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민중 항쟁인가

제주 4·3 사건이 민중 항쟁인가

2024-08-14 0 By 월드뷰

이주천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역사수호위원장)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원광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 조지타운대학교 방문교수, 미주리 세인트루이스대학교 풀브라이트 방문교수, 애국정책전략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역사수호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이 관객 100만 명 돌파하자, 이승만 저격수를 자처한 어느 학원강사는 “건국 전쟁”을 비판하며 ‘이승만의 25가지 과오’에 대한 영상을 황급히 올렸다. 그의 역사 인식의 근본적 문제는 단독정부로 건국한 남북한 분단체제를 불완전한 국가로 인식한 것이다. 이는 필자가 비판했던 강만길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한 분단체제론을 그대로 수용·답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승만에 편견과 오류에 가득 찬 점도 고스란히 강 교수로부터 물려받았다. 이승만을 향한 그 강사의 증오심은 대통령 호칭을 생략하고 그냥 ‘이승만’인데 비해 김구, 김규식, 그리고 여운형 등은 모두 ‘선생님’으로 호칭, 존경심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유별나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한 통일정부를 위해 평양행을 결행한 점을 (비록 김일성에 이용당했지만) 높이 평가한 반면, 이승만은 정읍선언에서 단정 수립을 주장하여 분단을 고착화했으며, 제주 4·3 사건의 학살자라는 것이다. 이 유튜브 강의에서 이승만을 ‘희대의 학살자’로 단정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영화 “백년 전쟁”의 아류이다. 이 글을 통해 그의 여러 잘못된 주장 가운데, 제주4·3 사건에 대한 그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 지적하고자 한다.


제주 4·3 사건을 민중 항쟁으로 이해


1948년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그 강사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제주 4·3 사건 당시 김달삼이 이끈 유격대는 500명에 불과했는데, 이 사건에서 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학살당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나? 이런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그는 제주 4·3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첫째, 그 강사에게 제주 4·3 사건은 반란이 아니라 ‘민중 항쟁’으로 해석된다. 주동자들이 통일정부를 주장했기에 폭력이나 봉기의 명분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4·3의 배경과 주동자들의 목적에 대한 인식에서 통일정부를 주장하는 이상적 명분론을 크게 부각하게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현실주의자와의 큰 간격이 생긴다.
당시 국제정세를 재검토해 본다면,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했지만 통일정부 수립은 현실적으로 난망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동 중부 유럽에서 처칠이 경고했듯 공산괴뢰정부가 지배한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고, 이어서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이런 적색 파상 공세에 반발해서 1947년 트루먼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은 대소봉쇄정책을 추진했으며, 냉전이 심화되었다. 전후 중국은 국공합작이 실패하고 내전이 격화되었으며, 장개석의 비협조에 화가 난 미국은 국민당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여 1949년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앞두고 있었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한 국면이었다. 그런 마당에서 미소공위는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반탁운동을 벌였던 우익인사들의 임정 참여문제를 놓고 미소 위원들 간에 설전이 벌어져 파탄 위기에 봉착했고, 10월에는 소련대표단이 철수하면서 끝장이 났다. 한반도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 정부는 좌익들이 간절히 염원했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4·3 사건 주동자들의 이념적 성분과 그들의 목표는 당시 건국을 추진한 정치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제주도당 남로당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목표는 제헌의회를 구성할 1948년의 5·10 총선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3년 5개월 전인 1945년 9월 6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일부가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재건이 1차 목표였다. 이것은 1947년 가을, 한반도 통일정부 구상에 대한 유엔의 총선 결의를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북한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노선에 부응한 것이었다. 방법은 무장 폭동으로 예고도 없이 1948년 4월 3일 12개의 제주 경찰지서를 야밤인 새벽 2시경에 습격한 것으로, 1948년 8·15 건국 이후 항복을 거절하고 반란의 형태로 이어졌다. 여기에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강제로 인질로 끌어들여서 결과적으로 희생자가 커진 것이다.
둘째, 남북한 체제 비교를 통한 역사 인식의 문제이다. 해방 이후부터 건국까지 남한만 검토할 것이 아니라 남북한 체제를 비교·검토해야 한다. 이미 북한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북한을 민주기지로 한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전초기지로 설정했으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조직하여 준정부 조직을 갖추면서 다음 해인 1947년까지 친일지주 청산을 구실로 농민들에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은 1946년 8월 공장·기업소·철도·은행 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법령을 공포한 데 이어, 12월 자연 자원과 산림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앙집중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갖추었다. 1947년 12월 초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 사회주의(공산화) 과정에서 신의주반공학생의거(1945.12.)가 발생했으며, 기독교도가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토지와 재산, 그리고 정치결사 및 신앙의 자유가 박탈당한 북한 주민들은 맨몸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남한의 미 군정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거론된 신탁통치의 정신인 좌우합작에 1947년 7월 2일, 미소공위가 파탄이 날 때까지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 강사는 해방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오손도손 협상했다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정부가 성립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지만, 이것 역시 강만길의 역사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북한을 민주기지로서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스탈린의 강력한 의도와 달리, 동독을 이미 손아귀에 넣었고 오스트리아 점령에 대한 스탈린의 비중이 낮아진 의도를 정확하게 분간하지 못한 유럽 현대사 지식에 대한 무지와 오류에서 생긴 착각이자 희망 사항일 뿐이다.


