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둘러싼 논란들의 진실을 알아본다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들의 진실을 알아본다

2024-08-06 0 By 월드뷰
이영훈 교수 (이승만학당 교장)

이승만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 관한 학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이승만학당의 이영훈 교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조선 시대 경제사를 전공한 경제학 박사로서, 2017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정년 퇴임했다. 경제사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6년에 이승만학당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 <한국경제사(2016)>, <반일 종족주의(2019)> 등이 있다(편집자 주)



이영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습니다만, 아직 근대적인 의미의 역사학은 성립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근대적인 역사학이라면, 정치적인 운동이나 선전과 무관하게 역사적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인과를 분석하는 사유체계를 말합니다만, 한국의 역사학은 아직도 특정 정치적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역사학만이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전반을 강하게 제약하고 있는 정치적 이념은 민족주의 내지 민중주의입니다. 이 역사관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두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즉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웠어야 했으나, 이승만 등 친일파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워 불행한 현대사가 출발하였다고 간주합니다. 이승만에 관한 기존의 비판과 비방은 모두 이 역사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와 역사가 분리되지 않아, 근대적인 역사학이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학계의 논쟁이 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학계의 논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백년 전쟁”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든 민족연구소와 같은 좌파 민족주의 단체에 의한 운동으로서의 역사학이 있을 뿐입니다.


이영훈 한국 현대사에 대해 관심과 참여가 높아진 계기는 2004년경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때부터였습니다. 이후 저는 민중·민족주의 역사관의 대안으로서 자유민주 역사관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역사관의 전환을 촉구한 다른 한편의 주요한 계기는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 그려진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현실은 한국경제사 연구자로서 제가 도달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저는 2000년에 쓴 <한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징(한국개발연구원)>이란 책에서 19세기 말 조선의 상태를 국가 성립 이전의 ”만인이 만인에 대해 이리”인 상태와 유사하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꼭 그런 지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그 점에 크게 놀랐습니다. 다음에 또 놀란 것은,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인간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권리의 소지자로서 자유인으로 태어났다고 했고, 그 자유인은 세계를 상대로 통상을 하는 자이며, 그 자유 통상이야말로 문명개화의 근본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승만은 자유를 단순히 철학 내지 정치학의 인성론 차원에서뿐 아니라 경제학과 역사학의 수준으로까지 확장하여 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상가는 우리 한국사에서 이승만이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아직도 한국의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이승만의 진면목입니다.
제가 볼 때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나 정치가이기 이전에 큰 사상가이자 문필가입니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서양 근대의 계몽주의 철학이나 정치학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것을 동양의 오래된 유교 문명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을 다 모으면 분량으로도 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의 전집을 능가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러한 이승만을 연구하고 교육할 목적으로 2016년 가을, 대학을 정년퇴직하기 한 학기 전에 이승만학당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근 8년간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영훈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왕조의 큰 기둥이 되겠다는 꿈을 꾸어 온 이승만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영어라도 배워서 정부의 쓰임새가 될까 하여 1895년 배재학당에 들어갔다가 ‘자유’라는 근세 서양에서 발원한 이념을 배우게 됩니다.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그는 자신의 조국을 서양과 같은 자유인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곧 자유 이념의 혁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로 평생 이 결심에 충실했습니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대국민 담화나 연설에서 자주 자신의 인생을 혁명가로서의 50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50년 동안 그는 다른 길로 이탈한 적도, 다른 이념과 안이하게 타협한 적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자유 이념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는 망해 버린 나라가 다시 살아나 독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국인 하나하나가 자유와 독립의 정신에 투철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며, 그 위에 한국의 독립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를 국제사회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후에 열강이 충돌하는 그날, 곧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는 그날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주장했습니다. 1908년 그가 예견한 미국과 일본의 충돌은 33년 뒤에 현실화되었습니다. 이 같은 이승만의 정신과 독립 방략을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한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사회에서 큰 논쟁과 갈등의 대상이 된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흔히들 이승만의 공(功)과 과(過)를 이야기합니다만,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운 것만큼 큰 공이 어디 있습니까?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좌우합작의 어중간한 체제가 성립된 다음, 미국이 철수하고, 공산체제로 전락하는 나라가 됐을 겁니다.


