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 없다!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 없다!

2024-08-15 0 By 월드뷰

류석춘 (연세대학교 정년교수)

1955년 출생으로 1975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입학하여 1981년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rbana)에서 1986년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부터 2020년까지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일했으며,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2010~2015년). 대표 연구 업적은 The Korean Economic Developmental Path: Confucian Tradition, Affective Network (Palgrave, 2013),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기파랑, 2018)>, <유교와 연고(북앤피플, 2020)> 등이 있다.



한강 인도교 민간인 희생자 있었나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아군에 의해 폭파된 한강 인도교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를 두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2024년 2월 개봉한 영화 “건국 전쟁”이 논란의 방아쇠를 당겼다. 한강철교 아래 놓인 부유잔교 사진을 배경으로 필자가 ‘민간인 희생자는 없었다.’고 말한 장면이 관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최소 수백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다고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민간인이 아닌 경찰 70여 명만이 희생됐다’는 설명도 이어갔다(국방부, 1977, <한국전쟁사> 1권: 852쪽). 이를 두고 엄청난 논란이 벌어졌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직접 겪은 논란을 중심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진척을 만들어 낸 논점만을 뽑아 정리한다. 필자가 영화에서 한 주장을 뒷받침한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트만(Gordon Rottman)이 영어로 쓴 책을 김홍래가 번역해 2006년 출판한 <인천 1950(플래닛미디어)> 12쪽에 등장하는 사진과 캡션이고, 다른 하나는 신기철이 2014년 출판한 <국민은 적이 아니다(헤르츠나인)> 72쪽에 제시된 임인식의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두 책은 각 사진을 폭파 전 부유잔교가 만들어져 피난민이 건너는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로트만 저·김홍래 역, 2006, <인천 1950(플래닛미디어)> 12쪽.
신기철, 2014. <국민은 적이 아니다(헤르츠나인)> 72쪽.


이에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문제를 제기했다. 두 사진을 확대하면 철교의 트러스(Truss)가 기울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사진은 미 공군이 한강 다리 폭파에 성공한 후에 찍은 사진이라는 지적이었다. 확인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민간인 희생은 없었다’는 필자의 주장을 철회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김범수 명예교수가 중요한 자료 하나를 필자에게 전했다.
무려 1,200쪽에 달하는 <기록에 의한 증언, 광복 30년(도의문화사, 1975)>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 포함된 ‘특집 한국동란’ 꼭지의 ‘한강대교 폭파’라는 제목의 글(436쪽)은 “한편 이미 폭파 장치가 진행되고 있는 한강교의 일반인 통행은 이날 영시를 기하여 통행이 금지되었으며….”라는 기록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민간인 희생이 없었거나 극소수였다고 판단해야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기록에 의한 증언, 광복 30년> 책 표지
<기록에 의한 증언, 광복 30년> 서지사항
책의 ‘특집 한국동란’ 목차(405쪽)
‘일반인 통행금지’ 관련 기술(436쪽)


‘도의문화사 편집부’가 출판한 이 책은 아쉽게도 ‘일반인 통행금지’ 대목이 나오는 글의 출전과 필자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다만 책 속지에서 “신문기록에 의한 대사건 집대성”이란 부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글의 분량으로 보아 신문보다는 시사 잡지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이란 추론이 가능했다. 필자는 책이 출판된 1975년 이전 시사 잡지 전체를 뒤져서라도 출전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동시에, 애초에 필자로 하여금 ‘민간인 희생은 없었다.’고 주장하게 만든 두 사진은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찍힌 것인가 하는 궁금증 또한 불거졌다.
다행히 이 의문은 쉽게 풀렸다. 중공군 참전으로 평양을 다시 뺏긴 이후인 1950년 11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난중일기>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다들 봇짐을 지고 피난 길에 나섰다(<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269쪽).”
따라서 두 사진은 1·4 후퇴 전인 1950년 11월 말 서울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찍힌 사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장에 있던 네 명의 종군 기자의 증언


이즈음 캐나다 맥마스터대학교 송재윤 교수가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현장에서 생존한 세 미국인 종군 기자, 즉 크레인(Burton Crane, 뉴욕타임스), 기브니(Frank Gibney, 타임지 및 라이프지), 비치(Keyes Beech,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가 각각 쓴 당시의 특종 기사 및 이후의 관련 저작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3부작을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실었다.

