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건국 전쟁
2024-08-08김승욱 (발행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조지아대학교(UGA)에서 경제사(Ph. D.)를 전공하고, 1989년 이후 31년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UNIDO 국제전문가로 말레이시아의 공업화 계획 수립에 참여했으며, 경제사학회와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통합가치포럼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9년에 9명의 교수들과 기독교학문연구회를 설립하여 12년간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 사단법인 기독교학술교육동역회로 발전시켰다. 현재는 월간 <월드뷰> 발행인, 굿소사이어티 산하 조사연구소 및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이달의 특집(ISSUE)
‘Ordo Reformanda(체재 개혁)’ 라는 키워드로 2024년 특집을 이어가는 월드뷰는 8·15가 있는 8월호에 “이승만의 건국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특집을 꾸몄습니다. 본보는 2021년 3월에 ‘근본으로 돌아가자(아드 폰테스 Ad Fontes)’는 취지에서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정신”이라는 특집을 제작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기념사와 <타임지> 커버스토리로 실린 이승만에 대한 기사 등과 함께, “청년 이승만이 꿈꾼 나라”라는 제목으로 6개의 칼럼을, 그리고 “이승만의 건국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6편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3년 반 만에 이번 호에서 다시 이승만 대통령을 조명합니다.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이 누적 관객 수 117만 명을 넘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논쟁이 재점화 되었습니다. 과거 2011년에 KBS에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 대통령 이승만” 3부작을 방영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독재 찬양 방송’이라는 비난과 압박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역대 대통령, 경제 인물들을 다루려던 특별 기획이 취소될 정도였습니다
이번 “건국 전쟁”의 흥행 성공 이후에도 역시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백년 전쟁(2012)”이 다시 조명되는 분위기입니다. 이 “백년 전쟁” 1부에서 이승만은 플레이보이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했고, 장기집권을 한 독재자로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백년 전쟁”과 같은 맥락에서 영화 “건국 전쟁”이 ‘거짓말 다큐’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가히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건국을 둘러싼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객관적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물론 객관적 진실이 밝혀져도 그 사실을 둘러싼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실 인식에서 오는 오류는 가능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 영화 “건국 전쟁”을 통해서 촉발된 역사의 진실 규명 작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학술적 논쟁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학술적 논쟁은 활발하지도 않고 주목도 못 받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알려는 노력이 있다는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보다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조명하기 위한 시도에서 이번 특집을 기획했습니다.
본보 대표주간인 이상원 교수는 바울이 탄 로마행 배의 사람들과 요나의 다시스를 향한 배에 탄 사람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손에 있었음을 환기시키면서,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좌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임을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발전된 대한민국의 기초에는 한민족의 내재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기독교인들의 헌신에 기인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버스토리
이번 호 커버스토리 인터뷰는 이승만학당의 이영훈 교장 선생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한국경제사를 가르쳤으며, 조선 시대 경제사를 전공한 경제학자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 <한국경제사(2016)>, <반일 종족주의(2019)> 등이 있는데, 조선 시대와 일제 시대의 여러 이슈에 대해서 사회적 논쟁을 이끌었습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이승만학당을 설립하여 이승만 대통령 알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최근 영화 “건국 전쟁” 내용 중 반대 측에서 거짓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답변을 들어봤습니다. 이승만의 유학 시절과 하와이 시절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한 점, 그의 독선과 학살, 6·25 전쟁 당시 시민을 버리고 도망한 점, 김구 암살의 배후인가, 부산정치파동의 책임 등 주로 비판하는 측의 주장들에 대한 반론을 들어봤습니다. 커버스토리 인터뷰 말미에 이영훈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기에는 아직도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특집(ISSUE)
이번 특집 칼럼은 숫자가 많습니다. 크게 “건국 전쟁을 둘러싼 논쟁들”이라는 제목으로 8편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커버스토리에서 지면 관계상 깊이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먼저 우남네트워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는 3·1 운동에서 이승만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이를 둘러싼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는데, 사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잘 설명했습니다. 김성원 GROUND C 대표는 ‘CIA도 확인한 이승만의 자금 비리설’, ‘징집카드(1918년)에 이승만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으로 표기한 것’ 그리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청원’ 등에 대한 반론을 정리했습니다.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의 역사수호위원장 이주천 교수는 이승만을 학살자로 규정한 근거의 하나인 제주 4·3 사건의 실체와 희생자 수에 대한 반론을 썼습니다.
