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

2021-08-16 0 By 월드뷰

월드뷰 AUGUST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2


글/ 최숙희(의사, 가톨릭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겸임교수)


현대 생명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전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생명 파괴와 생태계 훼손이 있다. 이에 따라 연구 과정에 생명윤리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관여하는 의과학자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손상되고 있다. 의과학적 성과로 얻어지는 경제성과 편리성 그리고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의 범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이분화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결과물과 AI로 인간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끄는 주체가 인간이므로 역설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윤리 의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은 각자 고유한 게놈(genome=gene+chromosome)과 영성(spirituality)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도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의 근원에서 영성은 잊혀왔다. 이 글에서는 영성과 생명윤리 및 프로페셔널리즘과의 관계,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의 발전과정과 개념, 최근의 실례와 앞으로의 과제 등을 다루고자 한다.


뿌리로서의 영성(spirituality)


영성이란 삶에 기를 넣어 주는 것(life-force), 우리 존재의 기본 에너지 그리고 생명의 힘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성(spirituality)의 어원을 살펴보면, 히브리어의 ruah, 헬라어의 pneuma, 라틴어의 spiritus, 산스크리트어의 prajna 등은 호흡을 뜻하는 breath과 영을 뜻하는 spirit이 합쳐진 것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영성을 호흡으로 이해하면서 죽고 사는 핵심으로 본 것이다. 인간 생명을 다루는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에서 영성은 근간이 된다. 이미 135개국 이상(2019년 통계)의 의과대학에서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의 기초로서 영성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볼드윈(Baldwin) 등의 연구에 의하면, 의사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도덕성과 윤리, 휴머니즘 그리고 영성은 특성들과 가치가 35%에서 중복된다. 즉 이타심, 측은지심, 의무감, 책임감, 충실함, 인격적 통합성(integrity), 역량을 위한 노력 등이다. 특히 전문직업성과 영성과의 연계성은 70%로 나타났다.

옥스퍼드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영성을 “사람의 여러 면을 통합시키는 필수적인 삶의 원칙으로, 이로써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관계가 끈끈해지는 기본 성분이다”라고 정의했다

미국 의과대학 연합회(AAMC)는 이미 1999년에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도록 했다. ‘조지 워싱턴 영성 건강연구소(GWISH)’에서는 영성이란 휴머니티(humanity)의 역동적이고 내재적인 요소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의미 찾기라고 했다. 외국의 통계를 보면, 77% 이상의 환자들이 의사와 영적 상담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와같이 영성은 의료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며 생명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의료윤리를 넘어서 생명윤리로


히포크라테스 시대 이후로 의료윤리는 의료 행위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다. 현대는 의료윤리의 많은 부분을 생명의료윤리(biomedical ethics)가 차지하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의료윤리는 특별히 환자 진료에 초점을 맞춘 윤리이고, 생명윤리는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 실험, 이종이식, 복제 및 줄기세포 치료 등의 다양한 사안을 좀 더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다루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이래로 의사들은 환자를 진료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입각한 의료윤리를 지키고자 힘써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나치와 일본에 협력한 의사들이 저지른 잔악한 인체 실험을 통해,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의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불가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의료윤리를 넘어서 생명윤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생명윤리(bioethics)’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70년대 미국의 종양학자인 반 렌슬레어 포터(Van Rensselaer Potter)이다. 그는 생명윤리를 “생물학적 지식과 인간의 가치 체계에 관한 지식을 서로 결합하고, 최적의 환경 변화를 도모하여 인류, 국가, 문화가 생존할 길을 찾는 새로운 학문이다”라고 했다. 이후의 생명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생긴 문제인 유전자 검사, 보조생식술, 대리모, 장기이식, 줄기세포, 동물복제 그리고 연명의료 문제 등은 미시적인(micro) 의료윤리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거시적인(macro)인 생명윤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생명윤리의 영역은 인간 생명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분야로 확대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생명의 그물에 엮여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같이 가는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


고대 부족장은 무리를 이끄는 정치인인 동시에,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종교인 역할을 하며, 병자를 고쳐주는 치료자(healer)로 의사 역할까지 했다. 이렇게 고대에는 정치, 종교, 의료가 하나였으나, 정치가 먼저 분리되었다. 중세까지 의학은 기독교적 영성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전쟁 중이라도 수도원에서는 적군도 치료하며 인종, 종교, 국가에 상관없이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했다. 반면에 전문직(professional)으로서의 의사가 시작된 시기는 13세기경이다. 특화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의사들이 길드(guilds)를 조직해서 윤리 강령을 만들고, 공공을 위한 봉사를 하면서 사회로부터 독점권(monopoly)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의사면허(medical licensure)로 이어진다. 종교적 영성을 바탕으로 한 현대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의 시작이다.