맥마스터대학교 송재윤 교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3부작


이들 셋에 더해 여성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까지 총 네 사람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취재 차 김포에 도착한 시간은 27일 저녁 8시 전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버려진 지프차를 몰고 용산 기지로 갔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 대부분이 이미 수원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여성인 히긴스 기자는 마무리 작업 중이었던 라이트(Sterling Wright) 대령을 따라 이동했다. 나머지 셋은 지프차를 몰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대열에 합류했다. 28일 새벽, 지프차로 다리를 건너던 중 이들은 폭파로 날아갈 상판의 바로 앞 상판 끝부분, 즉 중지도 남쪽 1번 상판의 남쪽 끝과 트럭 한 대를 사이에 두고 차량 정체를 맞았다. 바로 그 순간 폭파가 있었다. 이렇게 이들은 폭파 현장의 생생한 목격자가 되었다.
크레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폭파와 함께 눈가에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렸다. 그가 당일 수원에서 작성한 인도교 폭파 관련 기사는 다음 날인 1950년 6월 29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기브니는 다리가 폭파될 때 조수석에 앉아 눈가에 찰과상을 입었으며, 쓰고 있던 안경이 박살났다. 당일 그가 쓴 기사는 1950년 7월 10일 타임지에 게재됐고, 같은 날 라이프지에 축약본이 들어갔다. 비치는 뒷좌석에 앉아 상처를 입지 않았다. 폭파 당일 작성한 기사는 같은 날짜인 1950년 6월 28일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 1면 특종으로 실렸다.
이들 종군 기자 세 사람이 쓴 당시 기사와 후속 관련 자료를 모두 꼼꼼하게 검토한 송 교수는 인도교 폭파와 관련해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용산 역전에서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거쳐 노량진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철길을 보여주는 1944년 지도다(중지도는 오늘날 노들섬). A는 6월 28일 새벽 2시 전후 몰려든 차량과 피난민 인파로 길이 막혔던 지점, B는 3인의 종군 기자가 탄 지프차가 트럭 뒤에 멈춰 서 있던 지점, 별표는 다리가 폭파된 지점이다. 당시 용산 강변과 중지도 북단은 습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른쪽 항공사진은 이 지도의 검은 박스 부분에 해당한다(출처: 송재윤,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2’, 조선일보, 2024. 3. 30.).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 남단 상판 폭격에 성공하는 순간을 찍은 항공사진이다. 왼쪽 아래로 폭파에 따른 연기가 보인다. 오른쪽 이미 끊어진 다리가 ‘한강 인도교’다. 인도교가 폭파된 지점으로부터 위로 두 겹의 타원이 보이는 장소가 중지도(노들섬)고, 그 방향으로 다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용산 쪽 입구와 연결된다. 이 사진 역시 용산의 강변과 중지도 북단이 습지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출처: 월간조선, 2013년 7월호).


첫째,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에 대한 통제가 다리의 중간 지점인 중지도(노들섬)가 아니라 인도교 북단 용산 쪽 진입 지점 즉 A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심각한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에 관한 기사의 기술에서 소달구지, 봇짐, 지게, 자전거 등을 운반하는 피난민 모습이 등장했다. 둘째, 군의 작전상 후퇴 과정에서 지도부가 폭파 시점을 잘못 판단해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들 기사에 등장하는 희생자의 절대다수는 군인 혹은 경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민간인(civilians) 희생에 관한 기록은 세 기자 중 기브니 만이 딱 한차례 언급했고, 나머지 2인은 중지도를 지나면서부터 아예 민간인의 존재 자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 교수는 “민간인 희생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절대다수 희생자는 군용 트럭을 타고 있던 군경이었다.”라고 결론 맺는다.


