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통장

하늘 통장

2021-10-22 0 By 월드뷰

월드뷰 OCTO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작가)


H는 동창회 임원 회의에 오면서 커다란 호박 두 개를 들고 왔다. 늦여름 궂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호박은 멜론만 해서 두 개의 무게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면서 긴 시간을 들고 왔다. ‘한 개 더 넣었다가 너무 무거워서 할 수 없이 뺐네!’라며 한 개 더 가져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시골에서 따왔단다. H는 90세가 넘어 연약해지신 어머니를 돌봐드리기 위해 틈날 때마다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를 오갔다. 두어 달 전에도 어머니 텃밭에서 머윗대며 곰취를 뜯어왔다고 ‘먹을 사람? 낼 회의 때 갖다 줄게’라고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답글을 달지 않은 친구 몫까지 챙겨와 우리는 모두 고향 근처에서 뽑혀온 머윗대로 나물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제 돈 내고 시간 들여 봉사하는 동창회 일로 모일 때마다 친구들은 서로를 챙긴다. 회의 참석 때마다 새벽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는 상인처럼 큰 가방을 메고 회관에 들어서는 친구, 그 가방 안에선 직접 찐 찰밥과 김이 나오거나 이름도 어려운 이탈리아 요리가 예쁜 접시와 함께 나오기도 한다. 찰밥과 김이 온 날 다른 친구는 상큼하게 익은 물김치를 들고 왔다. 늘 제철 과일과 옥수수를 챙겨오는 친구, 대봉시가 마침맞게 익었다며 조심조심 들고 온 친구, 일부러 백 개의 오이장아찌를 담아 봉지마다 나눠온 친구, 오기 직전 텃밭에서 따왔다는 향긋한 향이 퍼지던 젖은 흙과 물방울이 달려있던 온갖 쌈 채소, 두 시간이 넘는 고속도로 길을 묵묵히 운전해 오는 친구, 친구들 ….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소소한 나눔은 짜증과 불평이 일 수도 있는 시간에 편안한 웃음을 준다. 내 눈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로 보이지만 친구들도 이제 중년을 넘어서며 서로를 향한 섬김이 몸에 배어 있다.

좀 특별한 섬김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분은 외삼촌이다. 부모님의 장례식 기간 외삼촌은 날마다 장례식장에 와 주셨다. 갑자기 당한 슬픔과 황망함으로 몸과 마음이 휘청이던 때 삼촌은 무게 중심을 잡아주듯 장례식장 한쪽에 앉아 계셨다. 삼촌은 부모님과 친했던, 그러나 정작 상주인 자녀들과는 낯이 선 친인척이 문상 오면, 서로 소개하고 인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삼촌이 앉아 계시니 장례 일정이나 과정에 혹 의문점이 일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삼촌은 장례 기간 틈틈이 나의 아이들에게 돌아가신 분의 옛 모습을 들려주셨다.

“야아~ 니네 할아버지는 정말로 멋있는 분이셨어. 내가 형님이 공 던지는 것을 운동장에서 직접 한번 봤잖냐. 참말로 내가 표현을 제대로 못 하겠다만, 그렇게 빠를 수가 없어. 강속구! 나는 그때 형님이 하늘같이 보이더라니까!”

나의 딸 중 누군가는 할아버지가 대학교 때 전도유망한 야구선수셨다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다. 외삼촌은 나의 엄마 장례식장에 오셔서는 체면을 내려놓고 많이 우셨다. 빨개진 눈으로 아이들에게 할머니 얘기를 해주셨다. 삼촌 중학교 때 엄마 회사를 찾아가면 즐겨 찐빵과 만두를 사주셨다는, 그런 종류의 얘기였다.

“학교 끝나고 맨날 찾아가니 귀찮을 때도 안 있겄냐. 그런데도 네 할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나와주셨어. 내가 참 잊지를 못해. 내가 생전에 새 내복도 니네 할머니한테 처음 얻어 입어봤어.”

