스로 사유 농지를 포기했던 자주적 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이 마치 이승만의 업적이 아니라 조봉암의 업적처럼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조봉암은 농림부안이 제출된 직후에 비리 혐의로 사임 당해 농림부 장관을 불과 6개월밖에 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국회안은 지주에게는 높은 가격으로 보상하고 농민에게는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며 그 차액은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었는데, 이승만은 ‘이 안은 가난한 대한민국 정부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거부하고, 다시 논의를 거쳐 결국 1950년 4월에야 우리가 잘 아는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이는 미 군정이 실시한 귀속농지 매각 가격의 절반밖에 안 되는 매우 낮은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이렇게 농민의 요구와 지주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느라 농지개혁법 통과가 지연된 것이지, 이승만 대통령이 소극적이어서가 아니었다.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농지개혁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농지개혁법이 통과된 이후 농림부의 추진 과정을 보면 잘 나타난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한국 전쟁 중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농지개혁법이 공포된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10일이었지만, 그 후 3월 25일에 시행령이, 그리고 4월 28일에 시행 규칙이 발표되고, 농지분배에 관한 세부 규정과 요령을 정한 ‘농지분배점수제규정’은 6월 23일에 공포되었는데, 그 후 불과 이틀 후에 6·25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농림부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950년 4월 15일에 120만 호에 42만 정보의 농지분배를 완료했다고 발표하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정부는 만일 봄의 파종시기를 놓치게 되면 사업은 다시 1년간 연기될 뿐만 아니라 1950년도의 농사에 막대한 지장을 줄 것을 초래하게 된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파종기 이전인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발부하기 위해 사업을 강행했다. 이 예정통지서에 의의가 없으면 이 통지서에 적힌 농가의 소유로 ‘확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6월 9일부터는 보리 등 하곡에 대해서 이미 상환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의가 제기되지 않아서 확정된 농지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약 70~80% 정도라고 추정된다. 만일 이러한 행정적 조치가 강행되지 않고, 모든 법령이 공포된 이후에 사업에 착수한다고 기다렸다면 6·25 남침으로 인해 농지개혁은 사실상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은 3개월의 점령 기간에 소작지를 무상으로 몰수해서 무상으로 분배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기대와는 달리 농지를 분배 받은 남한 농민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매매 가능한 농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이 소유권이 보장되지 않은 농지개혁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6·25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북한군의 농지분배를 남한의 소작인들은 수용했을 것이고, 이러한 소문은 다른 지역에도 퍼져서 소작인들의 전의가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다.
6·25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남한의 농민들은 지켜야 할 자기 소유의 땅이 있었고, 그것이 곧 공산주의와 싸울 이유가 되었다. 그 결과 6·25 전쟁 기간 중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면서까지 공산주의와 싸웠다. 베트남 전쟁은 군사력으로 우수해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농지개혁을 6·25 전쟁 이전에 실시한 것은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7년 8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수해를 입은 영남지역 농가를 찾아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맺음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 147개국 중에 약 40개 국가는 건국에 실패했고, 또 다른 40개 국가는 국가의 존립이 위태한 상태이다. 한국과 대만은 방대한 농촌부문을 포함하면서 경제성장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은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던 시절에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공산주의의 위협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민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데, 농지개혁으로 우경화된 농민들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다. 대만의 경우, 장개석은 중국 대륙에서 부정부패에 의해서 모택동에게 패했지만, 대만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함으로써 정치 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후진국에서 토지개혁은 성공하기 매우 어렵다. 멕시코에서는 1821년 독립 이후 세 차례의 큰 토지개혁을 했지만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토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영농 능력이 없어서 다시 백인 지주에게 되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 같은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집단 농장도 생산성이 떨어져서 농민을 기아로 몰고 갔다. 베트남이나 필리핀도 미국의 요구에 의해 수차례 농지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에 협력한 인사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친일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재가 부족했던 시대에 인재들을 처벌하는 것보다 일제 시대 동안에 유리한 제도로 인해서 부를 축적한 토지 지주들의 농지를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소작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더 근본적인 친일청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농지개혁이 친일파 단죄의 효과는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양반 제도도 갑오개혁을 통해서 없어졌다고 하지만, 많은 양반 계층들이 각 마을에서 대규모 농지를 보유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지개혁 당시에 문중의 토지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 소유로 보고, 3정보 이상을 보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양반 계층의 물적 토대가 되는 농지가 분해되었기 때문에 양반의 기반이 사라졌다. 따라서 농지개혁이 조선 시대를 통해서 내려오던 양반 제도를 실제적으로 종식시킨 효과도 있다. 그리하여 신분사회를 넘어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발휘하여 추진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창건기에 태조 이성계가 단행한 과전법 이래 최대 규모의 토지개혁으로서 그 역사적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승만의 농지개혁 성공은 높이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