민간인 학살 괴담의 생성·둔갑 과정


한편, 송재윤은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의 증언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한국문원, 1995, 203쪽)>에서 한강 다리 폭파로 ‘500~800명의 인명 희생’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오지만, 이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하우스만이 폭파 7분 전 이미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폭파 현장에 있던 기자들 증언에 비해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의 7분 전 통과 기록은 전쟁사가 애플만(Roy E. Appleman)이 1961년 출판한 책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남으로 낙동까지, 북으로 압록까지) 33쪽에 나온다. 아래에서 다시 검토하겠지만 “가장 정보가 많은 미군 장교에 따르면 다리 폭파로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익사했다.”라는 문제의 기록이 등장하는 바로 그 문헌이다. 송 교수는 이 대목에서 500~800명 사망의 증거로 제시된 주석 중 하나가 하우스만의 인터뷰라는 깨알 지적도 잊지 않았다.
하우스만의 전언은 지금까지 마치 미군의 공식 입장처럼 기록에서 기록으로 전해졌다. 폭파 7분 전 다리를 건너 지체 없이 수원으로 달려간 하우스만이 현장의 실상을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가 퍼뜨린 수백 명 사망설이 횡행함을 개탄하며 송재윤은 “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100마리 개들이 그 소리를 듣고서 떼로 짖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개탄했다.
이와 같은 정리를 하면서 송재윤 교수는 기브니의 기사에 등장하는 민간인에 관한 표현, 즉 “다리 위로 쏟아져 밀려드는 피난민(milling crowds of civilian pouring over the bridge)” 이 벌어진 장소가 중지도가 아닌 용산 방향의 다리 북쪽 입구인 A 지점이었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제기했다. 그래야 비치의 기록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송재윤은 이어간다. “만약 기브니의 말대로 중지도에 피난민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면 왜 비치와 크레인은 그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종군 기자라면 피난민의 동향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전쟁 상황에서 전사하는 군인들보다는 희생당하는 민간인의 모습이 더 특종감이기 때문이다(송재윤, “미 종군 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2”, 조선일보, 2024 3 30.).”
인도교 폭파를 기록하면서 장소를 헷갈린 경우는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계급이 소위였던 정훈장교 이창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중지도 파출소 앞까지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달려온 두 장교가 있었다. 육본 작전국장인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인 정래혁 중령이었다(조선일보, 1981. 6. 6., “전환기의 내막 111회”).” 그러나 당시 이 두 사람은 용산 쪽 다리 입구에 막혀 다리로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지도 파출소에 갈 수 없었다. 용산 쪽 다리 북단에 있던 또 다른 파출소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정래혁 중령은 “한강교 폭파를 연기시키려고 차량의 물결을 헤치고 겨우 북한강 파출소 앞에 이르렀을 때 폭발을 당했어요.”라고 기록했다(중앙일보, 1970. 6. 15.,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가장 길었던 3일 33회”). 장창국 대령 역시 “물밀듯 밀려 나가는 피란 대열 때문에 한강 인도교 어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서 하차 후 도보로 몇 발자국 걷자마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함께 한강교가 폭파되고 말았다.”고 기록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1권: 555쪽).
한강과 용산의 지형지물에 익숙한 국군 정훈장교 이창록마저 회고록을 쓰면서 이런 실수를 했다. 취재차 한국에 난생처음 와서 6시간가량 난리 통에 정신없이 돌아다닌 기브니는 비 오는 밤 한강 인도교 위에서 차량 전조등에 의지하며 지형지물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죽음을 오가는 체험도 했다. 그런 그가 쓴 기사에서 구체적 장소를 헷갈릴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필자는 송 교수 추론에 한 표 던진다.
더욱이 박종인 기자는 최근 글에서 송재윤 교수의 분석을 보완해 그래픽으로 ‘민간인 수백 명 사망설 괴담 계보’를 깔끔하게 정리했다(“74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6·25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실”, 조선일보, 2024.6.8.). 괴담이 등장하는 단계를 정리한 박 기자의 설명을 그래픽 자료와 함께 따라가 보자. 아래 1)에서 4)까지 박 기자의 분석을 옮겼다. 필자가 설명을 추가한 부분은 텍스트에 엷은 회색으로 음영 처리를 했다. 필자가 추가한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1) 대량 희생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미국 여기자 히긴스다. 1951년 책에서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한국군이 자기네 사람(their own men) 수백 명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Marguerite Higgins, 1951, War in Korea, Doubleday & Company, 26쪽).
그러나 이 문장 바로 앞 문장에서 히긴스는 ‘그들은 트럭을 타고 다리 상판에 있던 자기네 군대를 날려 버렸다.’고 썼다. 그러므로 ‘자기네 사람 수백 명’은 ‘자기네 군인 수백 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2) 10년 뒤 1961년 미국 군사학자 애플만이 미군 장교 인터뷰를 토대로 ‘사람(people) 500~800명이 폭사 혹은 익사했다.’고 기록했다. 인터뷰한 사람은 라이트 대령, 하우스만 대위 등 군사고문단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목격자’가 아니었다. 현장 상황을 보지 못하고 전해 들은 혹은 짐작한 간접 증언자들이다. 라이트는 다리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하우스만은 폭파 7분 전 이미 다리를 건넜다(Higgins, 앞의 책, 25쪽; Appleman, 앞의 책, 33쪽).

