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_[월드뷰23년08월호 커버스토리]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_[월드뷰23년08월호 커버스토리]

2023-11-20 0 By 월드뷰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나빴습니다. 그런데 현재 윤석열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창위 교수를 만나 최근 현안은 물론 앞으로 한일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모색해봅니다. 이창위 교수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및 대학원(석사) 졸업 후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학제적 연구 및 동북아의 핵질서 변화에 대한 거시적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국제해양법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이창위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승욱 : 광복절(8·15)이 있는 8월에는 일본 문제를 특집으로 다룹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아니라, 북중러 공산 진영과 맞서기 위한 자유 진영의 한미일 안보 공조가 불가피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과거 식민 통치의 역사적 아픔으로 인한 반일 감정이 많습니다. 먼저 한일 간에 감정이 나빠지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사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고, 고려시대에는 거의 100년이나 몽고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현재 국민의 반중 정서는 과거 역사 때문이 아닙니다. 공산화 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있고, 최근 우리를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반발입니다. 그런데 유독 일본은 과거 역사적 사건이 반일 감정의 뿌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창위 : 과거 일본의 선진문물은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를 통해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 관한 한, 일본에 대하여 한 수 위다’ 라는 자부심 내지는 역사적인 인식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여 강대국이 됨으로써 결국 우리를 침공하여 식민지 지배를 합니다. 그래서 한 수 아래였던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는 데에 대한 어떤 콤플렉스라 할까요, 원념(怨念)이라 할까요, 그런 응어리가 민족적 의식으로 작용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분노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지요.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갖는 어떤 원한이나 설움, 분노의 개념이 바로 한일관계에 그대로 적용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적대감이나 열등감을 가져왔었고, 그 연장선에서 한일관계가 1965년에 형식적으로는 정상화됐지만, 결국 여러 가지 후유증과 부작용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욱 :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났으니 이제 과거 원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자고 양국 정부가 다양한 노력을 했는데,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오히려 한일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번에 쓰신 책 제목이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로 본 한일관계사>인데, 이것은 양극단을 극복하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창위 맞습니다. 토착왜구는 아주 극단적인 친일파를, 죽창부대는 극단적인 반일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객관적으로 일본을 바라보자는 것이 제 책의 핵심입니다. 사실 원제목이 <국제법과 국제정치로 본 한일관계사>이고 부제가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였는데, 출판사에서 앞뒤를 바꿨습니다.

김승욱 : 이제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를 나누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한국 사람들이 반일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국가 대 국가로서 관계 정상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창위 :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의 체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1952년에 발효한 대일평화조약에 한국은 승전국으로 참여하지 못했지요.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싸우지 못한 한국의 조약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으로 냉전이 격화되던 당시 미국은 일본에 대해 엄격하게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관대한 강화’ 정책으로 한일 양국의 협상에서도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됩니다. 만약 한국이 대일평화조약의 당사국이었다면 한일 협상에서 일본에 분명한 책임을 물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시까지 3년 동안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승욱 :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사실 일제시대에 조선에 일자리가 부족해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도 많았고, 징용 당시에도 급여는 주었습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청구권 금액을 받아서 피해자들에게 보상했는데, 왜 다시 이런 판결이 나왔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왜 비정상적으로 전개됐는지요?


이창위 : 그렇습니다. 일률적으로 강제징용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모집, 관 알선, 징용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그 후의 국민징용령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징용이 이루어졌는데, 한반도에서의 강제징용은 1943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전에는 자발적인 이주 노동이 많았지요. 많든 적든 징용공에게 지급된 급여는 있었지만, 미수금 형식으로 지급된 경우가 많아서 그런 부분들이 한일 협상 당시 ‘대일 청구 8개 항목’의 하나로 명시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청구권 금액으로 포항제철이나 소양강댐, 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했고, 1974년과 2007년에 피해자들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했습니다만, 그때 보상받지 못한 일부 징용공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문제가 된 것이지요.

김승욱 : 1965년 합의 당시 국제정치적 상황은 어땠나요?