이영훈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은 건국 이후 미국이 중립국으로서 전쟁 중인 어느 쌍방과도 자유롭게 통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제공법으로 확보해 가는 역사에 관한 것인데, 그 주체의 참신성이나 독창성 면에서 매우 우수했습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을 폄하하는 사람은 아마 그의 논문을 정독하지 않았거나 읽더라도 그 밑에 깔린 역사적, 철학적 관점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당시 영국,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이 취한 팽창정책을 비판하면서 호혜 평등의 자유 통상을 추구한 미국이 장차 세계사를 주도할 것이며, 그러한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또 실제의 역사도 그렇게 흘렀습니다. 한국의 독립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한 일본이 미국과 충돌하고 그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20세기 전반 독립운동가 중에 이러한 역사적 비전을 가진 사람은 이승만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1922년 워싱턴군축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외면하자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소련에게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으로 중국과 만주 일대에 군사적 기지를 마련한 다음 일본과 전쟁을 벌일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할 것이고, 그날에 우리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기회가 찾아오며, 그때까지 단결하여 실력을 길려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외세의존적 허무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3년간 벌어진 미 군정하의 독립운동에서도 세계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이승만의 식견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초부터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소련 공산체제가 저지른 만행을 보면서 해방된 조국이 그 악의 체제에 포섭되는 것을 극구 경계하였습니다. 그가 1945~1948년 미 군정 기간에 벌인 독립운동은 결국 반공 투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당시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이나 대다수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향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성립을 이끈 정치지도력은 거의 유일하게 이승만 개인에 의존했습니다. 그의 노선이 승리한 것은 그의 철학과 역사관이 다른 정치지도자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가운데, 당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러한 이승만의 노선에 동의하고 그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갈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한 점에 저는 기꺼이 동의합니다.


이영훈 현행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1987년 제9차 헌법개정 때의 일입니다. 1948년의 건국헌법에서는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1987년에 이르러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심각한 역사 왜곡입니다. 1919년 9월 상해에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이승만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3·1 운동 당시 국내의 13도 대표들이 국민회의를 열고 한성임시정부를 성립시켰습니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가 그에게 부여한 집정관총재라는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 자격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상해에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한성정부가 옮겨간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집정관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은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한국이 독립했다는 국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은 미국에 있다고 간주했는데, 그의 철학과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해나 북경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과 대립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와 최창식 등 공산주의자들이 장기간의 유고라는 명분을 내세워 임시 대통령 이승만을 1925년에 탄핵한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그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들었습니다. 임시정부가 활력을 되찾은 것은 1932년 윤봉길 의거를 일으킨 김구에 의해서입니다.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가 1945년 해방 이후 환국한 다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알려졌습니다. 이시영, 신익희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임시정부를 이탈하여 이승만의 노선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를 고수한 김구나 조소앙 등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거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든가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되어 결코 그 법통을 이을 수 없다는 주장은 임시정부와 이승만과의 관계, 탄핵 이후 전개된 임시정부의 역사, 특히 1945년 이후의 건국 과정에서 김구의 임시정부가 행한 역할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낭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1945년 10월, 33년 만에 환국한 이승만은 곧바로 수많은 한국인에 의해 국부로 추앙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4~6월, 이승만은 남한 전체를 순차로 방문하였는데, 그때 가는 곳마다 그를 국부로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이승만이 1948년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 헌법 전문에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기록한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3·1 운동으로 세워진 한성임시정부와 그것이 중국으로 옮겨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되어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당시에는 세계정세에 구애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에 굴복하지 않고 지난 30년간 끊임없이 투쟁하여 결국 대한민국을 건립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1987년 제9차 헌법개정 당시에 이러한 취지의 헌법 전문을 왜곡하여 김구가 중심이 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것으로 바꾼 것은 그 헌법개정에 참여한 정치가와 역사가들이 자행한 심각한 범죄적 행각이었습니다.