3) 1977년 국방부는 <한국전쟁사> 1권 547쪽에서 ‘손실이 인원(人員)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라고 서술했다. ‘간접 증언자’들이 ‘목격자’로 바뀌었다.

4) 1995년 국방부가 편찬한 대중용 <한국전쟁> 상권 161쪽에서 또 바뀌었다. ‘약 500~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고 기술했다. 이번에는 ‘인원’이 ‘피난민’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관련 주석에는 ‘애플만 1961년 책과 1977년 <한국전쟁사> 인용’이라 적었다.

아래 그림에서 박종인 기자는 네 단계에 걸친 괴담의 생성·둔갑 과정을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했다. 그림에 필자가 추가한 내용 역시 회색으로 음영 처리했다. 이걸 보고도 ‘대한민국 국방부가 말했으니’ 혹은 ‘미군 기록에 나오니’ 괴담의 이야기가 맞다고 계속 주장하는 인기 역사 강사 황 모 씨는 자숙해야 한다. 민간인 희생 괴담은 결국 ‘군인 수백 명’을 ‘피난민 500~800명’으로 둔갑시키면서 만들어졌다.

출처: 박종인, “74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6·25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실”, 조선일보, 2024.6.8.


박종인 기자는 이 분석 외에도 28일 폭파 당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촬영해 홍보물로 만든 사진첩 “서울 한강교에서의 적의 파괴 및 국방군의 참살 장면”에 포함된 사진 17장 분석을 통해서도 민간인 수백 명 희생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잘 보여줬다. 이 사진들은 상판 위 시신의 분포가 비교적 드물고 또한 민간인 복장을 한 시신이 거의 없음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출처: 박종인, “좌파의 날조, 우파와 국방부의 게으름이 ‘학살 괴담’ 키워”, 월간조선, 2024년 7월호.


다리가 통제되고 있어 민간인이 다리로 진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또 있다. 영화를 본 젊은 관객의 제보로 김덕영 감독은 2024년 3월 17일 강원도 홍천에 사는 제보자의 할아버지를 영상 인터뷰할 수 있었다. 1941년 출생이라 다리 폭파 당시 9세였던 83세의 김중남 할아버지는 “삼각지에서 용산역 방향으로 어머니와 동생 둘과 함께 피난 가다가 수많은 피난민이 다리에서 민간인을 통과시키지 않아 남하를 포기하고 되돌아오고 있었다.”고 또렷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증언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3qFzEO2_ik
.

그렇다면?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은 ‘없다’ 혹은 ‘거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sclew@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