이창위 : 지지부진하던 양국의 협상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당시 국제정치적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냉전의 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됐고, 1962년 10월 16일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1964년 8월에는 미국이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했고, 1964년 10월 중국은 신장(新疆, Xīnjiāng)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냉전이 격화되는 국제정세 아래에서 미국은 자유 진영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한일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일 국교 정상화는 당시의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

김승욱 : 이제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요. 한때 우리 사회에는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하지 못해서 정신대대책위원회(정대위)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도 했고, 위원장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 둘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점에서 다른지 구분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왜 한국 사회가 이렇게 이 분야에 대해서 전문성이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창위 : 정신대는 일제시대 말기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제가 국민을 강제로 동원한 것입니다. 이때 남자의 경우는 징용이라고 불렀고, 군복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데 동원했던 여성 강제노동은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정신대와 위안부는 전혀 별개의 개념입니다. 일본인, 한국인을 불문하고 당시에 여학생을 포함한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적으로 노역에 종사해야 했지요. 국내에서 시작된 위안부 문제는 출발부터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셈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과 맥락을 이해해야 제대로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가 커지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외관계에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김승욱 :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사과했다고 봐야 하나요?


이창위 :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당시 기시다 후미오 외상은 서울에서 “위안부 모집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의 의미로 화해치유재단에 10억 엔을 출연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한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사과문을 읽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밝혔지요. 또 아베 총리는 별도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로 정중하게 다시 사과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한국에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에 10억 엔을 출연했고, 당시 생존 피해자와 유족에게 대략 44억 원이 지급됐습니다.

김승욱 : 그러면 2015년 12월 이전 일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이창위 : 그전에도 일본은 여러 차례 사과했습니다. 우선 1992년 1월 서울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한 후, 1992년 7월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사과와 반성을 표명하는 담화를 발표했지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에 ‘일본군의 강압’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이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했고, 1994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위안부를 다시 마음으로부터 깊이 사죄하고 반성한다고 했습니다. 고노 장관과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는 이후 일본의 구체적인 사과의 기준이 됐습니다. 일본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해 한국, 필리핀,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리의 사죄 편지와 함께 일 인당 2백만 엔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그 후 하시모토 류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도 2007년 4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기자회견에서 밝혔고, 결국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합의로 최종적으로 사과를 마무리했습니다.

김승욱 : 그렇다면 2015년 사과 이후 위안부 문제는 법적으로 종결됐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창위 : 국제법적으로 종결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국제법상 위법행위에 대한 국가책임은 원상복구, 사과, 금전배상으로 해제되는 것인데, 일본은 이런 요건을 실질적으로 충족하는 행위를 이행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실질적인 배상을 한 것입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체에 대하여 1983년부터 2018년까지 총리와 천황의 사과만 총 53회에 걸쳐 이행했습니다. 그 내용은 식민지 지배, 창씨개명, 강제징용, 위안부, 침략전쟁까지 모두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제 책에 도표로 만들어서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김승욱 : 그런데 왜 문재인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를 번복했을까요?


이창위 : 정치적인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관계는 국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이득을 취한 것이지요.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을 비판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쨌든 외교는 여야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김승욱 :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 것을 한국의 사법부가 뒤집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해외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미국은 일본에 사과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지요?


이창위 : 위안부 합의는 국가 간의 조약은 아닙니다만, 법적 강제력이 배제되는 양국 간의 ‘비구속적 합의’이기 때문에 위안부 합의의 번복이 외교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특히 양국의 최종 합의를 한국이 국내 사정을 핑계로 뒤집은 것은 국제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사과를 한 이유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 2월과 1998년 6월 유엔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 원인 및 결과에 관한 보고서인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와, 유럽 집행위원회의 위촉으로 1998년의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제출된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 특별보고관의 ‘맥두걸’ 보고서 「맥두걸 보고서: 무력충돌 중의 체계적 강간, 성노예와 노예제나 다름없는 관행」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 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 번역: 조시현)
가 공표된 이후,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미국도 동맹국인 일본에 책임의 인정을 권고했는데, 특히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은 아베에게 수차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김승욱 :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소녀상 문제에 대해서 질문드립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건립해서 외교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 곳에, 심지어 해외에까지 소녀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창위 : 일본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외교관계에 대한 비엔나협약 제22조에는, “접수국은 어떠한 침입이나 손해에 대하여도 공관지역을 보호하며, 공관의 안녕을 교란시키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특별한 의무를 가진다”라는 내용이 규정돼 있습니다. 한국이 이런 조약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것은 적어도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을 고려하여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강제징용 문제