이영훈 지금도 미국 교민사회는 친(親)이승만과 친(親)안창호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안창호 그룹의 이승만에 대한 증오심은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 시대의 역사를 잘 알 리 없는 안창호의 후손이 다큐 “건국 전쟁”이 공개되자 다시 이승만을 공개적으로 매도한 것은 대물림된 증오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 볼 문제는 20세기 초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은 과연 하나의 정신이나 이념으로 통합된 민족, 시민이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서로 다른 신분색과 지방색으로 심하게 대립했습니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지만,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기호파와 서북파라는 지방색으로 나뉘어 갈등했습니다. 여기에 양반·상놈 신분 차별의 감정까지 더해져 갈등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기호파는 대개 양반 출신이고 서북파는 상놈 출신이었습니다. 이승만과 안창호 사이에는 조선의 역사, 망국의 원인, 독립의 전망과 관련하여 철학과 역사관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이 같은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고약한 지방색의 대립과 신분색의 차별이 있었던 것이죠. 이승만과 안창호 두 분이 공개적으로 다투거나 서로 비난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을 지지한 세력 간에는 이처럼 쉽게 메울 수 없는 역사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간격은 지금도 우리 한국인들을 갈라놓고 다투게 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1925년 임시정부가 이승만 임시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련의 과정은 사실상 안창호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안창호와 이승만 간의 대립은 두 지지세력 간의 지방색과 신분색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재정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주요 수입원은 미국의 교민들이 매달 내는 ‘애국금’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자신이 조직한 국민회가 그 애국금을 관리해야 된다고 주장한 반면, 이승만은 이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정부의 명령에 따라 구미위원부가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의 주장대로 구미위원부가 미국 교민들의 애국금을 징수하고 관리하게 되자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떠났던 것입니다. 당시 임시정부를 구성한 요인들은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정부 수반으로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만이 민족의 대표냐, 나도 민족의 대표다. 나는 당신에 의해 임명된 당신의 아랫사람이 아니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이 거둔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고 자신의 재량으로 지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인은 하나의 공적 대의를 위해 잘 단합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영훈 다큐 “백년 전쟁”의 주장은 더할 수 없는 악의에 찬 비방입니다. 이승만의 일상생활은 종교인으로서 매우 엄격했으며 금욕적이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 평생에 걸쳐 그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났습니다. 금전과 관련하여 그는 더없이 청빈했습니다. 이후 1960년 대통령에서 내려온 이승만이 하와이로 휴양 차 떠날 때,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였습니다. 그가 정말 12년간이나 집권한 독재자였다면 어찌 그리 빈손으로 떠났겠습니까? 그가 1934년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것은 다른 마땅한 결혼 상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20년 이상의 독신생활에서 그는 어느 여자와도 염문을 뿌린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가 하와이에서 의형제 사이로 알려진 박용만과 갈등한 것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용만은 하와이에 어렵사리 정착한 한국인 이민자들을 군사 훈련시켜 만주 흑룡강 일대로 데려가 일본과 전쟁을 벌일 황당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 꿈을 위해 그가 설립한 군사학교에 교민들이 내는 성금의 상당 부분이 낭비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하와이에 일본 군함이 입항하자 그것을 공격하자는 박용만 일파의 모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908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장인환과 전명운의 재판에서 교민들로부터 통역을 부탁받은 이승만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위해 통역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주장은 김원용이라는 이승만 반대파가 지어낸 낭설에 불과합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승만은 하버드대학교에서 학기 중이었으며, 학업을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두 사람을 위한 교민들의 모금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동년 7월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재판은 장기간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통역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 대신, 교민들의 회고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는 1달간 이승만은 미국인 변호사에게 두 사람의 살인이 공의에 입각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은 프린스턴으로 떠났습니다. 이후 그해 연말에 재개된 재판에서 두 사람이 사형을 면한 것은 이승만의 도움을 받은 변호사의 훌륭한 변론 덕분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이승만이 두 사람의 재판을 외면했다는 비방이 반대파로부터 나온 것은 교민 사회가 얼마나 심하게 분열해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영훈 3·1 운동 이후 1920년에 간도와 연해주를 무대로 한국인의 무장 부대가 일본군과 충돌한 것은 사실입니다. 단위 부대의 인원은 많아야 200명을 넘지 않았고, 그런 부대가 서넛 정도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가 이들 부대가 연합하여 일본군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전투의 규모는 종전에 알려진 것만큼 그리 크지 않았고, 독립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간도와 연해주를 무대로 한 한국인들의 무장투쟁은 1921년에 있던 자유시 참변으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1930년대까지 명맥을 이은 한국인의 무장투쟁은 한국인 독자의 것이라기보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산하의 부대에 불과하였습니다. 말씀하신 화북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속한 부대였습니다. 이 같은 한국인의 무장활동이 1945년의 해방을 이끌어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솔직히 말해 거론조차 민망할 정도입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정통적 주류를 무장투쟁에서 찾는 것은 역사의 심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것처럼 역사가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오늘날 역사학의 실정이 그 같은 가공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이 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압력을 가해 장개석이 카이로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여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과장된 것입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은 전쟁 이후 한국을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세웁니다. 이 같은 방침은 중국에도 전해져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습니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은 이 같은 과정을 전제하면서 미국의 주도로 열린 것입니다. 