기원전 5세기경의 의학서인 인도의 아유르베다(Ayurveda)는 ‘생명’을 의미하는 아유르(āyur)와 지식, 지혜, 과학을 의미하는 베다(veda)가 합쳐진 말로서 ‘생명의 과학’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전문직 윤리와 생명윤리의 기본이 쓰여 있다. 기원전 4 세기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의사들에게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첫째로 생각하고, 서로 돕고 해를 끼치지 말라고 쓰여 있다. 현대 생명윤리와 전문직업성의 기본인 선행의 원리, 인간 존중, 해악 금지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개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히포크라테스시대 의사는 모두 다 훌륭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비윤리적인 의사들이 많아서,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사들이 자구책으로 ‘우리 의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신 앞에서 공언(profess)했던 것이다. 여기서 전문직종(profession)이 나오고, 그들이 가진 치유자(healer)와 전문직(professional)으로서의 특성의 묶음이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으로 발전했다.


대구에서 생긴 일


14세기 중반 전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plague:흑사병)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고 전염력도 강했으므로, 많은 의사가 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병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돈 많은 의사는 ‘흑사병 의사’를 고용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것이 전문직인 의사의 제 일의 의무인데, 이를 저버린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은 21세기 페스트로 불릴 정도로 팬데믹 양상을 보인다(2021년 6월 전 세계 확진자 1.79억 명, 한국 15.3만 명). 우리나라는 2020년 1월 20일 첫 환자가 발생한 후 불과 한 달 사이에 대구·경북지역의 누적 확진자가 8,000명에 달했다. 이에 이성구 대구시의사회 회장이 2020년 2월 ‘이 위기에 단 한 푼의 대가, 한마디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시민들을 구하자, 내가 먼저 제일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겠다’라는 호소문을 띄우자마자,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시켜 달라’며 수백 명의 의사가 코로나 전쟁터로 달려갔다. 위기에 진면목이 드러난다더니, 평소 돈만 밝힌다고 오해받던 이름 없는 의사들이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내가 대구다”, “우리가 의사다”, “왜 자원했느냐? 의사니까”라고 하면서, 위험한 의료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장 영성적인 말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입니다’라는 대답으로 프로페셔널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소명감과 의무, 이타심, 전문직으로서의 책무 그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모두 포함된 말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전문직업성과 생명윤리가 사회에서 발현된 의학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중국 남방과기대 교수인 허젠쿠이(賀建奎)는 2018년 11월 26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AIDS에 면역력을 갖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쌍둥이 아기 루루와 나나가 탄생했다”라고 발표함으로써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중국 과학자들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라며 규탄 성명을 냈다. 중국당국의 조사 결과, 허젠쿠이는 윤리 검토 서류를 위조해 부부 8쌍을 모집했으며,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규제와 감독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생명윤리와 연구윤리 그리고 의과학자의 전문직업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사건이었다. 현대의 생명윤리적 사안은 매우 복잡하고, 사회적 파장도 크므로 ELSI 즉 Ethical, Legal, Social, Implication으로 접근해 보아야 한다. 첫째 피험자의 권리, 안전 그리고 복지 보호를 위해 기관심의위원회(IRB: Institutional Review Board)를 통과했는지 여부다. 둘째 서류 위조는 인간 대상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충분한 정보에 의한 자발적인 동의’, ‘ 대상자의 생명, 건강, 존중’, ‘환자의 이익이 최선이 되도록’ 등의 헬싱키 선언을 위배한 것이다. 셋째 허젠쿠이를 비롯한 의사들이 ‘유전자 편집 기술 특허’를 통해 부와 명예를 추구했다는 것은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전문직업성의 전제를 망각한 행위이다. 넷째 부유층이 디자이너 베이비(designer baby)를 탄생시키면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다섯째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다음 세대에 영구적인 유전자 변화를 줄 수 있으므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인류의 존폐까지 거론된다.

생명윤리를 아는 것과 행위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으로 체화(embodied)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쏟아져 나오는 생명윤리 사안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꾸준히 새로운 지식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윤리에 대한 교육은 시기별로 인간의 성장 과정과 함께 계속되어야만 하며,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의 생명윤리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에 내재된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는 것도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생명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은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게 될 것이다.

<shckang@catholic.ac.kr>


글 | 최숙희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산부인과 의사이다.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윤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의료윤리학회 부회장과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위원이다.