외삼촌은 내 부모님과의 좋은 추억을 이야기보따리 풀 듯 풀어주시며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의 한 자락을 들쳐 보여주셨다. 큰 금액의 부의금도 내주셔서 장례 후 전화 드려 ‘너무 많이 주셨어요.’라고 인사드리면 ‘야야, 그런 소리 말아라.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하시면서 또 목이 메셨다. 누가 들어도 그 ‘은혜’라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외삼촌은 당신이 받은 작은 호의도 은혜로 여기고 마음에 새겨두신 것 같았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의 위치와 역할에 맞추어 조용히 섬겨주셨다. 그런 외삼촌에게서 나는 노인의 품위와 품격을 보았다. 체구는 작지만 외삼촌은 내게 언제나 큰 분이시다.

외삼촌이 중학교를 다녔던 외할머니댁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외할머니는 그 지역의 명문 중고교에 다니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의 조카들을 다 품어주셨다. 아침마다 정자 언니와 할머니가 준비해 마루에 쌓아놓는 도시락이 너무 많아 어린 내 눈에 늘 신기했다. 친인척이 아니어도 할머니 댁엔 노상 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리에 높게 쌓은 얼갈이배추를 이고 새벽마다 할머니 댁 대문을 들어서던 아주머니도 그중 한 분이다. ‘성님이 마수 좀 해주셔요.’하며 마당에 광주리를 내려놓으면 할머니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서너 단 내려놔, 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건네주셨다. 아주머니는 두 손으로 돈을 받아 퉤! 퉤! 침 뱉는 시늉을 하고 머리에 쓱 문지른 다음 치마를 들치고 고쟁이 호주머니에 돈을 넣고 옷핀으로 잠갔다. ‘성님 개시 덕분에 오늘도 후딱 다 팔것어요.’라고 말하며 광주리를 이는 아주머니에게 할머니는 ‘올라감서 한술 뜨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돈에 침을 뱉고 머리에 문지르는 것이 이상해 물어보니 ‘마수걸이 돈에 재수 좋으라고 그러겄지’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는 푸성귀를 팔아 생활하는 아주머니의 첫 손님이 늘 기꺼이 되어주셨다.

외할머니께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인심이 후하셨다면 나의 친할머니는 특별히 교회 목사님들을 정성으로 섬기셨다. 매일 세 차례씩 식사 전에 이백 여분이 넘는 목사님의 성함을 외워 부르시며 기도하신 친할머니의 하나님 사랑은 참 ‘특심’이셨는데, 그중 또 하나가 미숫가루 봉사였다. 친할머니는 매년 매우 특별한 미숫가루를 만드셨다. 보리, 서리태, 귀리 조, 수수 등,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잡곡 열네 가지를 넣어 만드신다고 엄마가 귀띔해주셨다. 교회 목사님께서 새벽기도 나가시기 전에 한 잔 드시길 바라고 만드는 온전히 목사님 맞춤용 미숫가루였다. 3대 독자인 나의 아버지나 우리 손자 손녀들도 미숫가루만큼은 다 목사님 덕에 덤으로 공급받았다. 쪄서 말려 분쇄된 시금치와 당근까지 들어간 미숫가루는 너무 많은 재료가 섞인 탓에 색은 푸르죽죽하고 맛은 또 미묘해서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국까지 공수되는 미숫가루에 우유도 넣고 꿀도 넣어 남편에게 내밀며 ‘할머니께서 손수 만드신 거야. 맛이랑 색은 다 할머니의 사랑 때문이지’라고 말하며 마시길 강요했다. 남편은 ‘감당하기 벅찬 사랑’이라고 조크하며 기꺼이 마셨다. 6·25전쟁 전까지 하인 몇을 두고 사신 할머니는 궂은일을 해본 일이 없어 평생 부엌 출입을 안 하셨는데, 목사님 미숫가루만큼은 재료도 손수 고르시고 방앗간에도 직접 가신다고 고모들이 알려주셨다. 희고 고운 피부에 빼어난 미인이셨던, 곱게 쪽을 지시고 여름엔 하얀 깨끼 모시 한복을 입고 교회에 가시던 할머니. 할머니는 평생 목사님들을 위한 기도와 섬김이 주님께 대한 헌신이요 당신이 감당할 교회 봉사라고 여기신 것 같았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곳곳에서 만나 뵌다. 남편이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독일의 한 한인교회를 1년 동안 섬겼다. 임시 담임목사로 주일 설교와 심방을 담당했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아우토반 3시간 거리를 오가는 우리 가족에게 그곳의 권사님들은 각별히 마음을 쓰셨다. 남편이 위궤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권사님들은 위에 좋은 것들을 준비해주셨다. 꿀, 로열젤리, 카모마일차, 오곡밥과 갖은 나물을 담은 찬합, 집에서 만드신 소시지, 이름도 어려운 독일식 수프…. 예배와 회의를 마친 늦은 밤 귀갓길의 자동차 트렁크엔 언제나 권사님들이 넣어놓으신 정성어린 선물이 들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학생 한 사람을 위한 박사학위 방어식과 학위식이 열린다. 열 분의 교수들 앞에 서서 질문에 답변하여 자신의 논문을 방어하는 형식이다. 방어식은 잘 끝나리라고 믿은 독일 교회 성도들은 남편의 학위식 축하를 위해 음악회와 음식을 준비하셨다. 쾰른 음대 유학생이 교회에 많았는데, 그들과 네덜란드 쯔볼로 콘서바토리움 유학생들이 연합하여 음악회를 준비했다. 권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장만해 네덜란드 학교로 날라온 음식은 내 눈에도 대단했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셀 수 없이 많고, 보기에도 화려한 음식을 보고 축하객으로 온 네덜란드 사람들은 탄성을 발했다. 모두 그렇게 맛있는 또 멋있는 축하연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도 역시 그날을 잊지 못한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넘치는 사랑을 받을만한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면 늘 어른들이 떠올랐다. 조건 없이 가족과 이웃에 베풀고 섬기셨던 외할머니, 친할머니, 엄마, 아버지.