회담에 앞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고 그에 장개석이 화답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카이로에서 한국 독립의 방침을 국제적 선언으로 발표함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지 중국이 아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전쟁 이후 미국이 수행할 책무의 하나로 끊임없이 일깨운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이었습니다. 그러한 방향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정통적 주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영훈 김일성뿐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후 중국에 가서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 국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여러 요인들도 대부분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심지어 이름까지 중국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반면에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신념 때문입니다. 이미 1904년의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남의 나라 국적을 취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승만이 미국 체류 시절에 어느 카드에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적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전후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1912년 3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사실상 망명)할 때, 이승만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여권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출국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권에서 이승만의 국적은 일본이었습니다. 그 여권으로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세관이나 병무청 관계 기록에 그의 국적을 일본으로 적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후 32년에 걸친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에서 그는 일관되게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일관되게 한국식 이름을 고집하였습니다. 미국에서 32년간 생활하면서 편리하게 이름을 영어식으로 지어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이승만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영훈 1945년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국이 처음부터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 좌우합작을 시도한 것은 1946년 5월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 국무부가 중심이 된 이후입니다. 나중에 폭로되었지만, 당시 미 국무부에서 동아시아정책을 좌우한 엘리트 고위 관료의 상당수는 소련의 첩자들이었습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의 정치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방해한다면서 이승만을 억압하는 가운데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를 육성하여 그들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의 과도정부가 들어서서 북한의 공산주의세력과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협상하게 할 방침을 세웁니다. 그렇지만 미 국무부의 이러한 방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디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 방침에 따라 좌우합작에 응한 동유럽의 모든 국가는 공산화되었습니다. 소수이지만 잘 조직된 공산주의 세력이 정부 권력의 일부를 합법적으로 장악하면 그들은 곧바로 그것을 기지로 삼아 체제 전체를 공산화로 이끄는 공작을 동유럽 여러 지역에서 성공시켰던 것입니다.
당시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그 같은 공산세력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독립촉성국민회 세력은 회원 수가 거의 500만 명에 달하는, 당시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을 멸망으로 이끌 악의 체제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국민회 회원들은 흔들림 없이 이승만을 지지했으며, 그런 이승만을 미국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김규식, 여운형 등이 이끄는 좌우합작의 중도 노선은 그 지지세력이 소수의 지식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은 공산세력의 압력을 받아 북한에서 추방되었거나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두려움을 느끼는 남한의 대다수 주민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1947년에 들어 미국이 좌우합작 노선을 포기하자 그들은 곧바로 닭 쫓던 개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947년 7월에 발생한 여운형 암살사건은 이 같은 추세의 커다란 전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우발적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1947년에 들어 미국은 드디어 전후 세계의 경영과 관련하여 소련과의 협조체제를 포기하고 소련을 봉쇄하는 냉전을 개시합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문제의 처리에서도 소련과의 협조, 곧 좌우합작 방침을 포기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우여곡절을 통해 성립하였습니다. 만약 이승만이 중심이 된 강력한 반공산주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1946년에 한국은 미국이 추구한 좌우합작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립의 실질적인 주역으로서 국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영훈 1945년 이후 좌우 대립, 1948년 정부 수립, 나아가 6·25 전쟁 과정에서 학살이라고 할만한, 저항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양민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불행한 사건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는 과정은 사실상 전쟁의 과정으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동반하였습니다. 건국 과정은 마을 회의에서 동장을 뽑는 것과 같이 평화로운 과정이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도 그러한 희생이 따랐습니다. 우익에 의한 좌익의 학살도 있었고, 좌익에 의한 우익의 학살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학살에 가담했으며, 마찬가지로 학살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나라에서 그 나라가 제공하는 자유와 복리를 누리는 사람이 그 학살의 책임을 건국 종사자들에게 묻는 것은 참으로 엉뚱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 반란 사건처럼 대부분의 학살은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에 기인하였습니다. 반란 초기에 공산주의자들은 군경과 그의 가족을 학살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군경에 의한 보복적 학살을 초래하여 더 큰 희생을 불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비난하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이 지니는 역사적 정당성을 부정하려는 좌익세력의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학살은 역사적 성찰의 대상이며, 희생자를 추념하고 보상하는 일에는 찬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세력의 반란을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운동이라든가 반제국주의 평화운동 등으로 호도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정치와 역사학은 이미 그러한 정치적 의도에 포획된 채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영훈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한국정부가 서울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들은 개별적으로 서울을 탈출하였습니다. 