강경진압 작전의 배경과 진행 과정


셋째, 희생자가 커진 강경진압 작전의 배경과 진행 과정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먼저 폭동 반란을 일으킨 제주도당 남로당이 정부의 강경진압을 부추긴 점에서 그 책임이 크다. 1) 주동자인 김달삼이 남조선의 지하 선거를 통한 인민투표명부를 들고 제주도를 탈출하여 1948년 8월 21일,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혁혁한 폭동의 전과를 발표하였고, 연설 마지막에 ‘스탈린 원쑤 만세’를 불렀던 점, 2) 9월 15일부터 인민유격대의 공격 재개와 테러로 수 명의 경찰관들이 사상자가 발생하고 납치된 점, 3) 9월 20일부터 제주도 관공서와 학교 등지에서 인공기가 펄럭인 점, 4) 인민유격대의 공격 재개 직전에 제주도의 말단 행정조직이 면장과 구장의 연이은 사표로 마비된 점, 5) 1948년 4월 주한미군이 철수를 결정하고, 9월부터 비밀리에 철수가 시작되어 정부의 안보 불안을 격화시킨 점, 6) 제주도 반란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여수의 제14연대가 거절, 반란을 일으킨 여순반란사건(1948.10.19.)이 터진 점, 7) 설상가상으로 10월 24일, 인민유격대 반란군 사령관이 이덕구로 교체되고, 당일에 정부에 선전포고하면서 ‘국방군과 경찰에게 보내는 호소문’ 약 3천 매를 살포하여 정부를 자극한 점, 8) 미수에 그친 군대와 경찰의 프락치 사건 군 프락치 사건은 10월 28일 송요찬 연대장이 홍순봉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하다가 혼선에 의해 적발된 사건이다. 9연대 강의원 소위 등이 여순반란사건을 모방해서 거사를 기획했다가 탄로가 나서 인민유격대와 내통한 김창봉 소위 등 80명을 검거했다. 경찰 프락치 사건은 11월 7일, 제주도 적화 혁명 완수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으로 11월 1일, 거사 직전에 경찰 프락치 서용각이 전향하여 제보하면서 프락치 83명을 검거한 사건이다. 통신 장악, 유치장 개방, 무기고 탈취, 경찰 및 정부 관료와 우익인사 암살, 전 관공서 방화를 계획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김영중, <제주 4·3 사건 문과 답(나눔사)> 개정판, 333-334쪽 참조.
등은 이승만 정부가 강경방침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48년 10월 22일, 전남에서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2월 1일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반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처벌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반란 진압이 늦어지자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은 초조해졌다. 아니 오히려 초조하지 않은 것이 국가 지도자로서 비정상적일 것이다. 그 이유는 미군 철수가 임박했고, 더 나아가 1948년 12월 파리에서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문제가 거론되는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안보와 유엔 외교에서 일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1947년 가을, 유엔에서 한반도의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지만, 스탈린과 김일성의 비협조로 유엔한국위원단이 38선을 넘지 못하고 한반도 총선이 물거품이 될 즈음 3월 12일, 유엔 소총회에서 ‘한국의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 실시’를 결의했고 5·10 총선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우여곡절 끝에 힘겹게 건국된 것이다.
제주 4·3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정면에서 방해한 중대한 반역 사건이다. 이것은 마치 피투성이의 신생아가 ‘응애’ 울음을 터뜨리면서 배고프고 굶주린 어머니의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무뢰배가 출산마저 방해한 못된 짓거리에 비유할 수 있다.