또 하나의 큰 논란은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로 희생된 민간인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건국 전쟁”에서 ‘없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반대 측 비판에 대해서 류석춘 전 연세대학교 교수가 자세한 사료를 통해서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김승욱 명예교수는 이승만이 농지개혁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정리했습니다.
사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여러 가지 비판은 반공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미소 냉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건국 과정은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모든 행동을 평가하면 그의 무리한 행동들이 이해가 됩니다.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문무일 사무총장은 이승만의 반공 정신에 대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보 부편집장인 조평세 박사는 6·25 전쟁이 7·27 협정으로 휴전 국면에 들어간 지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인 1954년 7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행한 연설 등을 중심으로 한미동맹의 바탕에는 신앙동맹이 있었으며, 이승만은 70년 전에 이미 미중 갈등을 예견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는 대한민국의 3대 보수주의 혁명으로 3·1운동, 이승만의 건국혁명, 그리고 박정희의 산업혁명을 꼽았습니다
이번 특집에서는 우남 이승만 관련 단체 5곳을 소개했습니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을 하고 있는 ‘(재)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 두 번째는 이승만 관련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우남네트워크(이사장 신철식)’, 세 번째는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원장 양준모)’, 네 번째는 ‘이승만학당(교장 이영훈)’, 마지막으로 이승만을 알아가기 위한 학습 모임 ‘자유의 숲(대표 안정용)’ 등을 간단하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건국 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과 “기적의 시작”을 제작한 권순도 감독에게 다음 작품에 대한 준비 상황을 들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남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리틀이승만’ 키우는 ‘견미단’의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7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7월 14일부터 28일까지 2주에 걸쳐, 10대 청소년 스무 명과 20~30대 청년 서른 명을 포함한 54명이 우남 이승만의 발자취와 미국 독립역사 유적을 따라 미국 8개 도시(하와이 호놀룰루, 보스턴, 플리머스, 뉴욕, 프린스턴, 필라델피아, 애나폴리스, 워싱턴 D. C.)를 조평세 박사의 인솔하에 탐방했습니다.
맺음말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공산세력의 위험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국조차 소련 공산당의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미 국무부 내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국도 아직 공산화되기 이전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산주의가 몰락하기 직전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교과서인 <경제학 원리 The Principles of Economics>의 저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 교수조차 공산주의를 통해서도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1970년대 미중 관계 정상화를 주도했던 헨리 키신저와 닉슨 미 전 대통령은 중국 공산당이 국제 분업 체계에 들어오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1994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중국을 두고 “우리가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자조적으로 회고했다고 할 정도로 공산주의의 위험에 대해서 많은 지도자들조차도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90여 년 전인 1923년 3월, 즉 1917년 레닌의 공산혁명 이후 6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태평양잡지>에 이미 공산당의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공산당 당부당(共産黨 當不當)”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서 아주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공산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논문은 서방진영 최초로 공산주의 모순을 지적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해방 직후 혼란기에 공산주의는 절대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후 그의 모든 행적은 공산화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세력과의 싸움이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됩니다. 혹자는 그를 독재자라 하고 학살자라 하지만, 이는 신생 독립국이 서구 선진국과 같은 정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면 공산세력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며, 결국 그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이룩했습니다. 단순히 경제성장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질서나 문화 수준 측면에서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세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의 발전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객관적 진실을 먼저 규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진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먼저 확인하려고 하는 겸손함을 가지는 선진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