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의 진정한 의미

정교분리의 진정한 의미

2021-10-08 0 By 월드뷰

월드뷰 OCTO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글/ 이상원(전 총신대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을 빌미로 삼아 개신 교회의 예배 모임을 금지하거나 인원수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또한, 정부와 여당 그리고 여당과 정치이념을 함께 하는 군소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성경이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 도덕적 교훈을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정책을 추진하거나 관련 법안들을 발의했다. 이에 개신교회(改新敎會) 진영이 시위, 성명서 발표, 법적 대응 등을 시작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은 정치가 어느 정도까지 종교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며, 역으로 종교는 또한 어느 정도까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연동된 질문을 제시한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는 법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정치의 주체는 입법을 담당하는 입법부, 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행정부, 법에 근거한 판결을 담당하는 사법부를 포함하는 국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정치는 곧 국가로 좁혀서 말할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입장에 서 있는 종교의 실질적인 주체는 개신교의 교회이므로, 종교라는 용어를 쓰긴 하지만 내용은 개신교의 교회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현대 사회철학, 카이퍼, 도예베르트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할 때 국가의 특성과 교회의 특성,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사회철학이 국가와 시장을 뜻하는 공적 사회(the public society)와 가족, 학교, 교회 등을 포함하는 사적 사회(the private)를 그 특성에 있어서 다른 사회로 구분하고 있는데, 특히 개신교 내 개혁주의 전통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의 영역주권론(sphere sovereignty)은 국가와 사회를 한층 더 정교하게 구분했다. 현대 사회철학은 공적 사회는 정의의 원리의 규범적 지배를 받고, 사적 사회는 인애(benevolence)의 원리의 규범적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영역주권론은 두 영역의 공통점으로 두 영역이 모두 죄를 제어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나 죄를 제어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국가는 법적 강제력을 통해 죄를 제어하고, 교회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설득을 통해 죄를 제어한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와 교회가 구분된다. 국가에 주어진 고유한 기능은 정의에 기반한 법적 강제력의 행사에 있고, 교회에 주어진 고유한 기능은 사랑에 기반한 영적이고 도덕적인 설득에 있다. 국가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을 담당하고자 해서는 안 되며, 교회가 법적 강제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진술에 대해서는 교회의 입장을 존중하고 경청해야 하며, 교회는 국가의 법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에 반하지 않는 한 국가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도예베르트는 우주의 양상을 15가지로 나눈 다음, 이 15가지 양상을 계층 구조적인 틀 안에 정리해 놓았는데, 이 틀에서 영적인 양상은 도덕적 양상의 상위에 위치해 있고, 도덕적 양상은 법적인 양상의 상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이 구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이 구조는 영적인 양상은 도덕적인 양상보다 더 깊고 넓으며, 도덕적인 양상은 법적인 양상보다 더 깊고 넓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양상은 국가의 법적인 양상보다 더 넓고 탄력적이며 더 깊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도덕적인 양상은 사실상 무제한에 가깝게 깊고 넓은 인간 영혼의 깊은 차원과 마음의 세계를 포함하여 전인의 문제를 다루는 데 비해, 법적인 양상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외적으로 드러난 인간 행위의 영역을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적인 양상으로 영적이고 도덕적인 양상을 모두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영적인 영역과 도덕적인 영역이 외적인 행위에 있어서 명백하게 사회에 해악을 끼칠 것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이 두 영역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무한하게 넓고 깊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을 법적 강제력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서, 종교와 도덕의 세계를 협애화하고 황폐화한다. 반면에 영적이고 도덕적인 양상은 법적인 강제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지만, 영성과 도덕성의 관점에서 법적인 양상 전체를 품고 규범적으로 지도할 수가 있다.

둘째로, 이 구조는 인간의 삶의 중요성에 있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양상은 법적인 양상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도예베르트는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을 보완한다.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은 국가를 사회(교회 포함) 위에 둠으로써 국가가 사회(교회 포함)를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는 구도를 배격하며, 이와 동시에 교회를 국가 위에 둠으로써 교회가 국가를 신정주의적으로 지배하는 구도도 배격한다. 카이퍼는 국가와 사회(교회 포함)를 나란히 옆에(naast, beside) 두고, 두 영역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이고 주권적인 다스림과 법을 부여받으며, 양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독립성을 서로 인정할 것을 강조했다.

국가는 강력한 조직과 행정으로 인하여 강한 구조적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사회(교회)는 자발적인 결사이기 때문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국가의 기능은 바로 이 사회(교회 포함)가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는 것임을 강조해준다. 여기서 질문은 버팀목이 먼저인가, 아니면 버팀목의 지탱을 받는 나무가 먼저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무가 먼저이며 더 중요하다. 버팀목은 나무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국가는 사회(교회 포함)를 위해 존재하고, 사회(교회 포함)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을 영적인 양상과 도덕적인 양상을 법적인 양상 위에 배치한 도예베르트의 구조가 명확히 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 가장 먼저 등장한 사회구조는 아담과 하와로 구성된 가정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동물 제사를 중심에 둔 교회 질서다. 그 다음이 시장이며, 국가는 그 다음에 등장해 가정과 교회를 보호하며 시장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를 한다.