탈출하지 못하여 북한군에 억류, 납치된 국회의원도 20~30명이나 되었습니다. 기습공격에 대비한 비상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신문을 보면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으나 국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으며, 국군은 황해도의 옹진반도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등의 오보를 내고 있었습니다. 국방부가 전황을 엉터리로 보도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48시간 동안 서울에 머문 대통령이 그 사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시간대별로 자세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정부와 유엔과 동경의 연합군사령부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빼놓지 않고 정확히 수행했습니다. 각료 회의를 소집했으며 국회는 서울을 사수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요인들은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참모들의 피난 권유를 물리치면서 27일 새벽까지 경무대에 머문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자 보좌진에 의해 북한군의 선발대가 이미 서울에 진입했다는 허위 보고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대통령 일행은 황급하게 서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24시간 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합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피난은 매우 위험하게도 너무 늦은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혼란 상황은 우선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고하는 국방체계가 허술한 가운데 비상시에 정부와 시민의 피난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비상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몇 달 뒤 이른바 1·4 후퇴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미리 세워진 비상계획에 따라 정부는 시민과 더불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였습니다. 이같이 건국 초창기의 비상계획과 훈련의 결여로 발생한 것을 대통령이 혼자 살려고 줄행랑쳤다는 비난은 국가를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로 감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대변할 뿐입니다. 전근대적 국가 관념은 백성들이 당하는 각종 재난의 책임을 군왕에게 묻습니다. 실제 1950년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시인하는, 곧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전근대의 군왕들이 했던 죄기론(罪己論)과 유사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권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무슨 당나라의 현종이라도 되느냐?”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명확하게 전쟁을 유발한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의 공산세력에 물어져야 하지요.


이영훈 김구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는 음모적 낭설 역시 오래전부터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반이승만 세력에 의해 조장되어 유포되어 왔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포한 이후에도 김구는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후일에 밝혀진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구는 머지않아 북한군의 남침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남한 정부는 추풍의 낙엽처럼 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구는 그런 정부에 내가 무엇 때문에 참여하는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김구가 유혈이 낭자한 전쟁과도 같은 건국의 시기에 언제까지 안전하게 신명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안두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조만간 총을 들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 평생에 걸쳐 테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승만이 독립운동의 오랜 세월 자신을 지지해 준 김구를 테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구가 살해되자 이승만은 이를 비통히 여기는 성명을 발표하며, “우리 한인들은 어찌하여 걸핏하면 테러를 하는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흔히들 김구는 이승만의 정적이라고 합니다만, 이미 김구는 건국 과정에서 배제되어 세력을 잃은 정치인에 불과했습니다. 안두희의 테러는 결과적으로 조만간 정계에서 도태될 김구를 역사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이 경계했듯이 테러는 언제나 뜻하지 않은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건국을 주도한 반공세력의 입장에서 안두희의 소영웅적 거사는 충분히 환영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6·25 전쟁 통에 형무소에서 석방된 다음 군에 복귀하여 대령까지 승진한 것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가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영훈 흔히 1952년 5~6월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이승만이 장기집권의 독재자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부터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는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여야 하며,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1948년 건국 당시 제정된 헌법에서 대통령은 국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건국 일정이 촉박한 현실에서, 5·10 총선거에 이어 대통령 선출을 위한 또 한 번의 전국적 선거를 치를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후일 개정을 약속하면서 이승만은 국회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수용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정부 수립 후 대통령과 국회는 사사건건 갈등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국회는 야당 민국당이 절대 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개헌안을 제출했습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는 자본가와 지주 계급 출신의 야당세력이 국회의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면 이 나라는 소수 귀족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적 귀족정치로 타락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전쟁 중인 1952년 7월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기 몇 달 전까지도 정부와 국회는 이렇게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배후에 미국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휴전을 원했지만, 이승만은 한사코 휴전에 반대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에 협조적인 야당세력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희망했고, 심지어 미국정부는 한때 군사를 동원하여 이승만을 구금할 계획까지 고려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 단순히 정부 형태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전쟁과 통일정책과 관련된 중대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안이하게 미국에 의존하여 전쟁을 중단하고 그들만의 권력을 추구하는 야당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가 친위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야당의원을 구금하거나 겁박하여 대통령 국민 직선제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것은 이러한 전후 사정에서였습니다.
