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인생길

달리는 인생길

2021-10-23 0 By 월드뷰

월드뷰 OCTO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연혜민(동명대학교 교수)


시편 90편은 모세가 120세에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인생이 신속히 지나갈 정도로 짧았다고 고백하는 그는 인생을 계수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느끼는 시간의 속도도 빨라지는 것 같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끝은 어디이고,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인생을 흔히들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한다. 먼 거리를 달려나가는 동안 다양한 상황과 심정을 느끼게 된다. 힘차게 나아갈 때가 있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림책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로 담아내는 매체이다. 그림책을 읽는 대상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교육 매체가 아닌 예술 매체로 인식되면서 그림책의 이야기도 아동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노인 이야기까지 폭넓고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림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글과 그림을 감상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달리기’라는 소재도 그림책을 읽는 독자에 따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은유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진보라 작가의 <숨이 차오를 때까지(웅진주니어, 2021)>는 1200m 오래달리기를 소재로 한 그림책이다. 그림은 달리는 운동장 트랙에만 색을 입히고, 등장인물은 펜을 사용해 거친 선과 단조로운 색감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펜을 이용한 가는 선은 머리카락 하나까지 그 움직임을 세밀하게 표현하여 역동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트랙에 중첩된 이미지로 표현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모습도, 준비하는 자세도, 달리는 속도도 다르다. 하지만 같은 시작점에서 같은 경로를 달리는 이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끝까지 함께 한다. 작가는 달리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다양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주인공은 출발선에서 ‘해낼 수 있겠지.’라며 희망을 품고 시작하다 ‘나만의 속도를 지키자.’라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어디쯤 왔는지, 다들 나처럼 힘이 드는 것인지 주위가 흐트러지고, 차츰 자신을 앞서나가는 이들을 인식하게 된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운동장 바닥이 끈적끈적 발을 붙잡는 진흙탕처럼 느껴질 만큼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멈추고 싶은 그때, 다시 힘을 내보자 마음을 다잡으며 달리는 주인공, 마지막 한계점까지 도달했지만 결국 해내고 만다.

작가는 주인공이 달리는 과정을 앞, 뒤, 위, 옆, 근경 등 다양한 시점에서 보여주며 독자의 몰입감을 높인다. 마치 나도 그 주인공처럼 힘겨운 오래달리기를 하는 듯 느끼게 한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는 기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그 감정을 공감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 모두 다른 속도로.’라는 글과 함께 모습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상기된 다섯 명의 주자가 독자를 가깝게 쳐다보는 듯한 그림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오래달리기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림책의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에 깊이 감정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생이라는 긴 트랙을 대입하더라도 이 그림책은 각자에게 의미 있는 내용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 달리기도 그렇다. 시작할 때는 희망찬 발걸음이던 것이 어느 순간 다른 이들보다 많이 뒤처져있지는 않은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만 멈추고 싶을 만큼 지칠 때도 있지만 다시 힘을 내 달음박질하기도 한다. 길고 긴 인생길을 자신의 속도로 달리다 보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먼저인지 누가 나중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래달리기


이하진 작가의 데뷔작인 <오래달리기(킨더랜드, 2021)>도 앞에서 소개한 작품과 같이 달리기를 소재로 했다. 등장인물도 똑같이 다섯 명이다. 다만 이 작품은 동물을 의인화했고 달리는 경로가 매우 다양하다. 오르막길, 물길, 꽃길, 미끄러운 길, 어두운 밤길,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마라톤 코스 같은 기나긴 길을 달리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어떻게 지나가는지 묘사되며 이들이 때로는 ‘따로’, 때로는 ‘같이’ 하는 것을 보여준다. 비장한 표정으로 앞만 보며 힘차게 달리던 주인공들은 숨이 턱까지 차는 오르막을 지나고, 물길을 헤엄치기도 한다. 이때, 가는 길마다 앞서는 동물이 바뀐다. 때로는 좋은 꽃향기에 마음을 빼앗겨 뒤처지기도 하고,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두 힘을 합쳐 서로를 도와주기도 한다. 오랜 달리기 중에 잠시 멈춰도 괜찮다. 함께라서 어두운 밤을 견디고,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뜨거운 태양도 견딜 수 있다. 마침내 목표했던 길을 모두 완주한 그들이 맛본 가슴 벅찬 감동과 기쁨은 다시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앞면지는 오래달리기를 출발하는 운동장의 색이고 뒷면지는 또 다른 시작인 물속을 보여주는 색이다. 책을 읽기 전에 두 면지를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뒤표지에서 작은 섬에 도착한 이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사진이 그려져 마지막 장면과 연결하여 이야기를 구성해 볼 수도 있다. 글은 사선으로 비스듬히 배치하여 글자 자체가 달려나가는 듯한 속도감을 연출한다. 이 그림책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다섯 등장인물의 전신을 다 보여주며 각기 달리는 모습과 이들이 함께 하는 관계성을 계속 드러낸다. 각자 다른 모습과 특징을 가진 동물들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이 달라서 때로는 다른 동물들보다 편하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어렵기도 하다. 묵묵히 여러 길을 달려나가는 동안 혼자 기대하는 소망을 따라 나갈 때도 있고, 함께 하며 의지하고 협력해서 나아갈 때도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다면, 오래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작품에 표현된 동물들의 모습은 앞선 작품과 다른 관점에서 인생 달리기를 생각하게 한다. 기나긴 인생길에서는 누구와 동반하는지가 중요하다. 경쟁자들에게만 둘러싸여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달리는 것과 동역자로, 혹은 협력자와 함께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가는 길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무작정 달려가기보다 쉼이 필요할 때가 있고, 어려운 길을 달려나갈 때 완주의 기쁨을 기대하며 견딜 수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에서 우리는 어떤 달리기를 하고 있을까?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고, 앞의 소망을 바라보며 힘든 과정을 인내할 때 우리는 끝을 맞이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인생의 달리기에서 끝까지 지켜봐 주는 동반자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로 인해 이 기나긴 길은 때로는 가파르고 힘들지라도 견딜만하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 말씀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달려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며, 그 길은 하나님과 믿음의 공동체인 수많은 동역자와 든든히 함께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꿋꿋이 오늘도 달려간다. 각자의 예정된 길을….

<dusgpals@naver.com>


글 | 연혜민

성균관대학교 아동문학미디어교육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에서 그림책과 태영아교육과 유아동교육을 강의하며, 동명대학교 유아교육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