국가와 사회의 올바른 관계 설정


지금까지 소개한 현대 사회철학, 카이퍼, 도예베르트 이론의 틀에서 볼 때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회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삶의 전 영역에 관계하며, 규범적으로 참여하고 필요할 경우에 비판한다. 교회는 국가가 법적 강제력을 바르게 행사하는가를 항상 감독하고, 바르게 행사할 때는 격려하며 그릇되게 행사할 때는 비판하는 등의 참여를 할 수 있다. 다만 교회의 참여는 기도와 도덕적인 권고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국가는 교회가 정당한 법을 범하는 것이 분명하고 사회에 명백한 피해를 주는 경우가 아닌 한, 법적인 강제력을 통해 교회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판단과 생활에 간섭하거나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외적인 행위만을 통제하는 법은 깊고 넓고 탄력이 있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을 담을 수 없으며, 담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은 망가지고 황폐화된다.

셋째, 국가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버팀목의 기능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국가 고유의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 행하는 다음 몇 가지 행태들은 이와 같은 국가와 교회의 건강한 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

a. 국가가 교회의 영적 생활의 본질이자 생명과도 같은 주일에 모이는 예배를 코로나19의 전염 차단을 빌미 삼아 과학적 근거도 불분명한 방법으로 금지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인원수 배당을 하고 나서는 것은 영적인 영역에 부당하게 국가가 깊이 간섭하는 것이며 국가의 법적 강제력을 남용하는 것이다. 마스크 착용을 철저하게 하면 얼마든지 코로나19의 전염을 차단할 수 있고 그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의 빽빽한 군중이나 콘서트나 온종일 좁은 공간 안에서 업무를 보는 국가기관의 모임은 허용하면서 한 번 모였다가 헤어지는 주일의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과도한 법적 강제력의 행사다. 10,000명이 모일 수 있는 예배당에 20명으로 집회 인원수를 제한하는 것도 법적 강제력의 남용이다.

b.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를 견제하고 전인적인 건강을 증진시키는 선한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코로나19의 전염을 피하면서 가능한 한 교회가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다양한 물적이고 법적인 지원을 해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원을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교회의 예배 지원방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고민한 일이 없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 예배를 차단하는 데만 급급했다. 이는 국가기관의 고유 업무인 사회기관들의 버팀목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c. 국가가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건전한 교회의 비판을 법적 강제력을 통해 차단하고자 하는 시도는 교회와 사회의 영역에 대한 과도하고 부당한 간섭이다. 국가의 법적 강제력의 행사는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하며 도덕적 판단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종교와 도덕의 통제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다.


국가의 의무와 기독교인의 저항권


로마서 13장 1절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라고 했고, 2절에서는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라고 하여 권세에 대한 복종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복종해야 할 권세에는 조건이 있다는 것인데, 4절과 5절에 그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그 조건은 “선을 행한 자들에 대하여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보응하는” 권세라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네로황제가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당시의 로마 정부의 형법은 상당히 공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따라서 바울도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송사건에 대해 로마 당국이 재판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황제의 재판을 받기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로마 정부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처벌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는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을 거꾸로 하는 국가, 곧 선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 처벌을 일삼고 악을 행하는 자를 장려하는 국가에 대해 교회와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로마서 13장 1절~7절의 본문은 이런 유형의 국가에 적용되는 본문이 아니다. 법적 강제력을 남용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본문이 적용되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국민에게 악을 행하는 국가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이런 책들이 일을 거꾸로 하는 국가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일을 거꾸로 하는 국가에 대한 저항의 정신은 이미 로마서 13장 1절에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 로마서 13장 1절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고 말함으로써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바로 이 말 자체가 바울 당시의 로마 정부에 대한 예리하고 강력한 비판의 말이다. 당시 로마 정부는 모든 정치적 권세의 궁극적 기원은 황제인데, 황제는 곧 신으로서 정치권력의 기원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정부는 정치권력의 인간적 기원, 자율적 기원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정치권력의 자율적 기원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정치권력의 진정한 기원은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로마 정부는 처음에는 이와 같은 로마서 13장 1절의 함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 황제가 등장한 이후의 로마 정부는 이 말의 함의를 발견하고 로마 정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여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거센 박해와 핍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원은 하나님이며, 따라서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절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양보하지 않았다.

현대의 세속화된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는 정치적 주권의 기원을 국민에게서 찾는데, 로마 정부가 정치적 주권의 기원을 황제에게서 찾던 것을 국민으로 바꾸었을 뿐 인간적 기원, 자율적 기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현대의 세속화된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도 그 기원에 있어서 반성경적이라는 점에서 언제든지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탄압하고, 핍박할 수 있는 강력한 가능성을 이미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국가가 권력의 인간적이고 자율적인 기원을 주장할 때 기독교인과 교회는 비판과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책이 명백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적 질서에 반하는 것임이 분명할 때 기독교인과 교회는 시정을 촉구하는 기도를 하거나 설교나 교육 등을 통해 도덕적인 비판을 하는 방법으로 국가의 행위에 관여해야만 한다. 담임 목회자는 설교나 교육 등의 방법을 통해 바른 국가관을 교육하고, 왜곡된 국가관을 비판함으로써 성도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시행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교회들의 연합체이자 정치기구인 교단이라든가 각종 연합모임을 통해 연대하여 국가의 반성경적인 행위들과 정책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각종 전문가 시민단체들을 조직하여 시위, 성명서 발표, 세미나 등과 같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와 정책을 전개하는 국가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 동 신학대학원(M.Div.),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M.),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D.)에서 수학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한동협 현대성윤리문화교육원 원장, 월드뷰 편집위원, 차바아 운영위원, 복음법률가회 운영위원, 카도쉬 아카데미 고문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