이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전 국민 90% 이상이 참가한 투표에서 75%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이승만은 그의 반대세력으로부터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빚어진 정변이 아니었습니다.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와 민족통일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결단이었으며, 대다수 국민은 그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택을 지지하였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내외의 정적들과 쉼 없이 투쟁해온 이승만의 입장에서 부산정치파동은 또 한 번의 피할 수 없는 불의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영훈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로서 원로 공산주의자였습니다만, 해방 후 박헌영과 노선 갈등을 빚어 조선공산당에서 이탈한 다음 대한민국의 건국 대열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고향 인천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된 뒤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한 기간은 1949년 2월 말까지 6개월에 불과했고, 그가 중심이 된 농림부안은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흔히 조봉암이 1950년 2월에 관련 법이 국회를 최종 통과하게 한 농지개혁의 큰 공로자로 평가하는 것은 과장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 부의장으로까지 선출되었으며,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야당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와 거의 대등한 79만여 표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이범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력 정치인으로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1955년 진보세력을 모아 진보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이은 제2위 216만 표를 획득하였습니다.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남북한의 평화통일안을 내세웠으며, 이는 이후 1956년 11월에 창당된 진보당의 당 강령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유엔의 감시하에서 남북한이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방안을 협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이승만 대통령이 내세운 평화통일안과 여러모로 유사하나,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이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의 실시를 주장한 반면, 진보당은 남북한이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것을 주장한 점에서 결정적으로 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당시 북한이 선전하고 있던 평화통일안에 호응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바로 그 점으로 인해 1958년 진보당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1958년 1월,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다는 혐의로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의 간부들을 구속했습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이 아니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북한을 오가는 무역상 양명산과 접촉하여 북한이 내려보낸 자금을 수령한 사실 여부였습니다. 쟁점은 조봉암이 양명산이 북한의 간첩임을 인지했는가의 여부이며, 재판부는 결국 이를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평화통일안 자체는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 범위 안의 것으로 인정되어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조봉암의 수사, 재판, 사형 집행을 두고 이후 큰 논란이 벌어졌지만, 대법원에서 주심을 맡은 김갑수 대법관은 조봉암이 북한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북한이 내려보낸 자금을 수수한 것은 여러 관련 증거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이승만이 그의 정적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는 주장은 이승만이 김구 살해의 배후라는 주장만큼 그의 반대세력에 의해 지어진 음모적 낭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후 지적하신 대로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 사건을 재심하여 그의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재판으로써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2020년 모스크바의 공문서관에서 발견된 구소련 문서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임하여 조봉암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김일성은 그의 대통령 출마를 격려하고 자금을 내려보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62년 전 조봉암에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은 그 정당성을 최종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영훈 1945년 8월 해방 당시부터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습니다만, 미 군정은 구총독부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총독부의 경찰은 대부분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 군정의 통치에 협조하였습니다. 좌익세력의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으로 실행불가능한 선전에 불과했습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와 산하 검찰부가 국회에 설치되어 친일파 600여 명을 수사하고 특별재판부에 송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가 검찰권을 행사하는 것은 삼권 분립의 위반이라고 지적한 뒤에 조용하고 신속하고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비록 친일 경찰이더라도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의 발호를 진압하는 데 공로가 컸으며, 아직도 도처에서 활약하는 공산세력 진압을 위하여 경찰 병력의 동요가 있어서는 안 됨을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반민특위는 대통령의 요청을 묵살하고 경찰 간부를 구속했으며, 이는 경찰 병력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경찰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간부들을 폭행했으며, 이후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된 가운데 조기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경찰만이 아니라 일정기 총독부의 시정에 협조한 한국인들의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볼 것인가는 당시부터 커다란 논쟁거리였습니다. 어느 면에서 경찰보다 더 친일한 학교 교사나 군인은 불문에 부쳐졌습니다. 총독부의 물자 공출과 노동력 동원에 앞장선 읍면의 서기들도 불문에 부쳐졌습니다. 저는 유독 총독부의 치안유지와 공산주의자 탄압에 협조한 경찰만이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릴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정치세력이 친일파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삼으면서 이른바 보수파 정치세력을 공격하고 있음으로부터 여전히 한국에서 역사는 정치적 선동과 선전 수단에 불과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겪은 이후 한국의 정치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지러운 정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시대의 당쟁이 부활한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여야 간의 정쟁은 정치제도의 모순으로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를 부통령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헌법상 아무런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지 않은 부통령이 1952년 헌법개정에 의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국민 직선에 의해 선출되게 되었습니다. 미국처럼 한 정당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짝으로 선출하는 제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려되지 않고, 더구나 1954년 헌법개정에서 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대통령이 궐위시 부통령이 잔여 임기를 승계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