아버지는 좀 유별나셨다. 우편 배달부, 관리소 직원, 요구르트 아주머니 등 우리 집 벨을 누르는 분들을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었다. 음료수 한 병이라도 챙겨 보내야 맘이 편하신 분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지하철 안이나 육교 위에서 행상하시는 분들, 노상에서 채소를 파시는 할머니를 아버지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사주시고 더 많은 돈을 드렸다. 어쩌다 기분이 내키면 그러시는 게 아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봐드렸던 간병인에게까지 평생 일관되게 사람에게 겸손하고 친절하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셨다.

어른들의 그런 행위가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내 할머니와 부모님의 착한 행실, 선한 베풂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다 저축된 것만 같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과한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내 부모님이 하늘에 저축해 놓으신 예금을 내가 염치없게 찾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지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는가!

여전히 받고 있는 분에 넘치는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쌀집 장남과 결혼한 것도 아닌데 수년째 때맞춰 배달되는 최상품의 경기미, 고추 모종 한번 심어 본 일 없는데 농장에서 실려 권사님 차에서 내려지는 고구마, 감자, 호박, 가지, 깻잎…, 부모님이 기르셨다고 건네주는 온갖 쌈 채소와 싱싱한 고추, 방울토마토, 목사님 죽 끓일 때 사용하라며 독일에서부터 비행기에 실려 온 압력밥솥, 이제 한국에서도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려도 기회만 되면 보내오던 센소다인 치약, 카모마일차, 비타민, 51온스의 폴저스 커피….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은 내 친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날마다 우리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하늘 보좌를 울리는 그분들의 기도임을 나는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갚아보려고 나는 애써보지만 역부족이다. 내가 힘써 한 단을 옮겨 놓으면 어느 사이 볏단 다섯을 쌓아놓고 가는 형님들 같으시다. 나는 그 사랑이 버거워 바울 사도도 허락하신 사랑의 빚(롬 13:8)에 기대보기도,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마 10:44)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대보기도 하지만 논리는 어설프고 마음은 가볍지 않다. 진정 (사랑의) 빚이며, 그 빚이 설사 부모님이 하늘에 쌓아 둔 예금으로 탕감된다 해도 이젠 잔고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 내 자녀에게 나는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H가 전해준 호박을 채 친다. 나누어 반 통을 가져왔는데도 양이 많다. 시골에서 따온 것이라 그런지 정말 맛이 좋다. 새삼 친구의 다정한 마음이 고마워 혼자 속엣말을 한다.

H야! 네 하늘 통장에 다 저축될 거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