김승욱 :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특히 국제법적으로 합의된 내용을 무시하고 우리 헌법을 기준으로 외교적 판단을 내린 것이 국제법상 정당한가요? 또한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한 것은 국제법적으로 허용됩니까?


이창위 : 이 판결은 국제법과 외국법을 고려하지 않았고, 기본적 법리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한국 헌법으로 식민지 시대를 비판한 것은 국권 침탈 당시 국제법적 기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청구권협정을 국내법에 맞춰 무리하게 해석한 것도 심각한 국제법 위반입니다. 판결은 시종일관 국내적 관점으로 국제법 원칙을 부정했는데요, 국가와 개인의 연결 고리(linkage)를 상대적으로 부정하면서 청구권협정의 ‘일괄보상협정(lump-sum agreement)’으로서의 존재 의의도 부인했습니다. 청구권협정을 무시하고 일본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것은 독선적인 판단입니다. 청구권협정 자체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한 결과인데, 그런 과정도 무시했습니다. 재판관들은 외교적·섭외적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특히 2012년 판결 당시 주심이었던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당시 판결은 국내 정치판을 뒤흔들고,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출발점이 됐습니다.

김승욱 : 왜 한국 대법원은 사법자제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을까요?


이창위 : 한국에서 선출직 공무원이 아닌 재판관은 외교적으로 잘못된 판결을 내려도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사법부가 행정부의 입장을 존중하여 중요한 외교적 사건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이 확립돼 있지 않아서 정부의 대외정책에 반하는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영국에서 법원은 ‘행정부 확인서(executive certificate)’를 외교부로부터 받아 재판하고, 미국도 국제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항은 국무부나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여 사법적 판단을 내립니다. :

김승욱 : 결국 한일 양국의 현안에 대한 한국의 입장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창위 : 그렇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 변화에 난감해했지요. 일본은 ‘청구권협정’과 위안부 합의 및 수차례의 공식적 사과를 통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이 협상과 사과를 매번 요구하는 것은 ‘골대를 옮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포츠에서 골대를 옮긴다는 것은 반칙 같은 비신사적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한국이 일본의 침략과 지배, 착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대방의 의중과 상관없이 해방 후 지금까지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국제사회는 또 한국과 일본의 책임에 대한 공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는 이런 의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한일 간의 현안을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김승욱 : 지금까지 설명하신 맥락에서 지난 3월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문제 해법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창위 : 지난 3월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우리 정부를 대표하여 일제시대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표했습니다.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대신 변제한다는 ‘제3자 변제’ 방식이었습니다. 열흘 후인 3월 16일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경색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약속했고, 양 정상은 셔틀 외교를 재개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안보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정부의 결정에 대하여 반발했고, 일반 국민의 여론도 정부의 결정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미일 3국 공조를 위해 한일관계를 중시한다는 정부의 외교정책은 흔들림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이번 조치는 강제징용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구나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로 안보 위협에 공동으로 노출된 한‧일 양국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다른 현실적 대안은 없습니다. 윤 대통령이 일본을 안보와 경제의 파트너로 규정하고 내린 결단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김승욱 : 정말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문제는 어렵고 복잡합니다. 한일관계를 어떻게 개선하고 정상화해야 할까요?


이창위 :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나뉘어 있습니다만, 한일관계 개선으로 한미일 3국의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3국의 긴밀한 협조와 공동 대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미일 공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협조 체제가 정착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일 양국의 관계 정상화와 신뢰 회복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정확한 이해와 평가가 전제돼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제 책에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궁극적으로 일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국익을 위해 합리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타성적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과거 정부들이 반복했듯이 이번 정부의 외교적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김승욱 : 장시간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