송요찬 진압사령관 부임과 게릴라전의 특성


초대 진압사령관으로 9연대장 김익령 대령이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의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경무부장 조병옥의 질책을 받고 해임되었다. 그 뒤 박진경 대령이 5월 6일 11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진압에 박차를 가할 즈음에 불행하게도 6월 18일 새벽,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이 쏜 M-1 총에 의해 취침 중 암살되었고, 6월 21일 최경록 중령이 부임했다. 그리고 7월 15일, 송요찬 중령이 부임했으며 12월 30일까지 근무했는데, 이 3개월 동안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강경진압으로 인해 희생자가 커질 수밖에 없었지만, 4·3 사건의 투쟁 양상은 정규전이 아니라 게릴라전, 즉 유격전의 성격이기에 적과 아군의 피아식별이 매우 어렵다. 인민유격대들은 제주도민들을 볼모와 방패막이로 삼고 전투했다. 공비와 양민들을 분간하기 매우 어려웠기에 작전이 힘들고 양측의 피해가 커져 갔다. 이런 전쟁의 특성이 희생자 수치를 더욱 증가시켰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군 병력이 증파되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란에 가담하여 정부의 강경책에 불을 질렀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이 선포되었다.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포고문에서 “본토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해서 군은 철저히 숙청할 것이니 도민들은 협조해 줄 것”을 언급했다. 이러한 송요찬의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무장반란은 사건 발생 무려 9년만인 1957년에 종결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1949.1.21.)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이것은 당시 긴박한 상황에 미루어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 지도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3만 명’ 희생자 수치는 턱없이 과장된 수치


유튜버 강사가 언급한 ‘3만 명’ 희생자 발언은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무장대 500명을 토벌하려고 군경이 도민 3만 명을 학살했다고 설명하는 것에 공유한 주장으로 가당치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 편찬한 <제주 4·3 정부보고서>에는 희생자들을 2만 5,000명~3만 명으로 책정했으나, 10여 년에 걸쳐서 고무줄처럼 늘렸기에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이미 희생자로 결정된 자 중에는 생존자, 일본 도피자, 월북자, 6·25 당시 강제 납북자, 자연사한 사람, 심지어 4·3 사건과 무관한 끼어넣기 식의 인명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이를 감안하면 15,000명에 못 미친다(김정중, <제주 4·3 사건 문과 답>, 273쪽). 1948년 당시 제주도 인구가 약 27~28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정부보고서가 불신을 받는 이유는 희생자 수치에서 무려 5,000~1만 명의 편차가 발생한 것이다. 제주도의회의 4·3 특별위원회가 1993년부터 신고를 받아서 1995년, 1997년, 20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신고받은 희생자 수치는 1만 2,000여 명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불완전한 정부 수립으로 부정하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편견, 무차별적 비난과 깊은 증오심으로 인해, 후손들이 자랑으로 삼아야 할 건국사를 난도질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이러한 강의를 하는 그 강사는 그의 국가관과 역사관으로 볼 때, 공무원 및 경찰 시험 교육 강사로서 매우 부적절하다.

jucheon@wonkw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