이후 1956년 선거에서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이,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자유당과 민주당과의 정쟁은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수준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 양상을 지켜보면서 저는 1925년 임시정부의 서북파와 공산주의자들이 이승만을 탄핵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적대적인 갈등을 연상합니다. 독립운동과 건국활동의 원훈으로서 이승만은 여전히 국민적 통합의 구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족통일을 그가 평생 추구한 자유혁명의 마지막 과제로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충분히 노쇠한 85세의 이승만은 정치와 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점점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이었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지도자들은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 초래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공유하였지만 타협점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야당 민주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를 불변의 소신으로 추구하였습니다. 1958년의 민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이미 현저하게 약화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다가오는 1960년의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특히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이길 전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유당의 강경파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력과 치안력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획책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라는 개념은 아직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1960년의 3·15 부정선거와 뒤이은 4·19 정변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운용할 정치적 능력이 당시까지의 한국정치에 결여되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4·19로 민주당은 그토록 희구한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를 실현했지만, 그에 따른 혼란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민주당은 오래전부터 내부에 신파와 구파라는 두 정파가 대립하여 심각한 당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 내부의 갈등이 4·19 이후 전면화 되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당의 집권은 고작 10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5·16 군사 쿠데타를 맞이했습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정치에서 민주적인 투표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실현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았습니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20년 이상의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의 실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기붕을 위시한 자유당의 중심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입니다. 4·19가 일어나기까지 몇 차례의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과 시민이 선거의 결과에 항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몇 차례 하문하였습니다. 그가 부정선거의 실태를 인지하는 것은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른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항의시위에 접하면서부터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부터 사임을 고려합니다만, 막상 그의 사임을 강박한 것은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을 거부한 한국의 군부와 일찍부터 이승만을 제거할 기회를 노렸던 미국정부였습니다.


이영훈 저는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재평가를 수행할 한국의 역사학이나 정치학 등이 여전히 민족주의 내지 민중주의 역사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은 원래 그렇다 치고, 정치학을 보더라도 아직도 대중이 읽을만한 ‘한국정치사’ 책이 없습니다. 1948년 이후의 정치사를, 길게는 17세기 이후 지난 3~4세기의 정치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할 패러다임이 성립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승만의 진정한 재평가는 진정한 의미의 한국정치사가 쓰일 때나 가능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이유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건국 이후 한국인의 정신문화와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하기 전 조선인의 정신문화가 큰 차이가 없음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사이 38년간은 정신문화의 큰 변화가 있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입니다. 이승만은 1904년의 <독립정신>에서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민주정치는 아직 시기상조이며, 그 전제조건으로서 우리 조선인 하나하나의 자유와 독립의 정신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1948년에는 아직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민주정치는 제도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그에 따른 엄청난 혼란은 불가피하였고, 아직도 한국은 그 와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가 시기상조라 한 것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는 평생에 걸친 자유 이념의 혁명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악의 체제로 간주했으며, 해방 후 한국인이 그 체제에 빠질 위험성을 앞장서서 막았습니다. 그래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반부가 벌겋게 물들어갈 때 유일하게 마치 코끼리 몸통에 붙은 조그마한 혹처럼 생긴 한반도의 남반부가 그에 물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흔히들 이승만 대통령을 두고 공(功) 이 7, 과(過)가 3이라 말합니다만, 경박하기 짝이 없는 언설에 불과합니다. 몇 백 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건국이란 공을 세운 분입니다. 그 공은 절대적이며, 그가 범했다는 과오도 앞으로 재해석될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해져서 결국 대한민국이 소멸하고 만다면, 이승만이 재평가될 기회는 영영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승만 재평가를 위한 지식인과 정치가의 노력은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